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박정우 등 젊은 스포츠맨 화보 & 인터뷰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젊은 스포츠맨 6인을 만나다 (펜싱 오상욱, 야구 정우영, 수구 이성규, 농구 송교창, 씨름 박정우, 축구 정승원)

2020-03-30T12:21:01+00:002020.03.30|FEATURE, 피플|

We Will Rock You. 평균 나이 23세. 수 겹으로 구부러진 시간과 치열한 자기 투쟁 끝에, 각자의 종목 꼭대기에서 군림하고 있는 젊은 스포츠맨 6명을 그라운드 밖에서 만났다. 투지와 패기는 오로지 이들만이 내세울 수 있는 수사다.

펜싱 오상욱 성남시청

2019년 세계펜싱선수권대회 사브르 개인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랭킹 1위로 등극한 오상욱은 ‘몬스터’라 불린다. 192cm의 장신을 이용한 ‘마르세팡’은 오상욱의 전매특허. 다가오는 도쿄 올림픽의 출전 준비를 마친 오상욱은 아직도 우승에 목마르다.

유럽 선수들 사이에서 왜 ‘몬스터’라는 별명으로 불리나?  키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192cm니까. 보통 키가 크면 둔해서 속도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나는 키가 작은 선수만큼이나 민첩한 편이다. 아무래도 체격에서 나오는 힘을 무시하지 못하니까 유럽 선수들이 종종 ‘몬스터’라 부르는 것 같다.

작년 세계펜싱선수권대회 사브르 개인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랭킹 1위로 등극했다. 전 세계 1위라는 타이틀과 잘생긴 외모 덕분에 얻어진 ‘꽃미남 검객’이라는 별명 중에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는가? 반반이다(웃음). 세계 랭킹 1위라는 타이틀도 너무 값지다. 열심히 뛰어서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질 수 있는 이름이니까. 그런데 꽃미남 검객이라는 별명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들 얻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값진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4년에 최연소 사브르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같은 해 12월에 열린 대통령배 전국남녀펜싱선수권 16강전에서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던 구본길을 꺾은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나?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구본길 선수는 항상 우러러보는 존재였다. 그의 경기 영상 을 찾아보며 훈련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니까. 경기 당시는 ‘누가 구본길을 이길 것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가 전성기를 달리던 시기였다. 경기에서 져도 본전이라는 패기로 달려든 것 같다. 나로서는 잃을 게 없으니까, 몸을 던진 거다. 물론 그런 건 있다. 게임에 들어갔을 때 상대 선수를 보고 지레 겁먹거나 몇 포인트를 실점하는 순간 경기를 포기하는 선수도 있는데, 그때 당시 나는 쉽게 ‘쫄지’ 않고 경기에 끝까지 집중했다. 패기가 무기였다.

유독 구본길과 인연이 깊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그를 상대로 아쉽게 한 점 차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당시는 게임을 생각하기보다 이겨야겠다는 강박감이 컸다. 이겨야겠다는 마음으로 덤볐다는 것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한국 대표팀의 단체전이 있었는데 굉장히 긴장을 많이 했다. 경기 초반에 득점을 많이 따내 상대 팀을 따돌릴 정도가 되니까 그제야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포인트를 따낸 순간 ‘이겼다’는 실감이 들지도 않을 정도로 얼떨떨했던 것 같다. 경기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갔을 때 비로소 실감이 났지. 선수 생활에서 가장 희열을 느낀 순간이 바로 그때 같다.

한국 펜싱이 국제 대회에서 유독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이유가 뭘까? 나라마다 펜싱 경기 스타일이 다르다. 독일은 장신의 키를 이용하지만 어딘가 둔하고 덤벙덤벙 검을 찌르는 분위기가 있다. 러시아는 먼저 공격하기보다 수비에 주력하는 편이다. 반면 한국은 한국만의 펜싱 스타일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선수 개개인의 주특기가 곧 무기인 셈이다. 하나의 공통된 스타일이 없으니까 상대를 훨씬 쉽게 교란시킬 수 있는 것 같다.

펜싱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엄격하신 편이었다. 형이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펜싱 도장에 보냈을 정도였으니까(웃음). 나는 어릴 때 축구를 워낙 좋아해서 매일같이 축구를 하다가 같이 뛸 친구가 없는 날에는 형이 있는 펜싱장에 가서 해보곤 했다. 땡볕 아래 잔디밭을 구르는 축구와 다르게 펜싱은 너무 ‘개운한’ 운동이었다. 옷을 겹겹이 입고 하는 운동이라 축구를 할 때보다 훨씬 땀이 많이 나지만, 처음 경기를 마치고 옷을 벗었을 때 느낀 개운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언제부터 펜싱에 소질이 있다고 느꼈나? 중학교 1학년 때만 하더라도 키가 163cm였는데 3학년이 되며 180cm를 훌쩍 넘기게 됐다. 키가 크니까 평소에 잘 안 풀리던 동작이 먹히기 시작했다. 지금의 주특기가 된, 한 발 전진하고 찌르는 ‘마르세팡’도 그 무렵부터 연마한 기술이다. 키가 작았던 때부터 펜싱을 시작해서인지 작은 선수들과 붙어도 스피드에서 밀리지 않는 것도 큰 장점이 되었다.

현재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을 돕는 후원회 ‘운사모’의 회원이라고 들었다. 어린 시절 펜싱 장비가 비싸 선뜻 구입하지 못하고 형들에게 물려받아 사용했다. 당시 감독님이 운사모를 추천해줬고, 그때부터 장학금을 지원받아 장비 부담이 없는 상태에서 편하게 운동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이 도와주고 싶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어린 선수가 많을 텐데, 과거 내가 그랬듯 금전 문제가 어떤 장벽이 되지 않길 바라니까.

펜싱만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경기에서 지더라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것. 경기에 임하는 자세와 예의를 강조하는 스포츠가 펜싱이다. 이런 점을 들어 펜싱을 귀족 스포츠라 부르기도 하고. 큰 보폭으로 다가가 다리를 찢는 동작이 많기 때문에 역동적이라는 점도 펜싱만의 매력이다.

전지 훈련을 위해 이동하는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나? 음악을 듣는다. 느릿한 발라드를 좋아한다. 박효신의 ‘야생화’만큼은 자신 있게 열창할 수 있다(웃음).

경기 코트인 ‘피스트’는 어떤 존재인가? 외나무다리. 피스트에서 뒤로 물러나거나 떨어지면 반드시 지고 마니까.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물론 다가오는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손에 쥐고 싶다. 다만 그보다 항상 시합에 나가서 후회하며 돌아올 때가 있는데, 메달을 따지 못할 때가 아니라 연습한 걸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돌아설 때가 그렇다. 이번 올림픽에서 그동안 연습한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지더라도 만족할 것 같다.

 

야구 정우영 LG트윈스

2019년 야구계의 승자는 정우영으로 통했다. KBO 신인상, 일구상 신인상,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을 휩쓸며 ‘괴물 신인’의 자리를 거머쥔 정우영의 무기는 22세라는 어린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담대함이다.

2019년 정우영만큼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신인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시즌 초반에 공을 너무 잘 던졌다 (웃음). 그때의 활약으로 LG트윈스가 가을 야구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었을 정도다. 당연히 수상 욕심은 있었지만 시즌 중반에 부상을 당하고부터 기량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다른 후보보다 월등히 성적이 좋아 수상했다기보다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담담한 수상 소감이 화제를 모았다. 22세의 신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배짱이었는지, 사람들은 당신을 산전수전 두루 겪은 캐릭터로 인지하더라. 하하. 미디어에서 보이는 모습과 실제 성격은 정반대다. 학창 시절 반에 꼭 한 명씩 있는 ‘까불이’가 나였다. 프로팀에 입단하면서 성격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하다. 아무래도 팀에서 가장 어리다 보니까 선배들 앞에서 촐랑거리지 않고 최대한 싹싹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이전보다 정신력이 강해진 기분이 들기도 하고.

시즌을 치르며 정신력으로 버티지 못할 만큼 고된 순간도 있었나? 작년 시즌 후반 무렵 광주에서 기아타이거즈와 경기를 치른 때. 어깨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않기로 정해진 날이었는데 라이벌 투수가 마운드에 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코치님에게 경기에 오르겠다고 고집했다. 팔을 풀면서도 어깨 통증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막상 경기에 올랐는데 타자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은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웃음). 멘탈이 와장창 깨진 상태로 게임이 끝났지. 몸은 따라주지 않는데 생각만 앞섰던 거다. 그날 처음으로 코치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한동안 기사의 댓글을 보지 못할 정도로 후유증이 심했다.

작년 프로 데뷔전이 화제를 모았다. 하필 첫 상대가 베테랑 타자 김주찬이었는데 깨끗하게 삼진을 잡아냈다.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나? 홀가분했다. 다만 내가 던진 공이 위력적이었다기보다, 정체불명의 신인이 던지는 공이 타자들에게 굉장히 생소하게 다가갔을 거라 생각한다. 다들 타석에 들어섰다가 나갈 때의 표정을 보면 ‘쟤는 뭐냐?’라는 표정이었다(웃음). 타자들이 삼진을 먹으면 대개 투수를 한 번씩 쳐다본다.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을 때 한편으로 굉장히 짜릿하기도 하다.

투구 폼이 굉장히 역동적이다. 온몸을 사용해 던지는 공이 타자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갈 것 같다. 타자들이 흔히 말하길, 내 공은 어디선가 숨어 있다가 갑자기 훅 나타난다고 한다. 투구할 때 손목이 몸 뒤에서 꺾이며 공을 숨기는 동작인 ‘디셉션’을 자주 활용하는 편이다. 팔다리가 길어서 타자 입장에서는 내가 더욱 바짝 다가가 공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질 거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한국 대표팀의 야구 경기를 보면서 어렴풋이 꿈을 키워나간 것 같다. 이후에 텔레비전에서 숱하게 재방송이 흘렀는데, 어느 겨울 이불 뒤집어쓰고 귤을 까먹으면서 결승전을 다시 본 기억이 있다(웃음).

정우영이 가진 무기는 무엇인가? 담대함. 보통 어린 선수들은 기가 죽어 선배들에게 다가가 지조차 못한다. 그런데 나는 먼저 다가가 말도 걸고 장난을 붙이는 성격이다. 다만 선을 넘지 않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굳이 야구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궁금한 게 있다면 선배들에게 뭐든 물어본다. 하다못해 평소 옷은 어디서 사는지에 대해서도(웃음).

선배들은 옷을 주로 어디서 사던가? 연봉에 따라 다르던 데(웃음)? 사실 옷에도 관심이 많다. 고등학생 때 모델을 꿈꾸기도 했다. 실제로 고등학교 2학년 때 길거리에서 캐스팅을 당해본 적도 있다.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모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오랜 친구와 만났을 때 주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나?  좀 뻔하지만, 스크린 야구(웃음). 어린 시절부터 품은 타자의 꿈을 버리지 못해 친구들을 만나면 밥 내기를 빙자한 스크린 야구 대결을 펼친다. 제법 잘 치는 편이다. 공이 빗 맞더라도 홈런으로 카운팅되는 각도를 안다.

투수 포지션이 가진 매력은 무엇인가? 타자는 여덟 명이지만 투수는 오로지 한 명이다. 혼자 다수를 상대한다는 사실이 버거울 때가 많지만, 팀의 승리에 기여했을 때는 말로 설명하지 못할 쾌감을 느낀다. 투수 한 명에게 쏟아지는 관중의 관심도 나름대로 즐기는 편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투수로 남고 싶나? 항상 강인한 인상을 주는 투수.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 자신이 있다.

 

수구 이성규 한국체육대학교

겉으론 우아하지만 물밑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수구는 종종 ‘백조’에 비유되곤 한다. 때로 투기 종목으로 불리기도 하는 만큼 몸싸움이 격렬한 수구 경기에서 해사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든 주역은 한국체육대학교 소속 선수 이성규다.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때는 수구가 아닌 경영 선수였다지? 초등학생 때 처음 경영을 시작했다. 그때는 축구가 훨씬 좋아서, 훈련을 빼먹고 도망치다가 코치님께 신나게 두들겨 맞은 기억밖에 없다(웃음).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수구로 종목을 변경했다. 경영은 하나의 레일을 쳇바퀴 돌듯 오가는 훈련이 계속되지만, 수구는 단체 종목이다 보니 훨씬 재미있게 다가왔다. 다만 수구로 종목을 바꾸면서 영법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했던 건 좀 힘들었지. 물과 수평인 상태로 전진하는 경영과 달리, 수구에서는 물 위에 수직으로 서 있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년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뉴질랜드를 상대로 한국 팀이 첫 승리를 거뒀다.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나? 한국 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보니 출전권을 따낼 수 있었다. 대회에서 1승을 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앞선 경기에서 연패하고 마지막으로 만난 뉴질랜드를 상대로 극적으로 1승을 거뒀다. 작지만 굉장히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끝내 마지막 경기에서 이겨서 굉장히 뜻깊었다.

그날은 선수들과 광란의 밤을 보냈겠다? 아쉽게도 숙소에 술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며서 로 모바일 게임에 열중했다(웃음).

수구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인가? 8분씩 4피리어드로 진행되는 경기 시간 내내 빠르게 공수 전환이 이뤄진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수구다. 그리고 물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몸싸움이 치열한, 그 어떤 경기보다 터프한 운동이다.

학창 시절부터 오랫동안 합숙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나만의 자취방이 생긴다면 어떻게 꾸밀 계획인가? 집에 근사한 바를 차리고 싶다. 냉장고 가득 갖가지 술병을 좌르르 진열하면 좋겠다.

팔에 새긴 타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학교 동기와 함께 새겼다. ‘친구는 운명이다’라는 뜻이다.

 

농구 송교창 전주 KCC 이지스

농구만큼 매초 순간의 에너지를 불사르는 종목이 또 있을까? 경이로운 에너지가 응집된 농구 코트 위에는 몇 년에 한 번씩 눈에 띄게 탁월한 인물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팀에 입단해 포워드로서의 기량을 증명하고 있는 송교창도 그중 하나다. 그는 2021 국제농구연맹 아시안컵을 위한 국가대표 선수단의 젊은 피이고, 생애 첫 화보 촬영을 놀랍도록 능숙하게 해낸 남자이기도 하다.

NBA 출신으로 당신과 같이 KCC 소속이 었던 용병, 고 안드레 에밋 선수가 3년 전 이런 말을 했다. ‘송교창이 몇 년 후면 KBL을 평정할 거다.’ 어떻게 생각하나? 당시 같이 뛴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이가 그렇게 봐줬다니, 기분 좋은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그런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15년 드래프트(구단들이 프로 리그에 들어오려는 선수를 선발하는 것)에서 유일한 고등학생 선수로 주목받으며 KCC에 입단해 쭉 뛰고 있다. 대학교 대신 바로 프로팀을 바라본 이유는 뭔가? 정말 잘하는 선수들과 더 부딪쳐보고 싶어서 한 선택이다. 농구 선수는 대개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팀에 가는 수순이 일반적이라 내가 특이한 경우긴 하다. 운동선수가 한 팀에 오래 머무르며 활약하면 그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가 되기도 한다. KCC는 어린 나를 선발하고 잘 케어해주는 곳이라 정말 가족 같다.

중학교 시절부터 유망주였고, ‘연습 벌레’로 불렸다고.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이끌었나? 농구를 시작한 이래 스스로 노력한 부분도 많지만, 부모님 덕이 컸다. 아버지는 ‘남들처럼 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을 곧잘 하셨다. 공휴일에도 편하게 쉰 적이 없다. 대회 한 번 치르고 나면 보통 선수들은 며칠 정도 쉬는데, 바로 다음 날에도 연습하도록 아버지가 이끄셨다. 그래서 아버지께 종종 대들 때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때는 없나? 위기의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다 슬럼프 같은 게 와도 가족의 힘으로 잘 넘긴 듯 하다. 아버지가 지독하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부모님의 노력과 지원이 있었으니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농구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때가 기억나는지? 어렴풋 한데, 만화 <슬램덩크>가 유행하길래 봤더니 정말 멋지더라(웃음). 관심이 생겨서 취미로 농구 교실이라는 데 가본 게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다. 중학교 때 정식으로 농구를 해보고 싶어서 농구 엘리트 학교로 불리는 수원 삼일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식 훈련을 한 첫날, 바로 구토를 했지. 집에 들어가서도 얼얼해서 아무런 생각이 안 났다.

키가 2미터인데. 어릴 때부터 컸나? 그렇다. 늘 친구들보 다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있었다.

말하는 태도가 차분하고 단정하다. 친구들은 송교창의 성격이 어떻다고 하나? 애늙은이라는 소리 많이 들었다. 비교적 차분한 편이라고들 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또래 선수 중 ‘이건 내가 자신 있다’고 할 만한 게 있나? 키에 비해 빠른 스피드. 속공 플레이 상황에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다.

소속팀인 KCC의 강점을 소개하자면? 주장인 이정현 형을 비롯해 라건아, 이대성 등의 훌륭한 선수가 있다. 그리고 우승을 경험한 케이스도 있으니, 그 점은 플레이오프에 올라가면 더욱 강점으로 발휘될 것이다.

소속팀 연고지인 전주는 어떤 곳인가? 전주 사람들이 농구를 좋아해준다. 그게 고맙다. 또 한옥마을이 정말 잘 갖춰져 있다. 가끔 나가보면 한복 입고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분들 많이 본다. 워낙 맛집 많기로 유명한 도시지만, 전주에 온다면 콩나물국밥은 꼭 먹어봐야 한다. 나도 잘 가는 집이 있다.

 

씨름 박정우 의성군청

최정예 씨름 선수 16인이 출연하는 KBS2 <씨름의 희열>이 방영되며 씨름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좋은 걸 할배들만 보고 있었네’라고 말하던 젊은 여성들은 모래 바람이 흩날리는 시합장으로 향했다. 최근 활약하고 있는 씨름 선수 가운데 ‘모래판의 다비드’라 불리는 박정우가 간발의 차로 승패가 나뉘는 씨름의 매력에 대해 말한다.

요즘 체중 관리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들었다. 어떤 음식이 그토록 당신을 식탁 앞으로 이끄나?  KBS <씨름의 희열>에 출연하면서 10kg 가까이 찌웠다. 아무래도 고등학생 선수와 상대하려면 몸집을 키워야 하니까. 지금 몸무게에서 7~8kg을 감량해야 하는데, 문제는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거다(웃음). 면이라면 뭐든 좋다. 부산 동아대학교에 재학했기 때문에 밀면의 맛에 눈을 뜨게 됐다. 해운대에 있는 ‘가야밀면’은 나의 인생 맛집이다.

<씨름의 희열> 덕에 ‘씨름 르네상스’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씨름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선수로서 이러한 변화가 체감되는가?  물론이다. 이만기, 강호동이 씨름판에서 이름을 날린 시절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씨름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씨름이 인기 종목이었던 적이 없었다. 비인기 종목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렇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 감사하면서 낯설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도 500명에서 1만 명으로 훌쩍 뛰었을 정도니까.

시합장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이 좋은 걸 할배들만 보고 있었네’라고 말하던 젊은 여성들이 대거 씨름장으로 향했다. 올해 홍성에서 설 시합을 펼쳤는데, 서울에서 씨름을 보기 위해 새벽 버스를 타고 온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 확실히 관중석을 둘러보면 연령대가 많이 낮아진 것을 체감한다. 이전까지는 시합에 얼마나 높은 금액의 경품이 걸리느냐에 따라 관중수가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러 경품 추첨을 씨름 경기가 끝난 후에 하는 것도 씨름을 끝까지 관전하라는 의도다. 씁쓸하게 느껴졌던 풍경이 지금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작년 6월 ‘단오장사대회’에서 태백장사에 오른 순간을 기억하나? 물론이다. 결승전에서 <씨름의 희열>에 함께 출연한 손희찬 선수를 상대했다. 손희찬 선수는 밑씨름을 하는 선수 중에서 실력이 가장 좋다. 샅바 싸움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는 편이다. 사실 예선전에서 손희찬 선수에게 2:1 로 진 상태였기 때문에, 결승에서 마주할 때 오히려 부담감이 없었다. 자신 있게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우승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태백장사에 오르면 꽃 가마를 타고 경기장을 돈다. 꽃 가마에 올랐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모든 씨름 선수가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경기에 임한다. 실제 꽃 가마에 올랐을 땐 힘들게 운동했던 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태백장사에 오르기 전까지가 슬럼프였다. 번번이 첫판에서 지고 돌아오면서 심적으로 굉장히 힘든 날이 오래 지속되었다. 2019년이 굉장히 힘든 한 해로 기억에 남을 뻔했는데, 다행히 단오장사에 오르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씨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체육 선생님이 각 반을 돌아다니며 반에서 힘 좀 쓴다는 애들과 팔씨름 대결을 펼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일부러 져주신 건데 어쨌든 선생님을 이기고, 그렇게 뽑힌 7~8명이 교내 씨름 대회에 출전했다. 당시 1등을 차지하면서 체육 선생님이 씨름부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며 적극적으로 권하셨다. 씨름부에 들어오면 맛있는 간식도 먹을 수 있고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넘어갔다(웃음). 솔깃해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 종일 또래 친구들과 모래판에서 뒹굴며 놀았으니까.

씨름에서 80kg 이하의 경량 체급을 태백급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속한 체급이기도 한데, 태백급만이 가진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다른 체급보다 날렵하고 빠르다는 것. 그래서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태백장사에 오른 선수라도 반드시 모든 경기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고 할 만큼 경기에서 이변이 많은 체급이기도 하다. 다른 체급의 경우 선수가 30명에 불과하지만, 태백급 선수는 50명이 훌쩍 넘기 때문에 가장 치열한 경기를 관전 할 수 있다는 것도 태백급의 매력이다.

스포츠 중에서도 씨름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찰나의 순간에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항상 시합장에 들어설 때 지도자가 하는 말이 ‘끝까지 상대를 놔주지 마라’는 것이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방심하는 순간 상대가 기술을 걸어 뒤집어버리니까. 그렇기 때문에 상대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적 감각이 굉장히 중요하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항상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운동하는 선수.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됨됨이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곧 다가오는 단오대회에서 다시 태백장사에 등극하는 것. 작년 우승했지만, 올해는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니까.

 

축구 정승원 대구 FC

정승원은 ‘대구 아이돌’이라 불린다. 아이돌에 준하는 팬덤 덕에 대구시 홍보대사 활동도 했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자의 스타성은 친선 경기와 국제 대회를 위해 말레이시아, 태국을 거치는 동안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대한민국 축구 선수 정승원을 응원하는 플래카드가 두 나라를 넘어 베트남과 홍콩에서도 휘날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지만, 축구 경기를 한 번이라도 직관한 사람이라면 그라운드 위에서 쉼 없이 뛰는 선수의 활력이 얼마나 눈에 띄는지 알 것이다. 정승원은 그렇게 왕성하게 뛴다.

당신을 두고 ‘눈알까지 잘생겼다’고 말하는 이를 봤다. 외모로 많이 회자되는데, 그런 반응이 부담스럽지는 않나? 부담스럽다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이야기고 칭찬이라면 기분 좋은 일이다. 고맙다.

부모님은 당신의 얼굴에 대해 뭐라고 하시나?  어머니는 가끔 ‘네가 잘생긴 건가?’라고 의아한 듯 말씀하실 때가 있다. 하지만 부모님이 장난치듯 아옹다옹할 때면 서로 ‘내 자식이야’ ‘날 닮은 거야’ 하신다(웃음).

향수를 좋아한다고. 어떤 향수를 뿌리는가? 요즘 꽂혀서 사용하는 건 크리드(Creed)의 어벤투스, 실버 마운틴 두 가지. 그런데 너무 비싸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면 얼굴이 화장한 것처럼 뽀얗다. 따로 앱을 사용하는 건 아니고, 사진 올릴 때 기본으로 주어진 보정 효과를 사용할 때는 있다. 선크림을 듬뿍 바르는 편이라 얼굴이 유독 하얗게 보일 수도 있겠다. 원래 하얀 편인데 최근 대표팀 훈련 후 살이 많이 탔다.

올해 1월 태국에서 열린 2020 AFC U23 챔피언십(23세 이하 대표팀이 출전하는 아시아 축구 연맹 주관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6경기를 모두 이기며 우승했다. 조별 리그부터 16강, 8강… 점점 올라가는 동안 우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나? 처음 C조 경기에서 상대한 우즈베키스탄이 지난 대회 우승국이다. 김학범 감독님이 이 팀에 대해 완벽하게 분석한 것은 물론 워낙 전술을 잘 짜놓으셨다. ‘내가 짠 전술대로만 너희들이 해낸다면 질 수가 없다’는 식의 말씀을 하셨다. 예감했다기보다 소름 끼쳤던 게 있는데… 정말 감독님 말씀 그대로였다는 거다! 각 선수의 특성과 대응법 같은 걸 알려주시면 그 내용이 고스란히 맞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김학범 감독이 당신에게는 ‘그저 미친 듯이 뛰어라, 하고 싶은 대로 즐겁게 뛰기만 해라’ 같은 이야길 했다고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내가 윙이나 미드필더를 하면서 수비 가담도 많이 하는 편이고, 활동량이 많다. 내 역할은 멀티플레이어다. 그래서 개가 열심히 달리듯이 그렇게 뛰어도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다.

AFC U23 챔피언십은 2020 도쿄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도 겸하는 대회다. 대표팀 엔트리가 최종 23명이었다. 정승원 정도면 여기 당연히 선발될 거라고 여겼나? 당연하지는 않았고, ‘될까?’ 싶어서 친한 동료나 후배들에게 막 물어봤다. ‘나 될 것 같니?’라고 하면 대부분 ‘너는 되지’ 같은 답을 해주긴 했다. 2차 소집 훈련을 강릉에서 28명 정도가 했다. 보름의 훈련을 마치고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서 최종 합격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쁘던지.

축구는 언제부터 사랑하게 됐나? 어릴 적부터 여러 운동 종목 중에서도 콕 집어 축구가 하고 싶었다. 세 형 중 둘째 형과 셋째 형이 학창 시절 축구를 해서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봤고, 생활체육 심판 일을 하시는 아버지가 여러 지도자와 교류하며 지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나는 ‘무조건 축구’를 원했는데 선수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아버지는 내가 그냥 취미로 하길 바라기도 하셨다. 2002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 선수가 가슴으로 볼 트래핑을 한 뒤 골을 넣은 장면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지만, 아직도 기억한다.

징크스가 있나? 경기장에 들어갈 때 라인을 밟지 않으려고 점프해서 들어간다. 경기 도중 라인을 밟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지만. 그런데 축구 선수 김보경 형님의 경우 징크스로 여겨질 법한 일이 생기면 그걸 마냥 피하는 게 아니라, 더 부딪치고 시도해서 징크스를 깨려고 한다더라. 좋은 태도 같아서 나도 그런 쪽으로 노력하려고 한다.

그라운드에서 뛴 모든 시간을 통틀어, 잊지 못할 순간이나 장면이 있다면? 우선은 대구 FC2018FA컵에서 우승했을 때가 떠오른다. 모든 선수에게 우승 경험이란 귀할 텐데, 나에겐 축구를 시작한 이래 첫 우승이었다. 작년에 극적으로 치른 제주 FC와의 경기도 잊을 수 없다. K리그 후반기면 시작하는 스플릿 라운드를 위해 중요한 경기였다. K리그 1위부터 6위까지의 팀이 A스플릿에 속해 다시 한번 서로 경기를 치른다. 거기서 승점을 쌓은 상위 팀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나갈 자격도 얻는 식이다. 우리 팀은 제주와의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A스플릿에 진출하는 시점이었지만, 막판까지 2 0으로 지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첫 골을 터뜨렸지. 그 이후 또 골이 터져서 결국 원하던 A스플릿에 진출했다.

올해의 목표는? 우리 팀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것. 그전에 얼마 남지 않은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뽑힌다면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