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아해가 영화를 만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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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일기>의 박정범, <파수꾼>의 윤성현, <혜화, 동>의 민용근. 세 사람의 영화감독은 저마다의 장편영화 데뷔작을 내놓자마자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물결 위로 무섭게 달려가고 있다.

민용근이 입은 그레이 수트는 앤.헐리우드 by 에크루, 검은 티셔츠는 코데즈컴바인 베이직플러스, 물방울무늬 행커치프는 마크어웨어 by 에크루 제품. 윤성현이 입은 검은 가죽 재킷은 버버리 프로섬, 흰색 티셔츠는 코데즈컴바인 베이직플러스, 회색 체크 팬츠는 코데즈컴바인 포맨 제품. 박정범이 입은 화이트 재킷은 곽현주 컬렉션, 검은 티셔츠는 코데즈컴바인 베이직플러스, 검은 팬츠는 엠비오, 안경은 린다페로우 by 한독 제품.

민용근이 입은 그레이 수트는 앤.헐리우드 by 에크루, 검은 티셔츠는 코데즈컴바인 베이직플러스, 물방울무늬 행커치프는 마크어웨어 by 에크루 제품. 윤성현이 입은 검은 가죽 재킷은 버버리 프로섬, 흰색 티셔츠는 코데즈컴바인 베이직플러스, 회색 체크 팬츠는 코데즈컴바인 포맨 제품. 박정범이 입은 화이트 재킷은 곽현주 컬렉션, 검은 티셔츠는 코데즈컴바인 베이직플러스, 검은 팬츠는 엠비오, 안경은 린다페로우 by 한독 제품.

윤성현 감독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맞나, 싶었다. <파수꾼>은 지독하게 예민하고 뜨겁도록 순수한 청년 같은 영화다. 담담하게 시작해서 점점 고조되어 감정의 격렬한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이 영화는 관객에게, 마치 스무 살 언저리에만 할 수 있는 어떤 사랑과도 흡사한 경험을 준다. 끝나고 나서도 일상으로 금세 돌아올 수 없을, 실연 같은 여운이 남는다. 그런데 스튜디오에서 마주한 윤성현 감독은 준비한 옷이 마음에 안 드니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었다. 마치 일곱 살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은 언뜻언뜻 일흔 살 노인처럼 숙성된 이야기들이 튀어나왔다. “나이 들수록 성숙한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상처는 언젠가 아물지만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아요.” 삶에 서툰 시절 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상처를 주고받는다. 영화는 그 미숙함으로 인해 과거 어느 시절에 우리가 흘리고 온 죄의식을 소환한다. 실제로 윤성현은 올해 서른이 되었다. “20대 때는 영원히 살 것 같잖아요. 그래서 탐욕스러워지기도 하고 삶의 의욕이 커지기도 하고.” 삶의 유한함을 자각하면서 감독이 집중하게 된 건 역시 영화였다. 윤성현의 관심이 끌어안은 이야기는 거대한 담론이나 철학보다 사람 사이의 사소한 감정들이다. 그의 다음 영화가 어떤 단절감, 공허함, 외로움을 소환할지 아직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위로받을 준비가 돼있다.

영화감독이 되리라는 걸 언제 깨달았나? 어릴 때 영화 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녹화하신 데이비드 린의 비디오테이프,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밀회> 같은 고전영화를 보면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영화 외의 것은 별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리대로 간 것 같다.
방에 가장 오래 붙여뒀던 영화 포스터는? <인디펜던스데이>.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처음으로 구입한 것이고, 포스터를 좋아해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수능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는 취직을 준비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회가 돌아가게끔 하는 부속이 되는 시스템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다. 뭔가로부터 해방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를 투사한 포스터다(웃음).
오늘 모인 세 사람은 새로운 경향의 감독들로 곧잘 묶인다.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와 민용근 감독은 정서적인 면이 어느 정도 비슷하고, 박정범 감독은 영화의 무거운 듯한 느낌, 사람을 디프레스되게 하는 점이 닮은 것 같다.
가장 최근에 마음을 사로잡은 텍스트/스토리는 무엇인가? 일본 만화 <아이엠 어 히어로>. 평범한 만화가 지망생이 여자친구가 좀비가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는 이야기로 3권까지 나와 있다.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마음을 담아 쓴 한 줄의 대사를 꼽는다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데뷔작을 지금 수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그런다고 좋아질까? 불완전함에서 오는 완전함도 있는 거 같다.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훔쳐오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장면을 고백한다면? <자전거 도둑>의 마지막 장면. 비극이지만 사람들의 관계에서 희망을 찾는다면 이런 거 같다. 악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어쩔 수 없이 서로 할퀴고 상처를 주지만, 근본적으로는 타인에 대해 존중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데뷔작에 스스로 별점을 매긴다면 5개 만점에 몇 개 정도를 주겠나? 20개. 내 영화에 나라도 듣도 보도 못한 별점을 주고 싶다.
감독이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사랑하는 무비스타를 꼽는다면 누구일까? 이시영. 전무후무하다. ‘이 여자는 정말 원하는 걸 하는구나’ 싶다. 독특하고 재밌고 연기도 잘하는 이런 캐릭터는 처음 본다. 영화에 쓴다면 아주 그로테스크하지만 공감 가는 인물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가장 여러 번 반복해서 본 영화는? <사운드 오브 뮤직>. 보고 있으면 늘 행복하다.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서 생기를 되찾고 행복을 향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전쟁의 한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결말이 좋다. 어디론가 나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좋아했던 것 같다.
당신의 영화 스승은 누구인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심지어 <주라기 공원>까지도 너무너무. 구스 반 산트, 스탠리 큐브릭, 폴 토마스 앤더슨, 코엔 형제… 켄 로치에게서는 연기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하면서 만난 동료나 선배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김종관 감독도 좋아하는 선배고,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라는 단편의 서정적인 면을 좋아해 많은 영감을 받았다.
영화를 제외하고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축구. 챔피언스리그, EPL, 프리메라리그까지 다 본다.
나의 다음 영화는 ( )에 대한 이야기다. 방법은 달라지겠지만 결국 본질적으로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거 같다. 사람이 지닌 감정의 결에 관심이 많다. 슬픈데 웃기도 하고 좋아해서 화를 내기도 하는 그런 게 사람 사이의 관계의 핵심을 이룬다는 생각이다. 그런 부분을 정확히 캐치하는 것을 하고 싶다.
좋아하는 걸그룹 멤버와 그 이유는? (민용근 감독 질문) 소녀시대 윤아. ‘분장실의 강선생님’을 따라 하는 걸 보고 좋아하게 됐다. 보통 예쁘면 도도하고, 자기 이미지를 지키려고 하는데 자신을 버리는 모습이 놀라웠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뭐할까? (박정범 감독 질문)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동해 바다에 갈 거 같다.
에디터 | 황선우

박정범 감독

박정범 감독은 너무 많은 것이 미안한 사람이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한 탈북자의 절박한 일상을 묘사한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는 일종의 반성문에 가깝다. 주인공 전승철은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감독의 친구를 밑그림 삼아 완성한 캐릭터다. 가까웠던 사람의 아픔을 진작 헤아리지 못했고, 헤아리려 들지도 않았다는 미안함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감독이 직접 연기한 승철은 극중에서 수회에 걸쳐 모질게 구타를 당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스크린 위의 표정들은 모두 진짜다. 실제로 힘이 실린 주먹을 맞으며 자학하듯 찍은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스트 신은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한 순간에 다시 깊은 물 속으로 발을 헛디디는 듯한 경험이다. 감독은 영화가 끝난 뒤 울거나 힘들어하는 관객들을 보며 또 한번 미안해진다고 했다. “저를 학대한 게 결국 관객을 향한 폭력이 된 거예요. 슬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제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보는 이들을 한 가지 감정에만 매몰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다음 작품을 위한 그의 다짐이다. <무산일기>의 화법은 내내 담담하지만 사려깊다. 침통한 순간일수록 카메라는 몇 발자국 떨어진 채 승철의 뒷모습만 묵묵히 지킨다. “친구가 정말 슬플 때 전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요. 우는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상대를 이용하는 일이고,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감독은 <무산일기>를 통해 이런 삶의 모습들도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걸 그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박정범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건 영화의 미안함이. 인물에 대한 예의가 진짜라는 걸 객석에서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감독이 되리라는 걸 언제 깨달았나? 군복무 중 우연히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를 보게 됐다. 영화 속에 서 다케시가 연기하는 인물이 ‘진짜’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승전결에 의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한 인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극의 전개에 설득력이 있었다. 난 저런 인생을 살지 못하겠지만, 저런 인생을 사는 사람이 어딘가에 꼭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섬뜩했고 놀라웠으며 멋있었다. 이런 게 영화의 힘이구나, 한번 해보고 싶다, 이렇게 처음 인식했던 것 같다. 그리고 복학해서 찍은 <사경을 헤매다>란 단편이 부산아시아나단편영화제에서 수상했을 때 영화를 계속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런데 그 후 장편을 찍기까지 10년씩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웃음).
방에 가장 오래 붙여뒀던 영화 포스터는? 그런 건 없다. 다만 특히 우울하거나 계속 영화를 해야 하나 싶어질 때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는 영화들이 있을 뿐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이창동 감독님의 <오아시스>다. 볼 때마다 자극이 된다.
오늘 모인 세 사람은 새로운 경향의 감독들로 곧잘 묶인다.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아 비슷한 시기에 작품을 개봉하게 된 이유가 크지 않나 싶다. 이렇게 한 번에 여럿이 쏟아져 나온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앞서 개봉한 두 영화가 잘됐기 때문에 후발주자로서 나름의 부담이 있다. 스코어 때문이 아니라 이분들이 GV(Guest Visit)를 너무 많이 하셨다(웃음). 해외 일정을 소화하느라 본의 아니게 소홀했더니 그것도 스트레스가 된다. 그런데 내 영화는 GV를 안 하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가뜩이나 우울한 작품인데 관객들하고 이게 얼마나 아픈 이야기인지 한번 더 복기를 하게 되니까.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마음을 담아 쓴 한 줄의 대사를 꼽는다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들의 죄는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것밖에 없다. 달리 말해 가난이 죄다. “가난이 죄입니까?”라고 묻는 게 이 영화다. 가난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다른 누군가로 바꾸어놓는다.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묻던 친구가 결국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다.
데뷔작을 지금 수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여러 부분을 조금씩 다시 찍고 싶다. 가장 아쉬운 건 돈을 떼인 탈북자들에게 승철이가 집에서 두들겨 맞는 신이다. 재촬영한 분량을 썼는데 사실은 원래 찍었던 게 훨씬 좋다. 로케이션을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부득이하게 첫 테이크를 버려야 했다. 영화에 실제로 쓰인 장면은 밤에 형광등 불빛 아래서 찍었다. 원래는 오전에 환한 빛 속에서 맞았는데 그 느낌이 훨씬 사실적이고 섬뜩했기 때문에 아깝다. 맞기도 훨씬 많이 맞았었고.
데뷔작에 스스로 별점을 매긴다면 5개 만점에 몇 개 정도를 주겠나? 2와 1/2개에서 2와 3/4개? 스스로 생각할 때 50점 이상은 되어서 관객에게 보여줬을 테니까. 나머지는 보는 사람이 채워줬으면 좋겠다.
장편 데뷔작에 관한 여러 평을 접했을 거다. 그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인용한다면? 나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을 지적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승철을 너무 힘겹게 몰아가는 면이 있다. 다 만들고 난 뒤 깨달았고, 그게 이 작품의 맹점이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하지만 화법을 최대한 절제했으니 관객들은 의식하지 못할 줄 알았던 거다. 그런데 어느 한 분이 그걸 정확히 꼬집어줬다. 기자나 평론가가 아닌 블로거였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고마웠다. 타당한 이유로 혹평을 하는 사람들은 날 감동시킨다.
GV를 하며 받은 가장 인상적인 질문은 무엇이었나? 탈북자의 경우, <무산일기>를 좋아하시는 분과 싫어하시는 분으로 확연히 나뉜다. 비판적인 입장에 서신 분이 내게 물었다. 승철이가 실제로도 북한에서 사람을 죽였던 거냐고. 아니다, 다른 사람의 사연을 취재해서 덧붙인 것이고 아픔을 겪으며 죄를 짓고 사는 우리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분은 영화를 본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는 죄다 사람 죽이고 온 걸로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셨다.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음을 미리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감독이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사랑하는 무비스타를 꼽는다면 누구일까? 양조위. 연기 폭이 상당히 넓은데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모두 그냥 양조위 같다. 양조위가 원래부터 목수였고, 벙어리였고, 혹은 외교관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 정도로 캐릭터를 품어내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
당신의 영화 스승은 누구인가? 우선 이창동 감독님.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본 뒤, 결국 DVD로 다시 구매했다. 모든 영화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다. 다르덴 형제, 마이클 리, 켄 로치, 크리스티안 문주 등도 좋아해서 여러 차례 작품을 반복해서 봤다.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훔쳐오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장면을 고백한다면? <오아시스>에서 문소리가 늘 무서워했던 나뭇가지를 설경구가 잘라 없애는 장면. 그 시퀀스는 내 기억 속 모든 영화 중 최고다. 요소 하나하나가 마술적으로 어우러지는, 기적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제외하고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여행. 영화제 일정 없이 타지에서 혼자 되는 시간을 갖고 싶다.
나의 다음 영화는 ( )에 대한 이야기다. 한 마디로 인간은 고귀하다는 걸 말하는 영화다. 친한 후배 중 자살한 사람이 있다. 그 친구를 잡아주지 못한 미안함이 또 이 영화를 만들게 한다. 인간은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느낄 때 비로소 고귀해진다. 그 귀함을 깨닫는다면 절대 죽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을 전하고 싶은데 시나리오 쓰는 게 너무 어렵다. 거창하게 설명한 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간 것 같아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윤성현 감독이 요청하면 그의 영화에 배우로 참여해 줄 수 있나? 수락한다면 요구조건은? (윤성현 감독 질문)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인지가 우선 중요하다. 할 수 있고, 해서 그 영화에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할 것 같다. 연기를 괜찮게 하면 적당한 페이를 주겠지. 내 생각에 배우 욕심은 누구나 다 어느 정도씩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할 뿐이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난 영화 만드는 게 중요해서 연기를 한 거지, 연기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싸움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비법을 하나 전수해준다면? (민용근 감독 질문) 무엇보다 일단 많이 맞아봐야 한다. 그러면 싸움을 잘하는 것보다 잘 피할 수 있게 된다. 잘 피하면 남들은 그게 잘 싸우는 건 줄 안다.
에디터 | 정준화

민용근 감독

철거촌.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리고 간 물건들이 바닥을 나뒹군다. 그리고 스물세 살 여자애가 빈 케이지를 들고 그 길을 걸어가서는, 버려진 개를 찾아내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돌본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그리고 열여덟 살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이를 버려야 했던 혜화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토록 버려진 것들과 그것을 돌보는 마음에 관한 단상으로 가득한 <혜화, 동>은 “영화 속에서 혜화가 필름통에 모아두었던 손톱은, 사실 제가 스무 살 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손톱을 깎아서 버리면 내 신체의 일부가 버려지는 거잖아요. 그 자연스러운 일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거든요”라고 말하는 민용근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그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건네면서도, 많은 독립영화들이 그러하듯 관객을 어렵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대신 서두르지 말 것을 요구한다. 초반 몇 장면에 잔뜩 힘을 줘 인물을 설명하기보다는, 영화 구석구석 인물들에 관한 단서를 조각조각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잖아요. 그 사람과의 만남을 반복하면서,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 아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모두가 버리고, 버려지고,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는 존재라는 걸. 하나의 사람이 하나의 단어로 정의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이 젊은 감독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긴 시간을 두고 그의 행보를 따라가보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을 듯하다.

영화감독이 되리라는 걸 언제 깨달았나? 대학을 졸업하고 TV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프로덕션에 들어갔을 땐,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후 8년 만에 단편을 찍었지만, 곧 케이블 채널 영화 프로그램에서 일해야 했다. 결국 <혜화, 동>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잠시 회사를 그만뒀지만, 이걸로 영화를 만들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장편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능력이 될까 그런 마음이었다. 물론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시기는 있었지만, 이런 과정들 때문이었는지 될 것 같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마음을 담아 쓴 한 줄의 대사를 꼽는다면? 혜화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 나연이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나연이 얼굴을 씻기는 장면이 있다. 귀고리를 주면 나중에도 이모를 기억하겠다는 나연을 안으면서, 혜화가 자기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엄마도 우리 나연이 기억할게”라고 말한다. 그 장면을 쓸 때 사람 많은 별다방에 있었다. 대본을 쓰면서 속으로 연기를 해보는데, 그 대사를 속으로 읊으면서 울컥했다. ‘쪽팔려. 왜 이러지’ 하면서.
데뷔작을 지금 수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대학교 2학년 때 만든 <주말>이란 단편이 나의 첫 영화다. 그 영화가 1회 부산영화제에 출품됐을 때만 해도 좋은 경험이라 여겼다. 하지만 영화제가 끝난 후 한 영화 잡지가 내 작품이 출품된 한국단편경쟁에 대해 ‘실망스러웠다. 학예회도 아니고’라는 리뷰를 실었다. 작품을 콕 집어 말한 건 아니지만, 내 영화를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시 곽경택 감독의 작품도 출품된 그 부문에 학생의 영화는 단 두 편이었던 데다가, 내 영화는 16미리 카메라로 촬영해서 스크린에도 다 안 차고 대사도 잘 안 들리는 총제작비 50만원짜리 흑백영화였으니까. 사실 너무 서툴고, 거칠고,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끄러운 영화다. 하지만 지금의 영화를 보는 눈으로 어찌할 수 있을까. 어려서 서툰 것들은 용서가 된다. 귀엽기도 하고.
감독이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사랑하는 무비스타를 꼽는다면 누구일까? 아오이 유우.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지금처럼 가녀리지 않고 통통한 여자애였다. 그 통통한 여자애가 무척 슬퍼 보였다. 자라면서 너무 예뻐졌지만, 그렇게 예뻐진 사람들이 흔히 가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7년에 영화제 때문에 삿포로에 갔을 때, 아오이 유우 좋아한다고 그랬더니 어떤 일본 분이 그녀가 나오는 일본 텔레콤 광고 포스터를 떼다 준 적이 있다. 그걸 오랫동안 방에 붙여놓았다.(웃음)
GV를 하며 받은 가장 인상적인 질문은 무엇이었나? <혜화, 동>을 보는 관객들은 주로 젊은 층이지만, 가끔 지방에 가면 독립영화는 처음이라는 나이 드신 분들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까지 남아 계실 때가 있다. 그분들은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비춰 영화를 본다. 그래서인지 영화만으로 나라는 사람을 꿰뚫어 보시더라. ‘영화가 참 반듯하고 정돈이 잘된 느낌인데 감독님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보면 독이 될 수도 있다.’ 질문은 아니지만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평론가의 영화평보다 깊이 와 닿았다.
지금까지 가장 여러 번 반복해서 본 영화는?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을 열 번, 스무 번 봤다. 한 인간 안에 거칠고 강한 세계와, 부드럽고 섬세한 세계가 공존하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는 느낌이 좋았다. 누구나 그런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반듯하고 정돈된 취향을 지닌 나도, 가끔은 술 마시고 취해서는 서교호텔에 몰래 잠입해 직원 휴게실 같은 곳에서 자고 나오는 이상한 행동에 끌리니까.
영화를 제외하고 현재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자전거. 2007년이었나 카드 써서 모은 포인트로 철TB를 샀다. 비싼 MTB는 못 사는 사람들을 위한 10만원 미만의 생활용 자전거인데 하도 무거워서 철TB라고 불린다. 나의 첫 자전거였는데, 5년이 지나니까 아무래도 수명이 다한 것 같기에 올해 1월에 큰맘 먹고 20만원대의 가벼운 자전거를 샀다. 원래는 40만원이 넘는데 겨울에 곧 단종될 자전거라 싸게 산 거다. 그래서 안장도 교체하고, 속도계도 달고, 지난 어린이날 완벽하게 세팅하고 나서 딱 한 번 탔다. 여름밤에 자전거 타는 거 참 좋다. 집이 성산동이라 난지지구로 나가곤 하는데 벌레들이 입으로 들어오고는 하지만,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좋은 것 같다. 격투기도 좋아한다. 물론 보는 거. 직접 하면 아마 뼈도 못 추릴 거다.
사심을 가득 섞어서, 여배우 TOP3를 뽑는다면? (박정범 감독 질문) 3위는 아… 너무 어린데… 심은경. 그런데 나이가 너무 어려서. (웃음) 2위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나왔던 이케와키 치즈루. 합작영화였던 <오이시맨> 홍보차 한국에 왔을 땐, 불러주는 사람 없는데도 카메라 들고 갔었다. 영화와 달리 후덕했는데, 그 매력이 또 좋더라. 그리고 부동의 1위는, 아오이 유우. 그녀가 열세 살일 때부터.
다음 영화 예상 관객수는? <혜화, 동>보다는 많이. 혹시 조금 더 큰 규모의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흔히 독립영화의 1만 명이 상업 영화의 100만 명이라고 하니까 뭐 그 정도?
에디터ㅣ김슬기

에디터
황선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에디터 / 김슬기
포토그래퍼
유영규
스탭
스타일링 | 김지혜, 헤어 | 대중, 강도원 (포레스타 도산점), 메이크업 | 라경진 (포레스타 도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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