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 말이 틀리지 않아요. 10대엔 시속 10킬로미터로 시작해서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흐른다는 얘기 말이에요.” 시속 40킬로미터의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강수연과 마주 앉았다. 우리가 아주 오래 알아온 이 사람은 그 시간과 나긋하게 발맞춰 걷는 여자였고, 배우였다. 세월의 속도를 원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채.
스무 살
여자는 서른 두셋부터 삼십대 후반까지가 제일 예쁜 것 같아. 그런데 나한테 이십대로 돌아갈래, 지금의 나이로 있을래 물어본다면 그냥 머물겠다고 할 것 같아요. 다시 살아도 그만큼의 실수는 할 거 같으니까. 너무 바쁘고 치열하게 초조해하면서 이십대를 살았어. 그때 나한테는 일이 제일 의지가 됐어요. 그게 제일 재밌었거든. 근데 사실은 다른 재미란 걸 모른 거였어요. 그게 내 세계의 전부였던 거죠. 후배들에게는 즐기라고 하고 싶어요. 젊음도 즐기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즐겨요. 어떤 마음으로 오건 결국 지금의 나 자신이 되는 건 변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더 여유롭게 해도 되는 거였어요.
사랑
연애 많이 하세요. 사랑은 사람에게 그 나이 그때의 감성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만들어줘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을 두려워하지 마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요. 미리 고민하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갈수록 심각해지니까. 이십대는 실패해도 실수해도 용서되는 나이잖아요. 용서받을 수 있고 학습할 수 있는 나이예요. 친구, 애인, 선배, 스승… 많은 관계를 만들어봐요. 그게 가장 큰 공부니까. 난 누군가를 대할 때 저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너무 겁을 냈어요. 어른들은 어려워하고, 스승을 모시기엔 두렵고, 연애는 책임져야 할 것 같아 못하고, 친구는 삐쭉빼쭉대느라 못 사귀고… 누구든 만나서 스펀지처럼 감성을 채우세요. 스펀지는 시간이 흐르면 시멘트가 돼요. 그리고 시멘트 시절에는 스펀지 때 흡수한 영양분을 갖고 살아야 해요. 심각해지고 책임감 많아지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으로 우리 모두의 인생은 가게 되어 있으니까, 젊은 날까지 고민을 미리는 하지 말자구요.
결혼
살면서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 게 부럽지는 않아요. 그런데 아이는 좀 부러운 거 같아. 여자에게 자식이란 일생의 특별한 사랑인 거잖아. 어릴 때는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됐어’ 그랬어요. 마흔 될 때까지는 절대 안 한다고. 그때는 나이 먹을수록 기회가 없어지는 걸 상상 못한 거지. 멋모를 때 결혼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이 맞는 거 같아. 점점 생각도 많아지고 눈에 보이는 것도 많아져서 힘들어지니까. 이제는 결혼도 하고 싶은데 너무 늦게 그 생각을 한 거야, 신경질 나…. 이럴 줄 알았으면 오랜 애인이라도 하나 둘걸 그랬나봐(웃음). 이렇게 시행착오가 많아, 산다는 게. 친구도 많고, 좋아하긴 하지만 그걸로는 안 채워지는 절대적인 빈 공간이 있어요. 혼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사람의 감성이 드라이해져요. 그건 정말 경계해야 할 부분이거든.
어른의 사랑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님, 박중훈 씨, 모두 몇십 년 동안 보아온 사람들과 다시 일하는 데 정말 편했어요.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거죠. 일을 처음 시작하면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 첫째인데, 그럴 필요가 없는 분들이니까요. 촬영 첫날 마치 일 년 찍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박중훈 씨와의 러브라인이 있는데, 감독님의 첫 말씀은 “어른들의 사랑을 찍고 싶다”였어요. 과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고 일상 같은 어른들의 사랑. 거기다 대고 “사랑이 십대나 이십대나 삼십대나 똑같지 않아요?” 했더니 철딱서니없다며… (웃음). 난 육십이 되어도 똑같은 열정을 가져야 사랑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어른들의 사랑이란 게 있다고 영화 찍는 두 달 동안 설명을 하셨어요. 그런 사랑은 슬플 것 같아. 우린 올인해야 하잖아. 상대도 나한테 올인해야 하고. 그런데 자기 일상의 틀을 건드리지 않으며 하는 사랑이란 건 슬프지 않아요? 나이 먹을수록 지켜야 하는 게 많아지고 균형을 잃으면 안 되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훨씬 더 좋아해서, 나를 흔들면서 하는 사랑이 후회가 없지 않을까? 뜨거운 여자? 아니야, 지금은 불이 다 식었어.
가족
고양이 세 마리, 개 두 마리랑 같이 살아요. 한 번도 반려동물이랑 같이 살지 않은 적이 없어. 친구는 나한테 그러더라구요. “사람을 하나 키우지, 왜 개 고양이를 키워?” 그래서 답했어요. 사람이 개고양이보다 나한테 뭘 더 해줄 수 있냐고. “똥오줌은 가릴 줄 알잖아” 하는 거예요. 그래 그거 참 큰 거지…(웃음) 한 마리보다 두 마리가 더 쉬워요. 마음을 덜 써도 되고 저희들끼리 잘 놀거든. 그런데 숫놈끼리는 안 돼. 텃세부리고 싸우고 영역 표시하고… 수컷들은 왜 그럴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은 거 같아. 동물을 키우는 건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나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게, 동물들 아니면 없잖아요. 집에 들어가면 다섯 마리가 나를 둘러싸고 동그랗게 앉아요. 나한테 잘 보여서 사랑받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어서 사랑해줘 하고 당당하게 요구해요. 집에선 걔네가 영화배우고 내가 언년이예요.
배우
배우는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노동자인 거 같아요. 자기의 육체와 영혼과 감성과 갖고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게 배우예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를 학대하면서 상처받기도 다치기도 쉽죠. 그러면서도 내 자신을 올곧게 지켜내야만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자기 인생을 잘 살지 않으면 좋은 배우도 안 되는 거 같아요. 자신의 주어진 삶을 정말 솔직하게 성실하게 살아야죠.
그리고, 여배우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여배우가 나이 드는 거, 라구요? 그건 보는 사람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말이에요. 난 여배우건 남배우건 배우는 늙어야 한다고 생각해. 예쁘고 어린 모습도 있어야 하지만 깊이나 내면의 표현은 어린 나이엔 나올 수가 없거든. 물론 나이 먹어서도 내가 이십대 때 하던 걸 하려고 하면 안 되겠지. 이십대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웃음).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해내면서 나이 먹어가는 배우들이 근사한 거예요. 나도 그걸 해야지. 아역에서 청소년기, 청소년기에서 성인배우로 넘어가는 과정을 참 치열하게 겪었어요. 아역배우 출신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얘기 참 많이 들었고, 그만둬야 하나 생각도 하고. 그때는 어린아이같은 걸 하면 아역에 머물러 있는다고 욕을 먹고, 어른스러운 걸 하면 어린애가 왜 저런 걸 하냐고 욕먹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지금 성인기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편안해요. 이십대에 데뷔한 배우였으면 지금 그런 고민을 겪고 있겠지만. 나는 정말 늙어서까지 배우를 하고 싶어요. 할머니 배우로 넘어가는 과정은아마 지금보다 더 편하지 않을까? <집으로…>의할머니 역할 할 정도까지 하면 좋겠어요. 그전에<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시> <마더> 이런 것도하면 좋겠구. 지금을 잘 보내야 좋은 여배우로늙어가는 행운이 있지 않겠어요?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PARK JK HYUK
- 스탭
- 스타일리스트/안정아, 헤어 | 최진영(이희, 메이크업 | 희진(이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