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유가 네 명의 게스트 에디터들을 초대했다. 영화감독 김종관, 카투니스트 올드독, 소설가 배명훈, 아티스트 백현진이 바로 그 에디터 아닌 에디터다. 그들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배양된 이야기는 저마다 잘하는 영상, 만화, 픽션, 드로잉이라는 각각의 형식으로 숙성해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이것은 인터뷰 아닌 인터뷰다.
카리스마 근접 조우
배명훈이 만난 임요환
팝음악에 아무리 문외한이더라도 비틀스와 마이클 잭슨의 이름까지 모르기란 어렵다. 마찬가지로 컴퓨터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의 시작 화면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 한들, 임요환의 존재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 대중에게 그는 곧 프로게이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온라인 게임이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는 과정을 이 ‘노장’ 선수는 한복판에서 꾸준히 지켜봐왔다. 소설가 배명훈은 임요환의 재능과 존재감이 한 번 더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소평가된 카리스마’. 주목받는 SF 작가는 그를 이렇게 설명했다.
1월 31일, 여의도의 더샵아일랜드 파크. 소설가 배명훈이 프로게이머 임요환 앞에 앉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온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난 경기들을 복기하던 대화는 슬금슬금 SF적으로 발전해갔다.
“이 세계에서 당신은 너무 과소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냥 게임 좀 잘 하는 사람이라니요.”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 임요환이라고 불리는 청년, 요한 폰 슈베텐은 지구궤도연합군사령부의 인재 충원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899년에서 2147년으로 송환되던 중 기계 오작동으로 20세기 후반 어딘가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제 임무는 당신을 찾아 1899년 독일로 돌려보내는 일입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잘나가던 조직인 독일군 총참모부 작전계획국에 있는 당신의 자리로.”그는 내 설명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믿지 않는 눈치였다.“ 는 저도 좋아해요. 인간이 이기기 힘든 상대에 맞서 위기를 헤쳐나가는 이야기.”“SF가 아니고, 당신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 지식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게임들의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신이 독일군 총참모부에서 하던 그 워게임이 나오거든요. 그때는 컴퓨터가 없어서 테이블 위에 큰 지도를 펴놓고 손으로 일일이 부대를 움직였죠. 지도 위에 놓인 부대를 가지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가상의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네, 거의 지금의 프로게이머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고,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연례행사가 아니라 아예 그게 핵심 임무였습니다.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실전 감각을 유지하는 거죠. 실전 감각. 피아니스트가 하루만 연습을 거르면 손이 굳는 것처럼 게이머들도 조금만 연습을 거르면 실력이 떨어지지 않습니까?”“저는 그렇죠. 안 그런 사람도 있기는 한데, 잠깐 쉬면 아무래도 감각이 떨어지죠.”“대충 즐기면서 해도 되는 수준의 실전 감각이 아니니까 그렇겠죠. 당신 손에 익은 그 군사학적 지식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얻은 겁니다.”“아니, 저는 실제 전쟁에는 별로 관심 없는데요.”“아, 혹시 나치 때문이라면,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전 이야기니까요. 바로 그 참모부에서 루덴도르프 같은 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 나왔고, 히틀러 바로 직전에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힌덴부르크 장군도 바로 그렇게 영웅이 되셨죠. 그러니까 당신도 그 세계로 돌아가면 바로 그 자리가 당신 자리…….”
나는 내내 옆을 지키고 있던 김가연이라는 여자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 여자의 매서운 눈초리 때문에 나는 내가 그를 데리고 가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유력한 귀족인 오토 폰 슈베린 백작의 셋째 딸 율리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세계의 정혼자 율리아 폰 슈베린의 슬픈 사랑 이야기. 그가 대답했다.“그런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게임 안에서야 승리를 위해서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정을 할 수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라면 그런 결정은 못 내릴 것 같은데요.”“하지만 그 게임 안에서 당신이 만들어놓은 그 수많은 전략 전술들을 보시죠. 유닛 하나하나의 잠재력을 게임 개발자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이나 또 그 수많은 전략들을. 그게 특허로 보호가 됐다면 지금도 당연히 현역 최고의 위치에 있었겠죠?”“그런 거야 당연히 보호가 안 되죠. 어느 축구선수가 어떤 기술을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그걸 다른 사람이 못하게 하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보호가 됐으면 저야 좋았겠지만, 그게 공개되지 않았으면 프로게임계 자체가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그러니까요. 우리는 당신의 바로 그 능력이 필요한 겁니다. 같이 성장하게 만드는 능력요. 당신처럼 이야기를 몰고 다니는 사람도 드무니까요. 어느 분야든 스토리가 축적된 스타의 가치라는 건 그냥 실력만 갖춘 사람의 가치 이상인 건 아시죠?”“그거야 제 능력이 아니고 팬들 덕분이죠. 라이벌 구도나 게임 이면의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건 팬들이 캐릭터를 부여하고 정리해주는 거니까요.”
“단순히 인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인생사뿐만 아니라 경기 하나하나에도 유난히 재미있는 스토리가 많은데, 전략의 결이 그만큼 선명하다는 뜻 아닐까요.”“예전에 비해 경기를 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보다 압축된 경기를 해야겠다는생각을 하긴 했어요. 한 번씩 나올 때마다 팬들이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 하니까요. 제가 준비하고 경기한 것들을 팬들이 어디까지 알아봐주고 공감해주시는지 그런 걸 보는 게 즐거워요. 악평이든 혹평이든. 다른 비결은 없어요.” “그래서 우리 참모부가 저를 보내서 당신을 데려오라는 겁니다. 대중과 공감하는 능력 때문에. 그리고 그 카리스마 때문에요.”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이상학, GETTY IMAGE/MULTIB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