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제너레이션

W

패션계를 뒤흔드는 공룡 디자이너의 밑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독립한 이후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네 명의 신예 디자이너. 이들은 지금 패션 스타덤을 향해 순항 중이다.

지오 폰티가 설계한 밀라노 병원의 예배당에서 포즈를 취한 마르코 데 빈센초와 그의 옷을 입은 모델들.

지오 폰티가 설계한 밀라노 병원의 예배당에서 포즈를 취한 마르코 데 빈센초와 그의 옷을 입은 모델들.

마르코 데 빈센초(Marco de Vincenzo)가 창조하는 시실리의 여인들

활달한 이탈리아인의 얼굴을 지닌 그는 때론 고대 로마의 목양신 파우누스처럼 짓궂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론 키케로 흉상처럼 진지해진다. 시실리 출신의 떠오르는 패션 스타 마르코 데 빈센초는 퓨전과 실험적인 착시 현상을 통해,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디자이너들에게 친숙한 화려함(섹시 바로크나 민속 혹은 글래디에이터 등을 응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미지의 영역을 개척 중인 그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시실리 여성들이다. 지난 2월부터 LVMH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빈센초의 옷은 클래식한 실루엣에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하이테크 재료를 혼합한 게 특징이다. 미래주의와 레이디라이크 룩의 융합, 예를 들어 <우주가족 젯슨>의 주디 젯슨이 학교를 졸업했다고 상상해보라. 그의 2014 S/S 컬렉션은 틀을 깨뜨리는 럭셔리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절제된 드레스와 수트는 메탈릭 가죽, 디지털 이카트 프린트, 트롱프뢰유 프리즘 효과, 래커 칠한 패브릭 등에 융합되었다.

“사람들을 두 번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어요.” 빈센초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W>의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이자 절친인 지오바나 바탈리아와 나란히 앉아 조용히 농담을 주고받거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촬영 진행 과정을 지켜보곤 했다. 펜디의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일할 당시의 까다로운 경험들이, 지금의 그를 한층 더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준 듯했다. “펜디 하우스에 많은 것을 빚졌어요. 나에겐 학교와도 같은 곳이죠.” 35세의 디자이너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낮에는 일에 몰두하고, 밤에는 내 옷을 만드는 날이 이어졌으니까요.”

항구 도시인 메시나(Messina)에서 자란 빈센초는 드로잉과 디자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가족 사진들을 연구하면서 옷이 사람을 바꾸는 힘에 매료되었다. 18세 때 시실리를 떠나 로마의 명망 높은 디자인 스쿨 IED(Istituto Europeo di Design)에 입학했고, 졸업 후엔 펜
디에서 핸드백 만드는 일을 시작하면서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여전히 옷에 사로잡힌 빈센초가 소규모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발표한 건, 2009년 파리에서다. 신중하게 조율된 플리츠와 메탈릭 소재로 장식된 드레스와 몸매를 드러내는 수트를 비롯해, 호평으로 가득한 그의 데뷔 무대는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 프란카 소차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빈센초를 잡지의 유명한 신진 디자이너 콘테스트인 ‘Who Is On Next’에 1위로 올려놓았다. 이후 빈센초는 꾸준히 컬렉션을 선보여왔는데, 기하학적인 가죽에서 설인 예티를 연상시키는 모피, 픽셀 프린트, 사문석 패턴의 화사한 니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룩은 예측을 불허한다.

펜디 시절부터 특이한 재질에 대한 열정을 키워온 그답게, 이탈리아 전역의 소규모 공장과 곳곳에 있는 장인들의 워크숍이 좋은 소스가 되어준다. 무언가가 상상력을 자극한다면, 그것이 모피든지 혹은 운동복용 메시 천이든지 그가 해내지 못할 건 없다. 그 어떤 재료에도 핸드 페인팅된 독특한 3D 효과가 만들어지고, 가죽에도 금박과 플리츠가 달리고 크리스털이 더해진다. “핸드백을 만드는 수년간, 난 자유로워지길 원했어요. 창조적인 나만의 활강 경기를 벌이고 싶었던 셈이죠.” 빈센초 스타일엔 클래식한 실루엣이되 여전히 웨어러블해야 한다는 본능이 자릴 잡고 있다. “난 뮤즈가 없어요. 하지만 대신에 지오바나와 델피나 델레트레즈를 비롯해, 패션계에서 일하는 근사한 친구들이 있죠. 처음부터 난 그녀들의 리얼 라이프를 염두에 두고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디자인을 시작하면 그녀들에게 ‘이 옷이 어떤지 입어볼래요?’ 라고 물어보곤 해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저런 변형을 늘 꿈꾸죠. 혼자서 일할 때엔 오직 재료만을 갖고 열중하는 데,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물어요. ‘이게 진짜 마법을 발휘할 수 있을까!’” 글 | ANDEA LEE

로스앤젤레스 샤토 마몽 호텔의 바에서 후안 카를로스 오반도와 모델들 그리고 뮤즈인 싱어 아만다 수다노.

로스앤젤레스 샤토 마몽 호텔의 바에서 후안 카를로스 오반도와 모델들 그리고 뮤즈인 싱어 아만다 수다노.

밤의 지배자, 후안 카를로스 오반도 (Juan Carlos Obando)

지난 1월, <W>의 골든 글러브 파티에서 후안 카를로스 오반도는 베뉴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다가 에이미 애덤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메리칸 허슬>의 이 여배우는 오반도의 섹시한 폴카도트 홀터 가운을 입고서 필름 페스티벌에 등장한 바 있다. “그녀는 ‘정말 고마워요, 이 드레스를 입으면 아름다우면서도 편안한 기분이 들어요!’ 라고 칭찬해주었죠.”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가 말한다. 이러한 찬사는 오반도의 팬들에겐 공통적인 후렴구다. 제시카 알바는 실크 블라우스, 파자마 세트, 바이어스 컷 드레스, 풀 스커트 등을 정기적으로 구입하며, 패션 컨설턴트 캐서린 로스도 그의 열혈 팬이다. 고향인 콜롬비아 바랑키야(Barranquilla)의 감각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여성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그는 주로 ‘밤을 지배하는 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린 A와 B 둘 다를 제공하진 않아요. B라는 장소에만 적합한 룩에 집중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오반도의 옷들은 광범위하게 어필하는 매력을 지녔다. 6월경에는 제이크루와의 캡슐 컬렉션을 발표할 예정인데, 집시에게 영감을 얻은 칵테일 룩과 스트랩 샌들 등도 출시한다. 또 남성적인 무드의 주얼리를 포함해 독자적인 라벨 역시 확장 추세에 있는데, 바니스 뉴욕에선 이 모든 것을 판매하고 있다. “19세 때 친구들은 베르사체 신상 화이트 진에 사로잡혔지만, 난 베르사체가 뭔지도 몰랐어요.” 당시 그의 관심사는 오직 그래픽 디자인이었다. “코카콜라 로고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가 설명한다.

하지만 2002년 사치 앤 사치(Saatchi & Saatchi)사의 광고 일을 맡으면서, 환상적인 의상들과 어우러진 자동차 광고를 만들어야 했는데 보통은 이런 상황에선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하겠지만, 오반도는 시어스(Sears)에서 재봉 기계와 맥콜스 퀼팅 패턴 등을 구입했다. “사용설명서를 잘 읽으면 굉장히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요.” 독학으로 배운 패션을 보완하기 위해, 오반도는 아제딘 알라이아와 구찌의 빈티지 의상을 직접 해체해 그 구조를 분석하곤 했다. 그렇게 조용히 기량을 갈고 닦은 후, 2006년 LA의 봄 패션위크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때 발표한 보석 톤의 가운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2010년 오반도는 실질적으로 광고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광고가 지닌 설득력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안다. 지난 1월 피프스 애비뉴의 19세기 맨션에서 열린 뉴욕 패션위크의 런웨이 쇼는 환상적인 박람회를 방불케 했기 때문! “지금은 내 커리어에서 모든 것들이 혼합되는 순간이에요.” 그가 말한다. “그것도 예전보다 훨씬 더 갈고 다듬어진 방식으로 말이에요.” 글 | KARIN NELSON

주 드 폼 박물관(jeudepaume.org)에서 열린 나타샤 니식의 ‘에코’ 전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줄리앙 도세나와 모델들.

주 드 폼 박물관(jeudepaume.org)에서 열린 나타샤 니식의 ‘에코’ 전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줄리앙 도세나와 모델들.

줄리앙 도세나(Julien Dossena)의 모던한 미래주의

줄리앙 도세나는 2012년 12월 발렌시아가 디자이너직을 그만두었다. 그의 보스인 니콜라스 제스키에르가 레이블을 떠난 후 패닉 상태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머물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그가 말한다. “그곳에서 4년간 일했지만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가 패션계와 멀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몇 주 후 31세의 이 핸섬한 디자이너는 파코 라반의 컨설턴트로 러브콜을 받았다. 하우스를 매각한 푸이그(Puig)그룹은 1960년대 쿠레주와 피에르 가르댕과 더불어 나란히 패션계를 장식했던 때처럼, 향후 파코 라반을 미래주의 레이블로 부활시키길 원했다. 지난 수년간 두 명의 수석 디자이너가 거쳐간 후에 CEO 마크 푸이그는, 하우스에 합류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도세나에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직을 제안했다. 지난해 가을 파리에서 열린 도세나의 첫 컬렉션은 글로시한 가죽 드레스, 메탈 메시 톱, 실버 진 등으로 광범위한 호평을 이끌어냈다. “파코 라반의 반항적인 기운과 모더니티를 사랑했어요.” 도세나가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컬렉션은 동일한 미학적 임팩트를 지니되,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죠.”

지금은 은퇴해 80세를 넘긴 파코 라반은 전위적이고 초현실적인 미래파 디자이너였다. 1966년 그는 메탈, 플라스틱, 고무, 카드보드 등을 이용해 ‘현대적 재료로 만든 입을 수 없는 의상 12벌’이라는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다. 종이, 니트 모피, 섬유유리 옷 등을 비롯해 파코라반의 실험은 계속되었고, 프랑수아즈 아르디와 브리짓 바르도 등 모험을 즐기는 젊은 셀렙들의 사랑을 받았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더욱 빛을 발한 파코 라반은 1999년 은퇴 직후, 러시아 미르 우주정거장이 파리에 추락할 것이라는 기이한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도세나는 부분적으론 미래주의 비전을 담고 있지만, 종말을 예언하기보다는 J.G. 발라드 등 웨이브 작가들의 SF 소설을 읽는 쪽을 더 좋아한다. 브르타뉴에서 태어난 도세나는 파리에서 예술사를 전공했고, 브뤼셀에선 패션을 공부했다. 2008년 졸업 후 제스키에르에게 고용되었고, 발렌시아가에서 경험한 다양한 기술적 실험은 유사한 문화를 공유한 파코 라반을 위한 이상적인 토대가 되어주었다. 데뷔 쇼에서 도세나는 파코 라반의 일부 오리지널 패브릭 소재를 접목시켰지만, 좀 더 최신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버전이다. “체인은 파코 라반의 시그너처지만, 줄리앙은 훨씬 더 가볍고 편안한 버전을 만들어 냈어요.” 콘셉트스토어 웹스터의 CEO 로레 헤리아드 뒤브레이(Laure Heriard Dubreuil)가 말한다.

한층 젊어진 혁신은 파코 라반의 도세나뿐만 아니라, 공동 창립한 그의 독자적 레이블 ATTO에도 적용된다. 제스키에르, 마틴 마르지엘라, 헬무트 랭을 존경하는 그는 ‘컬렉션을 거대한 비전의 일부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옷을 만들기 시작하면 백이 추가되고, 로고와 부티크와 그 밖의 수많은 것이 따라붙죠. 계속해서 직구 서브를 날려야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모든 세계가 다 바뀌거나 창조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에요. 풍경에서부터 건축이나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파코 라반은 메탈 벽면과 메탈 퍼니처에 둘러싸인 채 메탈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창조해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나만의 가상현실을 구축해야 할 때죠.” 글 | ALICE RAWSTHORN

런던 클래리지 호텔 (claridges.co.uk)에서 시몬 로샤와 그녀의 디자인을 입은 모델들.

런던 클래리지 호텔 (claridges.co.uk)에서 시몬 로샤와 그녀의 디자인을 입은 모델들.

시몬 로샤(Simone Rocha)의 순수의 시대

“핸드백을 갖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모든 디자인엔 포켓이 달려 있어요.” 시몬 로샤가 달콤한 아일랜드 억양으로 설명을 한다. 그녀는 내게 심플한 누드 실크 오간자로 재단한 슬리브리스 칵테일 드레스와 부드러운 검은색 네오프렌 페티코트 스커트를 보여주었다. 문제의 포켓은 솔기 깊숙이 들어가 있으며, 시스루 실크 소재의 경우엔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입고 벗기 쉬운, 레이디라이크 무드의 드레스다. 드레스는 확실히 만져보고 싶은 재미가 있었다! 지난해 봄 잡지에서 소개했을 때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킨 아이템들이다. 하지만 찬찬히 모든 걸 훑어본 후 선반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으려 했지만, 이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알아요.” 하트 모양의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띤 채 로샤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한다. “마치 뽁뽁이를 올려놓는 것 같죠?”

촉감은 부드럽고 가볍지만, 로샤의 모든 컬렉션이 그러하듯 이 드레스는 결코 일회용이 아니다. 옷들의 구조는 굉장히 인상적이며 수작업과 테크니컬한 기법, 달콤함과 터프함 등 수많은 대조적인 요소들이 믹싱되어 있음에도 어느 하나 서로를 압도하지 않는다. 젊은 신진 디자이너(올 9월에 28세가 된다)임에도, 로샤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대중에게 알렸다. 웨어러블한 그녀의 옷들은 레이디 가가, 리애나, 리타 오라 같은 패셔니스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2010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를 졸업한 후 2년간 런던패션위크에서 쇼를 선보였지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지난 시즌부터다. 달걀 모양의 칼라 없는 인조 모피 레오퍼드 코트, 퍼스펙스(투명 아크릴) 브로그 슈즈와 매치한 와이드 팬츠 등은 수많은 잡지 곳곳을 장식했다. 작년 12월 로샤는 브리티시 패션 어워드의 신인상을 수상했고, 핑크 스커트 수트를 입은 채 소감을 밝혔다. “핑크를 입는 건 정말 재밌어요! 평소엔 이렇게 입진 않지만, 굉장히 순수한 느낌을 준답니다.”

로샤는 ‘바구니에 담긴 아기 때부터 패션쇼의 백스테이지에 익숙했다’고 털어놓는다. 홍콩 출신의 아버지 존 로샤는 더블린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고, 어머니 오데트는 존의 매니저다(존 로샤는 미국 등지에선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국, 특히 아일랜드에선 하이엔드 레디투웨어, 미니멀리즘 라인의 디자인 퍼니처, 실버 주얼리, 데븐햄즈 백화점의 인하우스 컬렉션 등으로 유명하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백스테이지에 친숙했던 그녀는 “꽤 어릴 적부터 타이츠와 언더웨어를 구입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니트와 크로셰 뜨개질도 배웠어요. 그러다가 인턴들과 함께 패턴 커팅 룸에서 일하기도 했고요. 대학을 들어가기 전부터 쭉 그랬어요.” 대학에선 아트를 전공했지만, 곧 패션으로 전향했다. “흔히 사람들은 제 성장 과정이 얼마나 근사하고 즐거웠는지 물어오죠. 하지만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달라요. 삶은 진짜 힘든 것 이니까요. 어릴 적부터 쇼가 열릴 때마다 느꼈던 감정이에요.”

이제 로샤의 부모는 그녀를 돕는 조력자가 되었다. 오데트는 딸의 비즈니스 파트너이고, 존은 솔직한 반응과 평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아버지와 딸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소재다. 존이 시적이고 낭만적이라면, 로샤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지 않을 때, 그녀는 종종 꼼데가르송을 택한다. 그녀의 라인은 최근 심플한 가죽 핸드백 라인까지 확대되었는데, 런던 도버 스트리트 마켓, 뉴욕 삭스 피프스 애비뉴 등에서도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아직 커리어 초창기임에도 놀랄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그녀는 적지 않은 부담감을 털어놓는다. “원래의 계획은 이 정도 규모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래서인지 아직은 이렇게 빠른 속도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걸 터득하진 못했죠. 하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 믿어요.” 글 | ALEXANDRA MARSHALL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정진아
포토그래퍼
Emma Summ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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