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신데렐라라는 요란한 수식을 걷어내자 어떤 경계에도 갇히고 싶어 하지 않는 배우 수현의 얼굴이 드러났다.

구조적인 실루엣의 검정 스웨트셔츠와 가죽 소재 쇼트 팬츠는 Louis Vuitton, 길게 늘어지는 드라마틱한 실버 귀고리는 Dior, 금색 스터드 장식의 화려한 첼시 부츠는 Roger Vivier 제품.

구조적인 실루엣의 검정 스웨트셔츠와 가죽 소재 쇼트 팬츠는 Louis Vuitton, 길게 늘어지는 드라마틱한 실버 귀고리는 Dior, 금색 스터드 장식의 화려한 첼시 부츠는 Roger Vivier 제품.

“근육을 붙이고 몸을 키워야 했어요.” 크리스 에반스나 크리스 헴스워스가 할 법한 이야기지만 바나나로 늦은 식사를 하며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은 사람은 수현이다. 2016년 초에 두 번째 시즌이 공개될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마르코 폴로>에서 그는 몽골의 공주이자 전사인 크툴룬 역할을 맡고 있다. 더블유와의 인터뷰를 비롯한 국내 스케줄을 소화하고 나면 촬영이 진행 중인 말레이시아로 복귀할 예정이라고 했다. “첫 시즌과 비교하면 캐릭터의 갈등이 훨씬 복잡한데 배우로서는 오히려 더 편해졌어요. 운동으로 몸이 바뀌니까 그 인물을 이해하는 것도 수월해지더라고요. 전사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어요.” 두 시즌째 <마르코 폴로>를 거치는 동안 크툴룬 아니라 수현의 존재감도 크게 달라졌다. 이쯤에서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새삼 언급할 수밖에 없다. 한국 언론은 아직까지도 ‘마블의 신데렐라’라는 반짝거리는 수식을 그의 이름 앞에 덧붙이곤 한다. 하지만 이 배우가 기대하는 세상은 마블 유니버스보다도 넓다. “다양한 작업을 하고 싶거든요. 메인스트림과 인디를 자유롭게 오가는 연기자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새로운 영역을 맹렬히 탐험하기 위해, 수현은 감정의 근육도 부지런히 단련하는 중이다.

<마르코 폴로>의 크툴룬은 강한 전사 캐릭터다. 몸을 쓰는 연기에는 원래 자신이 있었나?
그렇지는 않다. 운동신경이 둔하지는 않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정도다. 그런데 액션도 하다 보니 늘더라. 무엇보다 스턴트 팀이 워낙 훌륭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전문가들로부터 제대로 가르침을 받았다.

액션을 소화할 몸을 만드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고 들었다.
캐스팅이 결정된 뒤 한동안 엄청나게 먹어야 했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몸무게도 찍어봤다. 굶는 것만큼이나 먹는 것도 어렵더라. 처음 2~3킬로그램을 찌우는 게 정말 힘들었다.

보통은 살 찌는 게 너무 쉬워서 고민들을 한다.
살이 아니라 근육을 붙여야 했으니까.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본격적인 해외 진출 이후의 출연작이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마르코 폴로>다. 영화와 TV에서 블록버스터급 프로젝트만을 섭렵한 셈이다.
그 시스템 안에서만 배울 수 있는게 있다. 다국적 멤버가 모인 팀에서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며 프로답게 적응하는 훈련을 한 느낌이다. 매니저에게만 의지하는 대신 배우가 감독과 작가를 비롯한 전 크루와 직접 소통하며 일하는 분위기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환경이 그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국내 스태프들의 열정과 희생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쉽지 않은 조건에서 의미있는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게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큰 스크린으로 처음 본 자신의 모습은 어땠나?
프리미어에 앞서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배우들만을 위해 작은 시사회를 열어줬다. 잘 못 보겠더라. 슬그머니 극장에서 빠져나와 혼자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시간이 지난 뒤, 많은 관객들의 떠들썩한 반응 속에서 관람한 뒤에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어벤져스> 출연 이후, 주변 시선의 온도가 달라진 걸 스스로도 느끼나?
차이를 못 느낀다면 거짓말일 거다. 워낙 큰 프로젝트다 보니, 거기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 스텝을 어떻게 이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커졌다.

조만간 넷플릭스도 한국에서 정식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더 많은 국내 팬들이 <마르코 폴로>를 접할 기회가 열린 셈이다.
아시아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루는 작품이니만큼 한국 시청자들도 흥미롭게 느낄 거라고 기대한다. 최근 흐름을 보면 할리우드가 아시아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이 시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느껴진다.

쿠툴룬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당대 몽골 사회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배우가 느끼는 대리 만족이 있을 것 같다.
이 쇼에는 근사한 여성 캐릭터가 여럿 등장한다. 막연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역할을 연기한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특히 2시즌의 경우, 1시즌보다도 여자들의 힘이 더 부각되는 느낌이다.

개봉 대기작 중에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니콜라스 홀트 주연의 SF 로맨스인 <이퀄스>도 있다. 크레디트를 봤더니 맡은 역할이 ‘집단의 목소리(Voice of The Collective)’였다. <어벤져스>의 자비스처럼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지만 목소리 연기가 중요한 캐릭터인 건 맞다. 작은 역할이긴 해도 언제 또 이런 걸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금지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보니, 일상적인 대사에서도 최대한 표현을 아껴야 했다. 생소하면서도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이퀄스>는 아트 하우스 취향의 독립영화에 가깝다. 대규모 블록버스터를 찍을 때와는 여러모로 다른 경험이 아니었을까? 
굉장히 원했던 바다. 연달아 대작에 참여한 만큼 인디 필름에서 다른 경험을 쌓고 싶었다.

2015년은 수현이 아닌 클라우디아 킴으로 활동했던 해다. 한국에서의 작품 계획은 아직 없나?
당연히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의 경우 시즌당 촬영에만 6개월을 투자한다. 다음 시즌 제작이 결정된다면 스케줄을 잘 계산해야 한다. 장담하긴 어렵지만 욕심 같아서는 빨리 한국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영화 애호가인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고 들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는다면?
가물가물한데 내가 멜 깁슨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아마 <브레이브 하트>였을 거다. 한참 같이 보다가 무섭거나 야한 장면이 나오면 아버지가 눈도 살짝 가려주시고 그랬다.

지금의 수현은 관객으로서 어떤 작품을 좋아할까?
일상을 섬세하게 표현한 이야기에 끌린다. 스칼렛 요한슨과 마리옹 코티야르의 팬인데, 상업 프로젝트와 인디 필름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며 의미 있는 경력을 쌓은 배우들이라서다. <그녀>나 <내일을 위한 시간> 같은 작품을 선택하는 자체가 근사하게 느껴진다.

가족은 수현의 진짜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다. 최근 몇년 사이의 변화에는 어떤 반응을 보이나?
대체로 담담하다. <어벤져스> 캐스팅 확정 소식은 식사 자리에서 처음 알렸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건가?” 부모님 반응은 이 정도였다.

<어벤져스>에 대해 잘 모르셨던 건 아닐까?
당신들도 얼떨떨하셨던 게 아닐까. 이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져서 걱정이 많이 되고 서운하기도 하실 텐데 내색은 잘 안 하신다.

곧 해가 바뀐다. 2016년을 위한 개인적인 계획은 없나?
과연 여가가 생길지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 1~2년간 몸은 바빠졌는데도 이상하게 더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큰 세상에서 많은 일을 겪은 덕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