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튀르가 운동화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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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패션의 영역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스니커즈의 발자취, 이 안락하고도 자신감 있는 자기 본위의 트렌드에 대해.

런웨이에는 항상 드라마가 있다. 1999년 알렉산더 매퀸의 스프레이 페인팅 로봇부터 2007년 후세인 샬라얀의 로봇 드레스, 2010년 샤넬
런웨이 위의 거대한 빙하, 그리고 2011년 루이 비통 런웨이에 담배를 물고 등장한 케이트 모스까지. 얼마나 많이 회자되는 드라마(최근에는 SNS를 통해)를 만들어내는지가 쇼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디자이너들은 매 시즌마다 이 결정적 신을 만들어내기 위해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쏟아붓는다(가장 최근의 예가 필요하다면 바로 얼마 전 열린 2014 F/W 시즌 ‘샤넬 슈퍼마켓’을 검색해볼 것).

이렇게 볼 때, 패션 드라마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 2014 S/S 시즌의 가장 드라마틱한 신(Scean! Shoes가 아니라)으로 꼽힌 것이 다름 아닌 ‘스니커즈’였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하다. 전 세계에서 샤넬 공방으로 모여든 장인들이 짧게는 십수 일,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지었을 게 분명한 시퀸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의 발에 신겨진 스니커즈. 수지 멘키스는 즉각 ‘신발 좀 봐!’라는 제목으로 쇼를 리포트했고, 전 세계의 미디어가 길거리에서 오트 쿠튀르 무대로 신데렐라보다 더 화려한 신분 상승을 이룬 이 패션 아이템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물론 평범한 스니커즈는 아니었다. 메탈릭한 컬러의 빈티지 가죽에 자수와 비즈로 장식되고, 끈은 더없이 섬세한 시폰 소재로 이루어진 쿠튀르 슈 메이커 마사로의 작품이었으니. 라프 시몬스 또한 전날, 크리스찬 디올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아쿠아 슈즈와 스니커즈가 결합된 형태에 오색찬란한 스팽글로 장식된 슈즈를 선보인 바 있다.

이 난리통 속에서 단 한 사람, 피비 파일로는 조용히 웃음을 짓고 있을지 모르겠다. 단 한순간에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사실 이 신분 상승은 착실히 단계를 밟아가며 이루어진 것이며, 그 시작점에는 그녀가 있었으니까. 여성의 마음을 꿰뚫는 선견지명을 지녔다고 일컬어지는 디자이너답게, 앞서 2012 S/S 시즌 이미 반스 운동화 스타일 슈즈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그녀는 이듬해 2013 S/S 시즌 버켄스탁을 리메이크한 슈즈로 연타 홈런을 날리며 ‘편한 신발=쿨함’이라는 새로운 공식을 만들었던 것. 같은 해 움베르트 레온과 캐롤 림 듀오는 겐조 하우스에서의 첫 협업 상대로 반스를 선택했고, 지방시 또한 같은 해 기하학적 패턴의 스니커즈를 런웨이에 올렸다. 이번 시즌에도 이 현상은 그대로 이어져, 피비 파일로의 맥시멀한 아트 룩에는 여전히 납작한 트위드 소재의 스니커즈가 매치됐고, 리카르도 티시는 시의적절하게 나이키와의 협업으로 패션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중. DKNY나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타미 힐피거처럼 스포티즘을 메인 캐릭터로 두고 있는 브랜드뿐만 아니라 릭 오웬스, 꼼데가르송, 요지 야마모토, 자일스 등 아방가르드한 브랜드의 런웨이에서도 스니커즈는 말 그대로 ‘주인공’이었다.

“이제 ‘희생양’이 되지 않고도 패션을 즐길 수 있어요.” 패션계의 연금술사 칼 라거펠트는 ‘Fashion Victim’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현재 하이엔드 디자이너 브랜드의 쇼룸이나 핫한 멀티숍의 슈즈 코너에는 스니커즈가 빠지지 않는다. 발렌티노, 지방시, 랑방, 쥬세페 자노티 등등 스니커즈를 선보이고 있는 브랜드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 실제로 얼마 전 열린 2014 F/W 컬렉션장 앞에서는 길거리에서 시작돼 오트 쿠튀르 무대에까지 오른 이 스니커즈 트렌드가 또다시 거리를 장악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단, ‘하이패션’으로 그 지위가 승격된 채! 이제 하이패션과 이 쿨한 슈즈의 믹스 매치는 패션 피플의 미덕이자 과제인 셈이다. “스니커즈를 신기위해 룩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의 룩에서 슈즈만 스니커즈로 바꾸면 돼요. 대신 힐을 고르듯, 룩에 어울리는 컬러와 소재를 고르는 게 중요하죠.” 멀티숍 라움 에디션의 스니커즈 바이어 서철우의 말. 새로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또 신발장을 가득 채운 힐만큼 스니커즈를 사들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 한숨이 나긴 하지만,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에디터라는 활동적인 직업상 스니커즈 트렌드는 두 손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쿠튀르 컬렉션 피날레를 장식한 웨딩드레스에까지 스니커즈를 매치한 칼 라거펠트가 백스테이지에서 “오! 전 스니커즈는 신지 않아요”라고 말한 것처럼 이 트렌드에 절대로 동참할 수 없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그래도 어떤가? 이런 ‘다양성’ 덕분에 패션이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있으니.

1. 메탈릭한 컬러가 돋보이는 스니커즈는 랑방 제품. 95만원
2. 펜으로 낙서한 듯한 패턴의 하이톱 스니커즈는 발렌시아가 by 10꼬르소 꼬모 제품. 57만5천원.
3. 다양한 소재가 패치워크된 하이톱 스니커즈는 Y-3 by 무이 제품. 65만원.
4. 빨강 스파이크 포인트의 화이트 스니커즈는 프로스펙트 by 쿤위드어뷰 제품. 30만원대.
5. 스트라이프 패턴의 하이톱 스니커즈는 피에르 아르디 제품. 1백21만원.
6. 스파이크 장식의 네온 핑크 컬러 하이톱 스니커즈는 젠치 by 쿤위드어뷰 제품. 57만8천원.
7. 송치와 페이턴트 소재가 믹스된 미드 로 톱 스니커즈는 쥬세페 자노티 제품. 1백18만원.
8. 블루와 화이트 컬러의 메시 소재 스니커즈는 데쌍트 제품. 12만9천원.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이지은(Lee Ji Eun)
포토그래퍼
JASON LLOYD-EVANS, KIM WESTON ARNOLD,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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