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수연과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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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말이 틀리지 않아요. 10대엔 시속 10킬로미터로 시작해서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흐른다는 얘기 말이에요.” 시속 40킬로미터의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강수연과 마주 앉았다. 우리가 아주 오래 알아온 이 사람은 그 시간과 나긋하게 발맞춰 걷는 여자였고, 배우였다. 세월의 속도를 원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채.

진한 녹색 원피스는 아크리스, 액세서리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흰색 셔츠는 르베이지 제품.

검은색 테일러드 수트는 아크리스, 슈즈 게스슈즈, 목걸이는 다미아니 제품.

스무 살
여자는 서른 두셋부터 삼십대 후반까지가 제일 예쁜 것 같아. 그런데 나한테 이십대로 돌아갈래, 지금의 나이로 있을래 물어본다면 그냥 머물겠다고 할 것 같아요. 다시 살아도 그만큼의 실수는 할 거 같으니까. 너무 바쁘고 치열하게 초조해하면서 이십대를 살았어. 그때 나한테는 일이 제일 의지가 됐어요. 그게 제일 재밌었거든. 근데 사실은 다른 재미란 걸 모른 거였어요. 그게 내 세계의 전부였던 거죠. 후배들에게는 즐기라고 하고 싶어요. 젊음도 즐기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즐겨요. 어떤 마음으로 오건 결국 지금의 나 자신이 되는 건 변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더 여유롭게 해도 되는 거였어요.

사랑
연애 많이 하세요. 사랑은 사람에게 그 나이 그때의 감성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만들어줘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을 두려워하지 마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요. 미리 고민하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갈수록 심각해지니까. 이십대는 실패해도 실수해도 용서되는 나이잖아요. 용서받을 수 있고 학습할 수 있는 나이예요. 친구, 애인, 선배, 스승… 많은 관계를 만들어봐요. 그게 가장 큰 공부니까. 난 누군가를 대할 때 저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너무 겁을 냈어요. 어른들은 어려워하고, 스승을 모시기엔 두렵고, 연애는 책임져야 할 것 같아 못하고, 친구는 삐쭉빼쭉대느라 못 사귀고… 누구든 만나서 스펀지처럼 감성을 채우세요. 스펀지는 시간이 흐르면 시멘트가 돼요. 그리고 시멘트 시절에는 스펀지 때 흡수한 영양분을 갖고 살아야 해요. 심각해지고 책임감 많아지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으로 우리 모두의 인생은 가게 되어 있으니까, 젊은 날까지 고민을 미리는 하지 말자구요.

결혼
살면서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 게 부럽지는 않아요. 그런데 아이는 좀 부러운 거 같아. 여자에게 자식이란 일생의 특별한 사랑인 거잖아. 어릴 때는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됐어’ 그랬어요. 마흔 될 때까지는 절대 안 한다고. 그때는 나이 먹을수록 기회가 없어지는 걸 상상 못한 거지. 멋모를 때 결혼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이 맞는 거 같아. 점점 생각도 많아지고 눈에 보이는 것도 많아져서 힘들어지니까. 이제는 결혼도 하고 싶은데 너무 늦게 그 생각을 한 거야, 신경질 나…. 이럴 줄 알았으면 오랜 애인이라도 하나 둘걸 그랬나봐(웃음). 이렇게 시행착오가 많아, 산다는 게. 친구도 많고, 좋아하긴 하지만 그걸로는 안 채워지는 절대적인 빈 공간이 있어요. 혼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사람의 감성이 드라이해져요. 그건 정말 경계해야 할 부분이거든.

어른의 사랑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님, 박중훈 씨, 모두 몇십 년 동안 보아온 사람들과 다시 일하는 데 정말 편했어요.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거죠. 일을 처음 시작하면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 첫째인데, 그럴 필요가 없는 분들이니까요. 촬영 첫날 마치 일 년 찍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박중훈 씨와의 러브라인이 있는데, 감독님의 첫 말씀은 “어른들의 사랑을 찍고 싶다”였어요. 과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고 일상 같은 어른들의 사랑. 거기다 대고 “사랑이 십대나 이십대나 삼십대나 똑같지 않아요?” 했더니 철딱서니없다며… (웃음). 난 육십이 되어도 똑같은 열정을 가져야 사랑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어른들의 사랑이란 게 있다고 영화 찍는 두 달 동안 설명을 하셨어요. 그런 사랑은 슬플 것 같아. 우린 올인해야 하잖아. 상대도 나한테 올인해야 하고. 그런데 자기 일상의 틀을 건드리지 않으며 하는 사랑이란 건 슬프지 않아요? 나이 먹을수록 지켜야 하는 게 많아지고 균형을 잃으면 안 되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훨씬 더 좋아해서, 나를 흔들면서 하는 사랑이 후회가 없지 않을까? 뜨거운 여자? 아니야, 지금은 불이 다 식었어.

가족
고양이 세 마리, 개 두 마리랑 같이 살아요. 한 번도 반려동물이랑 같이 살지 않은 적이 없어. 친구는 나한테 그러더라구요. “사람을 하나 키우지, 왜 개 고양이를 키워?” 그래서 답했어요. 사람이 개고양이보다 나한테 뭘 더 해줄 수 있냐고. “똥오줌은 가릴 줄 알잖아” 하는 거예요. 그래 그거 참 큰 거지…(웃음) 한 마리보다 두 마리가 더 쉬워요. 마음을 덜 써도 되고 저희들끼리 잘 놀거든. 그런데 숫놈끼리는 안 돼. 텃세부리고 싸우고 영역 표시하고… 수컷들은 왜 그럴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은 거 같아. 동물을 키우는 건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나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게, 동물들 아니면 없잖아요. 집에 들어가면 다섯 마리가 나를 둘러싸고 동그랗게 앉아요. 나한테 잘 보여서 사랑받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어서 사랑해줘 하고 당당하게 요구해요. 집에선 걔네가 영화배우고 내가 언년이예요.

배우
배우는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노동자인 거 같아요. 자기의 육체와 영혼과 감성과 갖고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게 배우예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를 학대하면서 상처받기도 다치기도 쉽죠. 그러면서도 내 자신을 올곧게 지켜내야만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자기 인생을 잘 살지 않으면 좋은 배우도 안 되는 거 같아요. 자신의 주어진 삶을 정말 솔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야죠.

그리고, 여배우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여배우가 나이 드는 거, 라구요? 그건 보는 사람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말이에요. 난 여배우건 남배우건 배우는 늙어야 한다고 생각해. 예쁘고 어린 모습도 있어야 하지만 깊이나 내면의 표현은 어린 나이엔 나올 수가 없거든. 물론 나이 먹어서도 내가 이십대 때 하던 걸 하려고 하면 안 되겠지. 이십대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웃음).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해내면서 나이 먹어가는 배우들이 근사한 거예요. 나도 그걸 해야지. 아역에서 청소년기, 청소년기에서 성인배우로 넘어가는 과정을 참 치열하게 겪었어요. 아역배우 출신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얘기 참 많이 들었고, 그만둬야 하나 생각도 하고. 그때는 어린아이같은 걸 하면 아역에 머물러 있는다고 욕을 먹고, 어른스러운 걸 하면 어린애가 왜 저런 걸 하냐고 욕먹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지금 성인기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편안해요. 이십대에 데뷔한 배우였으면 지금 그런 고민을 겪고 있겠지만. 나는 정말 늙어서까지 배우를 하고 싶어요. 할머니 배우로 넘어가는 과정은아마 지금보다 더 편하지 않을까? <집으로…>의할머니 역할 할 정도까지 하면 좋겠어요. 그전에<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시> <마더> 이런 것도하면 좋겠구. 지금을 잘 보내야 좋은 여배우로늙어가는 행운이 있지 않겠어요?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PARK JK HYUK
스탭
스타일리스트/안정아, 헤어 | 최진영(이희, 메이크업 | 희진(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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