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모아 크라우드

이채민

1만원, 2만원, 10만원을 모아서 후원을 하고 공부도, 투자도 한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프로젝트의 성사를 돕는 크라우드 펀딩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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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이를 위한 맞춤형 요리 백과’ ‘아트 딜러가 되어보는 페이크 옥션 보드 게임’ ‘뮤지션 이승열의 새 앨범 LP’ ‘스마트폰 앱으로 집 안의 모든 가전제품을 제어할 수 있는 리모컨 센서’. 다채로운 주제의 이 프로젝트들은 모두 지금 텀블벅 사이트에서 후원을 받고 있는 기획들이다. 문화, 예술 콘텐츠의 다양한 기획을 공개해 모집한 후원금을 창작자들에게 전달하고, 후원자들에게는 기획이 실현된 결과물을 전해주는 이 사이트는 지난 1년 사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후원금 100억원을 모았다. 콘텐츠 스타트업 퍼블리는 박람회 참관기, 보고서, 탐방기, 대담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에 대해 펀딩 금액을 내는 플랫폼이다. 독자들의 펀딩을 받기 위해 트레일러를 미리 공개하며, 마감일까지 목표 금액을 모두 모으면 열람할 수 있다. 후원자들에게는 강연이나 포럼 등 오프라인 이벤트 참여 기회도 주어진다. 퍼블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구매한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이를테면 이런 콘텐츠가 올라 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기업 재직자들이 도쿄에서 다양한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발견해 기록한 ‘퇴사준비생의 도쿄’. 개인이 쉽게 방문하기 힘든 칸 국제 광고제를 다녀와 생생하게 리포트한 보고서나, 미국 스탠퍼드 대학이 펴낸 인공지능 보고서의 번역판 등도 있다. 대체로 책보다는 소프트하게 여러 회차를 끊어 모니터 또는 모바일로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1회적인 기사보다는 심층적이며, 매스미디어의 타깃보다는 해당 분야의 지식을 갖고 있는 독자를 겨냥한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트렌디한 주제에 대해 콘텐츠를 작성한다는 면에서도 다른 매체와의 차별성이 있는 이 사이트 이용자의 60%는 콘텐츠를 재구매한다고 한다.

올해 초 개봉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관객 수는 약 3백60만 명으로 집계됐다. 작은 규모의 일본 영화로는 성적이 좋은 편이었는데, 이 영화의 흥행에 웃음지은 건 수입사만은 아니다. 크라우드 펀딩 투자 사이트인 와디즈에서 영화 홍보 금액 공모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여기 참여한 사람들은 이자 소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 수에 따라 달라지는 이율의 규모는 50만 명일 때 5%부터 출발해 점점 높아지는 식이었다. 만기 6개월 조건으로 360만 명에 해당하는 이율은 40%. 이를 통해 최소 참여 금액인 10만원을 투자한 사람은 4만원을, 최대 제한인 2백만원을 투자한 사람은 80만원을 벌었다. 영화 흥행에 대한 나름의 ‘촉’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문화적 감각을 시험해보며 돈도 버는 기회였던 셈이다. 현재 이 사이트에는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스파이 액션 영화인 <아토믹 블론드>의 투자 기획서가 올라와 있다. 만기 12개월, 연이율 4%의 고정금리 채권으로 현재 시중 은행의 1년짜리 예금 금리에 비하면 훨씬 높다. 국내 최종 관객 수가 80만 명 이상일 경우 추가 금리가 있으며, 투자자들에게는 영화 예매권도 귀여운 선물로 주어진다. 와디즈에서는 영화 외에 인터넷 서비스, 뷰티, 의료, 농수산 제품까지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에 소액 투자를 할 수 있다.

크라우드 펀딩에 밝은 면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목표 금액 모집 기간 막바지에 청약에 성공한 한 지인은, 배정을 받지 못했으니 환불해드리겠다는 소식을 결제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목표 금액 달성 이후에 아슬아슬하게 청약이 이루어졌다는 이유였다. 총 1억원을 모집하는 기획에 2억5천만원 의 청약이 들어왔다는데, 잉여 금액인 1억5천만원이 한 달 동안 묶여 있으면서 발생했을 이자가 어떻게 분배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텀블벅을 통해 창작자를 지원했던 이들도 결과물의 퀄리티가 기대 이하여서 실망한 경험을 토로한다. 초대장 개념의 초기 문턱을 없애고 창작자들이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올리게 하면서, 옥석을 가리는 부담은 유저의 몫이 된 것이다. 예정일보다 늦어지는 배송, 사이트의 이미지로 보던 것과 달리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품, 아마추어 수준의 글과 사진 등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역으로 지원받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목표한 후원 금액을 채우지 못해 기획이 불발되는 위험이 있을 것이다. 작고 순발력이 있게 투자 금액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은 곧 투자를 하는 쪽에서나 받는 쪽에서나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불안 요소이기도 하다.

단순히 물리적 베네핏의 계산만 따져봐서는 크라우드 펀딩 방식의 후원이 이렇게 인기를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로젝트 주제에 따라 기부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심리적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텀블벅 사상 최고 인원인 9003명의 후원을 이끌어 냈던 프로젝트는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를 비판하는 ‘작은 소녀상’ 기획이었다. 일상 속 페미니즘 입문서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발간 후원, 아동학대 피해자들을 돕는 뷰티 브랜드 ‘휘겔다올리’ 제품 판매 역시 모금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사회에 꼭 필요한 옳은 일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방식을 열어줬던 사례다. 텀블벅은 SNS 채널에서 인기를 끄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나 사진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출판물과 다양한 형식의 굿즈를 판매하며 스스로의 작업을 알리는 통로로도 기능하고 있다. 사회적이거나 공익적인 성격을 띤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처럼 독립 창작자를 먼저 알아보고 지원하는 일이 주는 보람과 성취감 또한 크다. 퍼블리의 경우에는 조금 폐쇄적인 방식으로 전문가들의 콘텐츠를 얻는다는 면에서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가문과 같이 일종의 문화적 시혜를 베푸는 뿌듯함도 제공한다. 구매가 아니라 후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기 때문에, 창작자와 어떤 관계를 형성한다는 감각도 준다.

밀레니얼 세대는 쇼핑으로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 이들에게 크라우드 펀딩은 자연스러운 방식의 소비다. 물건이 아니라, 기획에 미리 돈을 지불하는 인터넷 쇼핑이라는 점이 특수할 뿐.

에디터
황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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