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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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회화 속, 영원히 타오를 여름. 짐짓 어떤 계절은 맛이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법이라고 중얼거리며, 열한 명이 추천한 여름 그림을 펼쳐 든다.

ZINO AND ENEA (BLUE), 2020. ACRYLIC AND INK ON PAPER, 139.7 × 106.7cm | 55 × 42 IN. PHOTO: ©MARTEN ELD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Zini and Enea (blue)

클레어 타부레

“클레어 타부레는 지금 미술계가 가장 주목하는 ‘따끈따끈’한 프랑스 여성 회화 작가다. 유즈 미술관, 팔라초 그라시, 라 메종 겔랑, 아네스 베 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올해 프랑스 중심부에 들어설 예정인 현대 예술 공간 ‘피노 컬렉션’의 개관전에도 이름을 올리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유년기의 노스탤지어에서 출발한 군상 작업부터 자화상 연작인 ‘메이크업’을 선보이며  미의 가치와 저항에 대한 태도를 여실히 펼친다. 특히 2015년 파리를 떠나 LA에 거주하며 ‘가족’을 작품의 소재로 가져와 따뜻하고 다채로운 색채의 세계를 실험해갔는데, 그중 지난 5월 서울 ‘페로탕 갤러리’에서 선보인 신작 ‘형제자매들’은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시원한 그늘과도 같은 가벼운 붓 놀림으로 끈끈한 가족애와 우정을 잔잔하게 그려냈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요즘의 일상에서, 가까운 이들의 소중함과 한여름의 한가로운 장면을 불러일으키는 선물과도 작업이지 않을까?” – 추성아(독립 큐레이터)

여름, 2015. 종이에 구아슈, 29.3 × 28.2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여름

문성식

“문성식의 여름에는 다양한 풍경이 섞여 있다. 보편적인 사물, 풍경,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지극히 주관적인 마음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문성식은 꼼꼼하게 일기를 쓰듯 자신이 경험한 풍경을 치밀하고 반복적인 세필로 표현한다. 정원을 가꾸는 친형의 모습을 그린 ‘여름’은 원근법이 철저하게 배제된 주관적인 풍경화다. 보는 것만으로 더위가 가실 만큼 싱그러운 풍경을 그린 구아슈 작업 ‘여름’ 이전에, 작가는 다수의 흑백 작품 ‘여름풍경’을 그렸었다. 연필, 펜, 잉크로 흑백 작업을 고집한 작가가 이렇게 청량한 색감의 작업을 시도한 걸 보면, 작가의 마음속에 새로운 여름 풍경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여름의 풍경에 흠뻑 빠져 시원하게 물을 주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성큼 다가온 여름의 열기가 조금은 식는 듯하다.” – 권주리(국제갤러리 데퓨티 디렉터)

AN ANGRY MOUNTAIN, 2020. OIL ON CANVAS, 130 × 130cm.

An Angry Mountain

최수인

“생생한 색감으로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최수인 작가의 ‘Angry Mountain’은 경쾌한 붓질과 색상으로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풍경화를 기반으로 하는 최수인 작가의 그림은 그림 속에서 계절의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나고, 무엇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작가 자신의 마음이 풍경을 통해 나타난다. 본인의 감정과 태도, 생각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모습은 자화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독특하게도 최수인 작가는 풍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담아낸다. 어찌 보면 풍경은 시간을 그려내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711일까지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 <Fake Mood>가 열린다. 여름의 한복판, 나는 아마 그곳에 있지 않을까.” – 우정수(화가)

풀, 2019. OIL ON CANVAS, 27 × 22cm.

김지용

“공원에서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 마당을 놀이터 삼은 개들의 순한 표정, 야생 조류의 도감이 잔뜩 꽂힌 도서관, 참외 향취.여름을 그리면 빛바랜 조각들이 머릿속에 부유한다. 나에게 여름은 철저히 ‘오래된 과거’에 과녁이 맞춰진 시간들이다. 여름에서 촉발된 모든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로서, 김지용의 ‘풀’보다 여름이란 계절을 정확하게 사랑한 작품은 없다고 짐작한다. 어느 날 옷장에서 무더기로 발견한 필름 사진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얻었다고 말하는 작가는, 이후 자신과 부모의 지나간 시절을 현재로 소환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네 살 무렵 사촌 집 베란다에서 엉성한 풀장을 만들고 몸이 퉁퉁 붇도록 수영했던 기억을 그린 ‘풀’도 그중 하나다. 무릎을 끌어안은 사촌 형의 얼굴을 간질이며 뿌듯해하고, 창 너머 뭉개진 풍경의 덩어리를 더듬거리며 작가는 그렇게 여름의 한 장면을 ‘지금’으로 초대했을 것이다.”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NIGHTLURKER II, 2018. OIL ON CANVAS, 15″ × 19″, COURTESY OF ANTHONY CUDAHY AND 1969 GALLERY.

nightlurker ii

안토니 쿠다이

“모든 게 밝아지는 여름이, 나에겐 다소 불편하다. 온종일 푸르른 것을 바라보고 강렬한 빛을 받는 일은 피로하고, 높은 온도와 습도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여름만 되면 무기력해지는 이런 모습은 어쩐지 안토니 쿠다이의 그림과 슬며시 겹쳐진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은 대개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중 ‘nightlurker ii’는 쨍한 청록색과 노란색으로 물들여져 있음에도 도무지 밝음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배경과 인물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채워진 색이 의도치 않게 밝음과 푸르름 속에서 물들어져버린 내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어딘가 모순적인 이 그림은 나의 여름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 – 김윤희(프리랜스 에디터)

SKY, 2012. JACQUARD TAPESTRY. ©KIKI SMITH. COURTESY TIMOTHY TAYLOR, LONDON/NEW YORK AND MAGNOLIA EDITIONS, PACE GALLERY.

Sky

키키 스미스

“벌거벗은 여인이 우아한 몸짓으로 우리를 별빛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곳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산 위를 맴도는 나비와 새, 그리고 별빛이 흐드러진 여름밤 하늘이 꿈 같은 정경처럼 펼쳐져 있다. 키키 스미스의 ‘Sky’는 광활한 우주와 자연, 그리고 그것들과 영적인 교감을 나누는 듯한 여성을 그려낸다. 페미니스트 작가인 키키 스미스는 3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성의 삶과 체험, 트라우마, 주체성을 조각과 판화, 설치,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매체로 구현해왔다. 나아가 인간과 동물, 자연과의 관계를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다루며 작업을 확장해가고 있다. Sky’ 역시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적 사유를 바탕으로, 억압받고 수동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광활한 자연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생명체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사랑, 동식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에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여성적 가치’를 회복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마치 여름의 폭풍을 견뎌낸 모든 생명체의 존엄함을 스스로 빛을 내는 밤하늘의 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 장파(화가)

JUNGLE CAMOUFLAGE, 2019. ACRYLIC ON LINEN, 30 × 24 × 1.25INCHES, 76.2 × 61 × 3.2cm,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AND SEOUL.

Jungle Camouflage

헤르난 바스

“여름은 짙은 계절이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날씨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습도가 오른다. 우거진 녹음 때문인지 채도도 뚜렷해진다. 마치 앙리 루소의 그것과 같이, 이보다 더 짙을 수 없는 녹색으로 시각과 후각이 에워싸이면 여름이 된 것이다. 청각은 또 어떤가. 한낮의 열기와 강렬한 색채가 수그러든 밤에는 멀리서 풀벌레 소리와 새 소리가 합창으로 들려온다. 매년, 작년도 이만큼이나 더웠는지 궁금한 것처럼, 작년에도 그들이 이렇게 울고 바람이 이렇게 불었는지 궁금하다. 한편 여름은 나에게 휴식의 계절이기도 하다. 상반기 바빴던 갤러리에서의 일상을 뒤로하고 가을걷이를 준비하기 전, 잠시 도심을 벗어나 우거진 초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간이다. 가을을 넘기고 찬 바람이 다시 불어올 때 지난 계절을 돌이켜보면 여름 특유의 뜨거운 빛과 같은 기억 덩어리를 빚는다. ‘Jungle Camouflage’에서 헤르난 바스는 마치 그가 나의 여름을 함께 보낸 듯, 그 정서를 형상과 추상의 모호한 경계 위에 그려냈다. 진동하는 감각으로 어리둥절하다시피 한, 매년 찾아오지만 언제나 새로운 그 짙은 계절을 이보다 잘 포착한 작품이 있을까.” – 손엠마(리만머핀 서울 수석 디렉터)

AN ANGEL WHISPERS, 2019. ACRYLIC ON CANVAS, 40 × 31.8cm EACH.

An Angel Whispers

정희민

“최근 국내에서 뜨겁게 호명되고 있는 1980년대생 회화 작가 정희민의 작품이다. ‘천사가 속삭인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총 8점의 회화 연작은 불현듯 무더위를 잊게 만드는 청량한 셔벗과도 같은 질감으로 덮여 있다. 차갑게 얼어붙은 듯한 풍경은 화면을 희미하게 뒤덮고, 표면 위로 ‘Sincerely Heemin’이라는 작가의 필기체 서명을 도상화한 문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휴양지에서 보낸 엽서와도 같은 작업을 바라보며, 적막한 사무실에서 잠시나마 여름휴가를 꿈꾸어본다.” – 최수연(P21 대표)

SUMMER HILL, 2019. OIL ON CANVAS, 190 × 170cm.

Summer Hill

김미영

“’선글라스를 끼고, 창문을 열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숲길을 달려 바다로 나갈 때 코끝에 느껴지는 비릿한 향은 매번 일정한 양의 행복을 선사한다.’ 지난해 여름의 끝, 한 산문집에서 이 문장을 읽고 눈을 감았다. 십대 시절의 여름날이 기억에서 살아나 선명하게 그려졌다. 미국 남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지루한 시간을 버티게 한 건 바닷가 친구의 집에 따라가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뜨면 수영복 입고, 그 위에 티셔츠와 짧은 청바지를 걸친 채 해변으로 향했다. 나무가 가득한 길을 지나 마른 갈대가 잔뜩 일어선 모래 위를 걸으면 바다가 보였다. 김미영의 회화를 보면 그때의 장면과 감각이 모두 되살아난다. 해변을 만나기 전 숲의 풍경, 바람, 그리고 핑크빛 기분까지. 인생에서 가장 싱그러웠던 날이 깨어나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누군가의 여름 또한 이렇게 싱그럽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만든다. 다른 이의 문장에서 나의 여름을 보았듯.” – 김한들(독립 큐레이터)

BIG BIRD, 2010. GLOSS PAINT ON ALUMINIUM PANEL, 6 PARTS, 198 × 193cm EACH, 594 × 386cm OVERALL.

Big Bird

게리 흄

“분홍빛 화면 위 에메랄드 색깔의 아주 큰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게리 흄의 ‘Big Bird’를 볼 때면 여름철 따스한 햇빛과 푸른 하늘, 싱그러운 나무가 떠오른다. 여름 내음이 폴폴 나는 ‘Big Bird’는 마치 상상 속 동물을 어느 여름날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충만한 기쁨과 놀라움을 동시에 안겨주니까. 유동적인 액체의 성질과 빛을 머금은 듯한 게리 흄 특유의 페인팅은 활기차고 신비로운 거대한 새의 존재감을 더욱 빛나게 한다. ‘Big Bird’를 나의 기억 속에서 다시 꺼낸 계기는 최근 태국 남동부의 휴양지 섬에서 희귀종으로 분류되는 분홍 돌고래가 출현했다는 기사였다. 뉴스 영상 속 등장한 돌고래는 우리가 그간 애니메이션이나 캐릭터로 접하던 ‘귀여운’ 핑크색 돌고래였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자유로이 헤엄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어쩐지 기시감 같은 것이 느껴진 하루였다. 핑크색 돌고래의 피부도, 색도, 자유로운 그 몸짓도. 마치 게리 흄의 페인팅에서 곧장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존재로 말이다.” – 김민정(바라캇 컨템포러리 큐레이터)

SOMMERVOGEL, 2016. CASEIN ON CANVAS, 40 × 30cm.

Sommervogel

로사 로이

“여름의 태양에는 휴가라는 후광이 비춘다. 식물의 외곽선과 녹음이 짙어질수록 곧 다가올 여행과 휴식에 대한 기대감은 커져가는데, 로사 로이의 ‘Sommervogel’에는 뜨겁고 열렬한 여름을 위안하는 풍경이 담겨 있다.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인 자연(나비)을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 프로이트가 정의한 ‘두려운 낯섦’을 환기시킨다. 오래되고 친숙한 것으로부터 발현되는 이 기이한 감정은 로사 로이의 작품 구성, 구조, 매체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작가는 일상생활과 경험에 근접한 환경을 화면으로 불러오고, 이때 인물과 인물 혹은 인물과 자연 사이에 기묘하고도 공생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신화적 아우라를 지닌 이야기들은 고대 프레스코화에서 주로 사용한 카제인(casein)이라는 고전적 물감으로 표현되면서 매력적인 분위기가 더해진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로사 로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늘 여성이다. 이 여성들은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로 확신에 찬 표정으로 무언가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추구 또한 자기충족적이다. 순수한 자신의 상태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난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작품 속 인물에 투영해본다. 신비한 비밀을 간직한 공간에서는 온갖 판단이 사라지고, 비로소 내게도 깊은 사색에 빠져들 수 있는 충만한 여유가 찾아온 것만 같다.” – 임미경(갤러리 바톤 홍보팀)

피처 에디터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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