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디테일 증후군에 집단 감염이라도 된 걸까. 이번 시즌 디테일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집착은 가히 ‘광적’ 이라 할 만하다.
신경이 면도날처럼 곤두서고 심장박동수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화보 촬영을 위해 매장에서 모셔온 의상이나 소품을 다룰 때마다 도지는 증상이다. 특히 사진가의 지휘에 따라 기기묘묘한 포즈를 취하고 때론 펄쩍펄쩍 뛰는 모델을 볼 때 그 증상은 더욱 악화된다. 원인은 간단하다. 혹시 존귀하신 ‘매장 제품님’을 호위하고 있는 장식이 궤도를 이탈하거나 흠집이 나진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 왜 근자에 출시된 아름다운 제품들은 어김없이 화려한 디테일로 내 소심한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걸까.
사실 하나의 옷이나 액세서리를 만드는 데 기계의 힘에 기대는 부분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하이테크놀로지의 수혜를 받고 있는 요즘이지만 패션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 장식의 세계에는 기계로는 구현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다 아름답고, 창조적인 작품을 내놓으려는 패션 크리에이터들의 산고는 매 순간 계속되지만 특히 그들의 땀과 노력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정교한 장식을 다룰 때다. 그리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하는 감탄을 절로 일으키는 디테일을 보면 하이엔드 패션이 부르짖는 장인 정신이라는 말이 허울 뿐이 아님을 절로 깨닫게 된다. 일례로 최근 장식주의의 부흥기를 한껏 누리고 있는 샤넬은 단추, 깃털장식, 자수 등의 작업을 전문적으로 맡는 7개의 공방을 거느리며 손맛에 심혈을 기울인다. 각 공방에 포진한장인들은 칼 라거펠트 이하 샤넬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현실로 승화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샤넬이 정기적으로 선보이는 공방컬렉션은이들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무대. 샤넬과 더불어 펜디 역시 30~40년의 경력의 장인들 손을 통해 매 시즌 기기묘묘한 장식을 가미한 의상으로 이슈를 낳는 브랜드로 꼽힌다. 이번 F/W 시즌 그들의 솜씨가 절정에 달한 룩으로 꼽히는 시스루드레스는 마치 거미줄처럼 정교하고 신기한 자수 디테일이 눈에 띈다. 밀라노의 떠오르는 별, 아퀼라노리몬디 듀오는 매 시즌 찬란한 디테일의 의상을 발표하며, 밀라노의 장식주의를 이끌고 있다. 바다 건너 뉴욕에선 랄프 로렌이 핸드 스티칭, 비딩, 모노그램 자개 버튼 등 정교한 디테일이 한데 어우러진 의상을 통해 아메리칸 클래식 패션의 종가다운 솜씨를 발휘했다. 특히 78개의 각기 다른 뜨개실을 사용한 패치워크 코트는 한 벌을 제작하는 데 무려 160시간이 소요됐다니 그 집념과 노력에 경탄하게 된다. 또한 디테일계의 마에스트라로 꼽히는 로다테는 이번 시즌에도 거칠게 커팅하고 마블링처리한 가죽, 시폰, 오간자 등을 겹치고, 꿰매고, 붙인 후 비즈와 스팽글등의 장식을 더해 원시적인 미를 표현했다.
혹자는 디테일을 가르켜 ‘가격상승을 부추기는 주범, 쓸데없는 사족’이라는 말로 가치를 폄하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패션의 구성요소인 실루엣과 테일러링이 ‘베이식’이라는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반면 디테일은 그 반대의 양상을 띠고 있다. 파격적인 디자인과 스타일링이 점차 고갈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디테일이야말로 디자이너의 창조성과 불굴의장인 정신을 자극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으니까.
Maurizio Pecoraro 정교한 장식에 일가견이 있는 마우리지오 페코라로의 손맛이 절정에 다다른 작품. 손으로 하나하나 일정한 간격으로 수백 개의 가는 주름을 잡아 핀턱 장식의 시스루 블라우스를 완성했다.
Ralph Lauren 마치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태피스트리를 형상화한 듯한 패치워크 장식 재킷. 울, 새끼 양털, 벨벳, 실크 튈, 코튼 거즈 등의 소재를 패치워크하고 금빛 실로 자수와 크리스털, 비즈 등으로 꽃무늬 패턴을 연출했다.
Burberry Prorsum 세미 쿠튀르를 표방한 버버리 프로섬의 플리츠 장식 상의. 매우 정교하고 촘촘하게 주름을 잡아 빛에 반사되는 벨벳 특유의 질감을 극대화했다.
Fendi 가는 실리콘 실이 실타래 처럼 엉켜 있는 소재에 불규칙하게 아플리케 디테일과 크레폰 아구글리아투라(Creponne Agugliatura: 부러진 바늘 끝을 이용한 자수의 일종) 자수 장식을 가미했다.
Rodarte 마블링 패턴의 가죽, 반짝이는 라메, 울, 크레이프 등의 다채로운 소재를 패치워크하고 비즈와 스팽글 등의 반짝이는 장식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Dior 이번 시즌 오리엔탈리즘에 매료된 디올은 고전적인 레이디라이크 룩을 테마로 한 2010 크루즈 컬렉션에서도 정교한 비딩과 자수 장식을 통해 동양적인 무드를 고취시켰다.
Moncler Gamma Rouge 지암바티스타 발리가 디자인한 몽클레어의 패딩 재킷, 지퍼 부분에 크리스털을 세팅한참 장식을 달아, 스포티브한 패딩 재킷에 쿠튀르적인 무드를 더했다.
Dries van Noten 마치 퍼 재킷처럼 보이지만 이는 섬세한 크레이프 소재를 잘게 잘르고 겹쳐서 마치 새의 깃털처럼 가볍고 풍성한 이미지를 연출한 것.
Aquilano & Rimondi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방불케 하는 아퀼라노&리몬디의 드레스. 스커트에서 시작된 깃털과 자개 장식은 어깨 부분에서 절정에 이른다. 완벽한 테일러링과 호사스러운 디테일의 만남!
Chanel 샤넬의 트위드 재킷은 매 시즌 새로운 장식을 대동한 채 등장한다. 이번엔 가장자리마다 진주와 새틴 소재를 땋은 리본 장식을 달아 화려함을 배가했다.
Prada 이번 시즌 프라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디테일은 바로 프린지. 양가죽을 자르고 그 위에 크리스털과 스터드 장식을 더해 마치 여전사처럼 강인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 에디터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선민
- 포토그래퍼
- 김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