영화 속의 섹스라고 해서 죄다 섹시한 건 아니다.중요한 건 노출의 수위보다 그 장면에 흐르는 흥분과 침대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11명의 영화 애호가가 각자 숨죽이면서 지켜본 순간을 귀띔했다.
<문작> 두기봉
두 명이 들어가면 남는 공간이 거의 없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 천장에 붕 떠 있는 풍선 하나가 내려와 여자의 젖가슴과 남자의 등 사이에 쏙 낀다. 잠시 뒤, 여자의 배와 남자의 허리 사이로 내려와 다시 멈춘다. 그리고 급기야는 여자의 성기와 남자의 엉덩이 사이까지 내려온다. 한참 야릇한 상상이 피어오를 즈음 꿈 깨라는 듯 ‘빵’ 하고 터지는 풍선. 두기봉 감독의 <문작> 초반부에서 신비의 여인 임희뢰가 주인공 소매치기 일당 중 한 명을 홀리게 하는 1분 남짓한 장면인데, 가끔 이 장면이 떠올라 블루레이 타이틀을 꺼냈다가 끝까지 보곤 한다. 이 영화 속 배우 임희뢰는 반짝반짝 빛나는 명품이다. 임달화, 임가동, 임설 등 수컷들이 득실거리는 두기봉의 세계에서.
-김성훈(<씨네21> 기자)
<무뢰한> 오승욱
<무뢰한> 주인공 김혜경은 호시절을 지난 멍든 꽃같은 여자다. 변두리 단란주점의 마담이자 살인자의 내연녀인 그녀는 간밤의 취기가 여전히 남아있던 새벽에 부엌 장판에 퍼져 앉아서 맨발로 한 남자의 성기를 툭툭 건드린다. 그는 나름의 목적을 갖고 형사라는 신분을 숨긴 채 혜경에게 접근한 상태다. 허기를 채우듯 정사를 나누고 난 뒤 여자는 남자를 위해 밥을 차린다. 직접 만든 잡채를 젓가락으로 떠서 먹이자 뜬금없이 남자는 “같이 살까?”라고 묻는다. 순간 아침의 햇살 아래, 보호색 같던 화장이 지워진 맨 얼굴로 여자가 엉겁결에 심장을 꺼내놓는다. “진심이야?”라고. 영화 <무뢰한>에서 가장 섹시했던 순간은 의외로 그 장면이었다. 듣고 싶었던 말을 듣고, 하고 싶었던 말을 뜨겁게 꺼내놓던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이, 채 가릴 수 없던 선홍색 마음이 분명하게 내게도 전해진 탓일 것이다.
-진명현(무브먼트 대표, 영화 마케터)
<폭력의 역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2005년 작인 <폭력의 역사>는 잔인한 갱이었던 조이가 이름까지 톰으로 바꾸고 가정을 꾸린 채 평화롭게 살다가 외부와 내부의 폭력에 의해 다시 조이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영화에는 두번의 섹스 신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톰‘이 아내와 나누는 사랑 충만 섹스이고, 두 번째는 ’조이‘의 아내가 해치우는 폭력 충만 섹스다. 그런데 이 후자가 아주 매력적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던 불안, 분노의 감정적 상태가 고스란히 정사로 표현된다. 사실 대부분의 ‘폭력적인 섹스’에서 여성은 피해자로 설정되기 쉽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아내의 감정적 흥분 상태를 공들여 묘사하면서 불쾌한 가학성의 혐의를 피해간다. 위험하면서도 짜릿한, 말 그대로 ‘치명적인’ 섹스다.
-강진아(영화감독)
<모넬라> 틴토 브라스
가슴이냐 엉덩이냐,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 남자들끼리의 술자리 담화가 아니라 여자친구에게서 직접. 난 엉덩이를 택했고 ‘왜?’라는 질문이 돌아온 건 아니어서 그 대화는 총리 인사청문회의 여당 질문처럼 적당히 마무리 되었는데 이미 내 머릿속에는 <모넬라>의 한 장면, 나풀나풀 치마를 흩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모넬라의 엉덩이가 떠올라 있었다. 그 시절을 지내온 사춘기라면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90년대의 내 끓는 호기심과 학구열은 상당 부분 틴토 브라스와 잘만 킹 감독에게 빚졌고, 난 그중에서도 영화적 완성도를 위해 노력한 듯한 잘만 킹보다는 이탈리아 시골의 햇빛 아래 엉덩이를 어떻게 드러내야만 더 노골적이고 에로틱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진지하게 애쓴 틴토 브라스 쪽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엉덩이를 좋아해서 틴토 브라스 영화가 좋았던 건지 틴토 브라스 영화를 탐닉하다 엉덩이가 좋아진 건지 <모넬라>의 그 장면이 좋은건지 나폴리의 햇빛이 부러운 건지 모를 정도로. 어쨌든, 치마를 미친 듯 바람에 나부끼며 엉덩이를 한껏 드러낸 채로 꺄르르 웃는 모넬라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어. 나 역시 서 믹스 어 랏이 노래했듯 ‘I Like Big Butts and I Can Not Lie’라고.
-임익종(만화가)
<미스 줄리> 리브 울만
마님과 돌쇠의 썸은 국경을 초월해 ‘므흣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인 모양이다. <미스 줄리>에서 백작의 딸인 줄리는 의자에 앉아 긴 드레스 밖으로 허벅지까지 드러낸 다리를 양동이에 올리고 하인인 존에게 자신의 발에 입 맞추라 명령한다. 존이 무릎 꿇고 앉아 한 손으로 줄리의 발목을 잡고 거칠게 잡아당기는 바로 그 순간, 줄리는 교성을 참듯이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린다. 그리고 신음처럼 뱉는 한 마디 “훌륭해!” 이 한 장면에서 페티시즘과 마조히즘, 사디즘, 심지어 오르가즘까지 보였다면 내가 음란마귀일까?
-황석희(번역가)
<와일드 게임> 도널드 캐멀
예전에 어느 영화제에서 우연히 봤던 스릴러로 원제는 <와일드사이드>다. 크리스토퍼 워큰이 사이코 갱으로 등장하는데, 얼마나 미쳤냐 하면 아내인 조안 첸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단발머리 모양을 따라 하고 다닐 정도다. 아무튼 이야기는 우연히 이들의 범죄 행각에 말려들게 된 은행원 앤 헤이시가 조안 첸에게 이끌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복잡해진다. 두 여자는 화장실에서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하다 느닷없이 키스를 나누고, 그 뒤로 좀 더 진한 스킨십을 교환하게 된다. 조안 첸이 맨 몸에 걸치고 있던 남성용 수트풍의 재킷 안으로 앤 헤이시가 벌벌 떨며 손을 집어 넣는 장면이 어찌나 에로틱하던지.
-정우열(만화가)
<로리타> 애드리안 라인
마흔 살의 문학교수 험버트는 하숙집 딸 돌로레스를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겨우 12살인 그녀는 자신의 어떤 행동이 그를 미치도록 흥분시키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무릎에 맨 무릎을 비비거나 숨결이 닿을 만큼 바짝 다가앉다가도 금세 바람처럼 사라지기 일쑤다. 순진무구해서 더 유혹적이다. 이른 아침, 험버트는 바깥의 소란함에 잠에서 깬다. 창밖을 보니 제 엄마의 차에 큰 여행가방을 싣고 막 차에 올라타는 돌로레스가 있다. 험버트는 사색이 된다.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눴고 사랑한다는 말도 못해봤는데. 창 너머로 눈이 마주친 돌로레스는 갑자기 차에서 튀어나온다. 가까워오는 발소리에 잠옷 차림의 남자는 어쩔 줄 모른다. 벌컥, 문이 열린다. 한달음에 험버트의 품을 파고든 돌로레스는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길고 하얀 두 다리를 벌려 험버트의 허리를 감싼 뒤 꽉 조인다.험 버트는 아찔하다. 이때 기습적으로 입술을 포개는 돌로레스. 깊숙이 스며들었다가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멀어진다. 휙 튀어 내려와 바람처럼 사라진다. 날카로운 키스 뒤에 혼자 남은남 자는 허전한 가슴과 배를 쓸어내린다. 잠에서 막 깨어난 직후 아침이었다. 애드리언 라인의 <로리타>에서 이 시퀀스를 봤을 때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금지된 사랑은 언제나 짜릿하다. 서로 통해서 막 시작되는 순간이라면 더더욱.
-이경미(영화감독)
<페이탈 피어> 제임스 폴리
한밤의 테마파크. 이제 막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 롤러코스터 좌석에 나란히 몸을 맡긴 두 명의 10대인 데이비드와 니콜은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취해 있다. 남자는 조심스레 여자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야릇한 신호를 보내고, 여자 역시 부끄러운 듯 미소로 화답하며 남자의 손을 감싸쥐어 자신의 치마 속 은밀한 곳으로 이끈다. 여자의 예상 밖 호응에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는 남자의 손짓은 점점 현란해지고 천천히 상승하는 롤러코스터가 정점에 가까워질수록 여자의 호흡은 점점 가빠진다. 마침내 정점을 지난 롤러코스터가 중력의 힘을 거부하지 못하고 떨어질 때 여자 역시 무언가에 이끌리듯 무아지경의 오르가슴에 빠져든다. 직접적인 노출이 없는 장면임에도 딸을 과잉보호하는 아버지로부터 잠시 벗어난 소녀의 해방감과 성적 희열을 롤러코스터의 점층적인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로 절묘하게 표현한, 이 비범하게 섹시한 장면은 (의외로) 여자를 스토킹하는 남자를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 <페이탈 피어>의 명장면이다. 두 남녀배우는 다름 아닌 마크 월버그와 리즈 위더스푼. 캘빈 클라인 모델 시절의 풋풋함이 그대로인 마크 월버그와 젊다 못해 어린 리즈 위더스푼의 ‘리즈’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백준오(플레인 아카이브 대표)
<그녀> 스파이크 존즈
너무 건전한 선택을 한 걸까 잠시 고민했다.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처음 ‘관계’를 가지는 장면에서는 사만다의 알몸은커녕 털끝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뭐, 존재 자체가 없는 인공지능 캐릭터다 보니 당연한 얘기지만, 문제는 사만다가 무려 스칼렛 요한슨이라는데 있다.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하는 영화의 ‘섹스 신’에서 그녀의 털끝 하나 나오지않는다니 이거야말로 심각한 사태 아닐까. 하지만 이걸 문제시하는 남자는 거의 없었을 거라고 장담한다. 이것은 섹시함의 신세계이자, 스칼렛 요한슨에게 가장 섹시한 부위는 바로 성대라는 걸 증명한 역사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박태일(프리랜스 에디터)
<더 딥 블루 씨> 테렌스 데이비스
최근엔 섹스 신의 수위나 묘사보다 침대 위에 남겨진 인물들에게 눈길이 간다. 테렌스 래티건의 클래식한 희곡을 각색한 <더 딥 블루 씨>의 헤스터는 특히 잊을 수 없다. 절제와 노력만을 미덕으로 여기고 살아온 헤스터가 제멋대로인 남자 프레디에게
빠져버린다. 흡사 교습 장면처럼 연출된 섹스 신이 끝나고 헤스터가 프레디의 등을 잘근 깨무는 장면은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아찔했다. 헤스터를 연기한 레이첼 와이즈는 예의 그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다짐하는 것 같았다. ‘절제여 안녕. 마침표.’
-김신형(KT&G 상상마당 시네마 프로그래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코세이지
싸운 뒤 아이를 대화 메신저로 쓰는 부부를 여럿 봤다. 후지다는 생각만 했지, 설마 섹시한 대화가 될 수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평소 워낙 돈과 마약과 섹스에 미쳐 있는 인간들이라 그런지,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나오미(마고 로비)는 멀쩡한 정신에 아이를 사이에 두고 이런 대화를 나눈다. “엄마가 내게 키스해주려나?” “아빠는 이제 엄마를 못 만진대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엄마는 팬티 입는 게 너무너무 지겹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팬티 차림으로 가랑이를 좍. 바람을 피워 개차반같이 보이는 남편을 이토록 무섭게 혼내는 여자라니. 무릎과 무릎 사이로 무릎 꿇고 기어가다 우아한 발길질에 저지당한 벨포트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