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악역 5인 완전체 화보 공개

장진영

임지연, 박성훈,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희대의 악인 5명이 모두 모였다!

‘폭력 속에 살았던 한 여자의 복수’라는 영광 혹은 폐허를 그린 드라마,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가 ‘끝’을 봤다. 한 작품 속에서 이토록 여러 얼굴이 동시에 새롭게 발견되는 건 오랜만의 즐거움이다. 드라마 속 지독한 친구들인 임지연, 박성훈,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임지연, 김히어라, 차주영이 입은 슈트는 돌체앤가바나 제품.

김건우

김건우가 입은 점프슈트는 에르메스 제품.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가 오디션 영상을 본 후 바로 ‘감독님, 이 친구요’ 했다는 배우. 김건우의 첫 드라마는 2017년 KBS 드라마 <쌈, 마이웨이>였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질리지 않을 그 로맨틱 코미디물에서 그는 박서준의 얄미운 천적인 격투기 선수 탁수로 등장했다. tvN <청춘기록>에서 박보검을 볼 때마다 시비 걸던 톱배우 역할은 원래 특별출연이었다. 그 드라마를 만든 이가 <더 글로리>의 안길호 감독이다. 당시 특별 출연 배우의 분량이 점점 늘어난 걸 생각하면, ‘발견’의 반가움을 느꼈을 연출자의 마음이 짐작된다. <더 글로리> 대본 리딩 때 늘 별 말이 없었다는 김은숙 작가는 김건우가 뭐라도 코멘트를 듣고 싶어 하자 이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지금처럼만 해.”

가해자 무리 사이에서 친구 재준(박성훈)의 잡다한 일을 처리하며 계급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있음을 매일 확인하고 사는 손명오는 억하심정, 자격지심이 가장 짙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문동은(송혜교)에게 지독한 학교폭력을 가한 역할의 모든 배우가 그랬듯, 김건우 역시 악함 속에서도 배우 자신만의 정당성을 찾아야 했다. “명오에게선 일상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건달 느낌이 나요. 좋게 말하면 어느 정도의 순수함도 있죠. 부를 가진 재준 같은 인물에 비하면 ‘언더’, ‘스트리트’쪽이랄까.” 김건우의 첫 촬영은 송혜교와 분식집에서 만나던 신이었다. 한참 선배인 그의 상대 배우는 ‘하고 싶은 대로 해. 니가 준비한 거 다 해봐’ 하는 식이었고, 김건우는 그런 데서 오는 편안함을 첫날부터 느꼈다. “하지만 작품을 할 때마다, 촬영이 다 끝나갈 즈음에야 ‘이제 좀 알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연기를 할 때는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다고 생각해서 후회는 없는데, 늘 아쉬움이 남죠.”

연예계에서 주기적으로 듣게 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친구 따라 오디션장이나 학원에 갔다가’로 시작하는 스타 탄생의 첫 순간이다. “고등학생 때, 제일 친한 친구가 연기 학원에 다닌다더라고요. 그런데 들어보니 오감 깨우는 법을 배운다면서 뭔가 이상한 걸 하고 있었어요. ‘그거 사기 아니야?’ 싶어서 같이 한번 가봤죠.” 중고등학생 시절 밴드 보컬로 활동한 남학생에게 ‘오감을 여는 법’ 식의 명상적 훈련은 다소 이상하게 들렸을 법하다. 친구를 지키러 학원에 따라간 그는 그 다음 날 바로 학원에 등록했다. “‘너도 온 김에 대사 한번 읽어볼래?’ 해서 해봤는데. 와, 재밌더라고요(웃음).” 현재 30대 초반인 김건우가 과거 한예종에서 연극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은 이제야 발굴된 유물처럼 요즘 회자된다(그가 한예종에서 무엇으로 유명했는지, <더블유> 유튜브에 그 내용이 있다).

극 중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훌륭한 만담 커플이기도 한 박성훈과 김건우가 닮은 점은 숱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제 별명이 ‘알바몬’이었습니다(웃음). 편의점, 카페, 고깃집, 대형 마트, 백화점, 옷가게, 토스트집 등등 거친 곳이 뭐 너무 많죠. 어디서 일하든 저는 재밌게, 또 프로처럼 일했어요. 저를 채용하는 사장님은 행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요. 그러면서도 나는 이 곳에 잠시 머물러 있는 거라고 여겼어요. 연기를 너무 사랑했거든요. 저는 느리게 가는 편이에요. 제 딴에는 악셀을 밟는다고 밟는데, 결과적으로는 남보다 늦더라고요. 20대는 ‘나는 느리게 결과물을 내는 아이구나’ 라고 받아 들여가는 시간이었어요.” 그는 먼저 잘된 친구들을 부러워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각자의 속도가 있는 법이고, ‘내 시간이 오면 나도 잘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5월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막을 올리는 창작 뮤지컬 <빠리빵집>에 합류했다. 무대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그가 드디어 맞는 첫 도전이다. <더 글로리>를 둘러싼 지금의 주목을 두고 ‘좋은 거품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이 라이징 스타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건 견고함에서 오는 여유와 안정감이다. 느림을, 느림의 미학으로 몸에 익힌 김건우가 앞으로 얼마나 큰 영광을 누릴지 천천히 기다려보고 싶다.

박성훈이 입은 가죽 재킷, 임지연이 입은 오버사이즈 가죽 코트, 목걸이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임지연

임지연이 착용한 프린지 장식의 드레스와 귀고리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연진아, 집에 찌개를 끓여놨어.” 임지연은 요즘 부모님에게서도 이런 메시지를 받는다. <더 글로리>의 악의 축, 가혹한 폭력을 그토록 무심하게 행하는 박연진은 지금 온갖 밈에 불을 지피는 존재다. 이유 없이 나쁜 인간을 연기한다는 건 배우로서 두려울 수도 있는 선택이다.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악역과 달리 공감과 설득의 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걸까? 비뚤어진 엄마 밑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그런 고민들 끝에 결국 ‘연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생각했어요. 나쁨과 죄책감에 대한 개념 자체를 모르는 거. 단 한 번도 뭔가를 갖고 싶어서 노력해본 적 없이, 그냥 주어진 걸 누리면서 산 거죠. 거기서부터 출발하니 모든 신이 조금씩 풀렸어요.”

‘나는 절대 죽지 않아.’

<더 글로리> 첫 촬영 후 감독이 보다 원한 연진의 느낌이다. 연진이 동은(송혜교)을 만날 때면, 다른 가해자 친구들보다 훨씬 만만치 않은 힘이 드러나야 했다. “하지만 연진이가 동은에게 당할 때는 순간적으로나마 당황하는 기색은 있어야 했어요. 그래야 보는 이가 통쾌함을 느낄 테니까요. 그 후 연진이의 센 기운을 내비치려다 보니, 제가 동은이를 무시하는 표정을 자주 짓더라고요.” 연기에 대한 임지연의 설명은 자주 이런 식이다.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처럼 보고, 자기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디테일을 발견하며 놀라거나 인과관계를 이해해간다. 동은을 비웃던 연진의 싸늘한 미소에서 한쪽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유독 올라가 있는 모습은 평소 임지연이 웃을 때의 특징이다. “원래 제가 가지고 있던 요소들이 연기를 하다 보니 더 풍성하게 드러났어요.”

이번 <더 글로리> 팀 화보를 촬영한 스튜디오는 마침 2019년 <타짜: 원 아이드 잭> 단체 화보를 촬영한 곳이었다. 당시 임지연에게서 받은 인상은 ‘절실함’이다. ‘지연아, 너 정말 절실했구나.’ 누군가의 문자를 받고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는지 보였다는 게 그렇게 고마워서 펑펑 울었다’라고 말하던 임지연의 애타는 표정을 기억한다. 재밌으면서도 지독하다 싶은 건, 연진이라는 히트 캐릭터를 내놓은 이후 몇 년 전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마주 앉은 임지연의 많은 이야기가 여전히 절실함과 절박함에 관한 다른 버전이었다는 점이다. “제 절실함은 주어진 걸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에서 와요. 그러니까, 저를 위한거죠. 내가 연진이로 몇 개월을 살았는데, 역할에 대해 그렇게 고민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잘 해내지 못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연기가 수월하게 흘러가면, 제대로 안 하는 것 같고 못하는 것 같아서 끊임없이 채찍질한다는 사람. 고통이 지나가면 그 희열로 다시 자신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임지연은 분명 그 고통의 패턴을 은근히 즐기는 자다. “아마 자격지심 때문일 거예요. 저는 잘하는 친구들을 늘 부러워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노력밖에 없었죠. 타고난 면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저는 평범한 환경에서 무난하고 행복하게 잘 자랐어요. 그런 제가 연기를 하려면, 절실하게 매달려야 했죠.”

2014년 영화 <인간중독>이 개봉할 때, 데뷔를 상업영화 주연으로 한 임지연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신인 배우였다. 최근에는 김태희와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촬영을 마치고, 틈 없이 <국민사형투표>를 촬영 중이다. 데뷔 시기와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지금 분위기는 배우라면 한 번쯤 상상해본 순간이다. 하지만 임지연은 다시 한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있다. “저 칭찬 많이 받았어요. 인정받으면 크게 기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저한테 종종 찾아오는 ‘그분’이 여전하거든요. 저를 괴롭히면서 배우 그만두라고 속삭이는 악마 같은 그분(웃음). <더 글로리> 촬영 때는 스물다섯 번쯤 찾아왔나? 어제도 만났고요. 어느 순간 그분이 갔다 싶으면 너무 신나서 그 힘으로 또 살아가요. 저는 매일이 절실합니다. 언제나 절실해요.”

‘더 글로리2’ 악역 5인이 서로의 얼굴을 그린다면?

박성훈

실크 소재 하늘색 셔츠는 제이백쿠튀르 제품.

<더 글로리>의 재준은 묘하다. ‘나이스한 개새끼’도 아닌 ‘그냥 개새끼’가 그토록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재준이라는 역할에 대한 김은숙 작가의 바람은 이랬다.

‘섹시하되 느끼하진 않았으면.’

박성훈은 외적인 노력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 어떤 작품 때보다 의상 피팅을 많이 했어요. 식단 관리도 하고, 헤어스타일에도 신경 많이 썼죠. 대본에서 받은 느낌을 어떻게 구현할까 하다가 긴 머리 스타일을 떠올렸어요. 불량스러우면서 무게감도 좀 더 있어 보이게.” ‘손에 잡히지 않는 관능적 면모’를 자아내는 건 말투와 호흡, 저음 목소리의 몫도 클 것이다. 잘생긴 건달의 무게감과 살벌한 기운 안에 개그 요소를 품은 캐릭터. 성공적인 악인은 배우의 재능과 탁월한 대본이라는 작품의 큰 축이 팽팽하게 밸런스를 이룰 때 탄생한다.
연극 무대의 아이돌로 통했다던 박성훈이 매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이후, 그에게 유독 시선이 쏠리게 만든 두 작품이 주말연속극 <하나뿐인 내편>과 지금의 <더 글로리>라는 점마저 묘하다. 부모님들의 낙이라고 할 수 있는 주말 KBS와 넷플릭스. 착실하고 순진한 치과의사 장고래와 전국 일진 경연대회가 열리면 죄질로 우승할것 같은 남학생이 부잣집 아들래미일 때의 성인 버전인 전재준. 서로 교집합을 이루기 힘든 각각의 지점에서 그는 인기를 끌었고, 끌고 있다. 이제 박성훈은 별생각 없이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자신이 연예인 중에서 ‘재벌가 급 금수저’로 꼽히는 걸 목격하는 황당한 경험도 한다. 집안에 의대와 법대 출신이 있다고 한 배우의 한마디가 ‘수저론’으로 비약하는 요즘. 그러나 여러 아르바이트 생활을 거쳐 단역부터 지금에 이른 박성훈의 커리어만큼은 비약과 거리가 있다.
그는 <더 글로리>에서 하도영으로 출연한 배우 정성일과 함께 2008년 영화 <쌍화점>에 화랑의 일원으로 출연했다. 촬영을 마친 후 바텐더로 일하는 바에서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이면 다시 촬영장으로 가던 때를 그는 얼마 전 일을 떠올리듯 들려주었다. “어릴 때 저는 소극적인 편이었어요. 집안에 공부 잘하는 친척이 많았죠. 여러 면에서 제가 인정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러다 연기를 하고, 박수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인정받는 기분을 느껴본 것 같아요.” 종일 광고 촬영을 하고 밤늦은 시각 <더블유> 촬영장에 입장한 박성훈은, 꽤 오래전 얘기를 꺼내면서부터 눈에 띄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워크숍으로 연극 <택시 드리벌> 무대에 섰거든요. 첫 공연 후 커튼콜을 하는데, 그때 박수 받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엄청난 희열과 성취감을 비로소 느껴봤어요.”

박성훈이 코미디를 하면 어떨까? 재준에게서 묻어나온 유머 감각, <아는 형님>의 출연자들 표정이 순식간에 얼었을 만큼 전율을 일으키는 성대모사 재능, 성우 시험 최종 면접까지 간 자의 안정적인 발성과 그 목소리로 코미디를 구사했을 때의 ‘갭’이 만들어낼 효과까지, 박성훈은 어쩌면 코미디 장르에서 아직 발굴되지 못한 인재일지 모른다. 하정우가 만든 영화 <롤러코스터> 식의 뜬금없는 개그에 애정이 있는 그는 언젠가 적합한 코미디물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우선 당장은 매끄러운 결과물 뒤에서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박성훈은 선산을 상속받게 된 이들에게 불길한 일이 연달아 벌어진다는 내용의 넷플릭스 시리즈 <선산> 촬영을 마쳤고, 우리 화보 촬영일까지도 철없는 엄마와 철든 딸의 이야기를 그린 디즈니플러스의 <남남>을 촬영하고 있었다. “지금의 분위기가 굉장히 감사한 일이지만, 저에겐 감사함을 누릴 여유가 많지 않아요. 당장의 작품에서 주어진 숙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하거든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드나 봐요.”

김건우가 입은 시스루 셔츠와 팬츠, 박성훈이 입은 더블브레스트 슈트는 생로랑 제품.

김히어라

김히어라가 입은 풍성한 볼륨감의 코트는 톰 브라운 제품.

화보 촬영 때는 가발을 사용했지만, 요즘 김히어라의 헤어스타일은 탈색한 옅은 금발에 쇼트커트 상태다. 한창 촬영 중인 드라마의 배역을 위한 스타일이다. “<경이로운 소문2>에서는 악귀로 나와요. 센 거로 치면 <더 글로리>의 사라보다 여덟 배쯤은 세겠죠(웃음). 사람이 아닌 캐릭터이기 때문에 마음은 훨씬 편하기도 해요.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라.” 가까이서 본 김히어라의 눈동자는 컬러 렌즈를 낀 것처럼 상당히 투명한 갈색이었다. <더 글로리>에서 마약에 찌든 채 타락하는 화가 이사라가 치켜뜨던 그 눈을 이젠 곱게 웃어 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이 눈 때문에 제가 더 몽롱해 보이는 것 같아요.”

‘희고 깨끗하게 살아라’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김히어라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한 편의 성장영화가 그려졌는데, 거기엔 학교라는 제도권 내에서 자칫 맹랑하고 유별나게 보일 법한 어린 소녀가 있다. “감수성 예민하고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머릿속에 도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어요. 제가 느낀 걸 주변에 조잘거리길 좋아했죠. 질문도 많았어요. ‘왜요?’ ‘왜 해야 해요?’라고 물을 때는 순수한 궁금증이 컸어요. 이런 저를 귀엽게 봐주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왜 이렇게 나서니’, ‘가만히 좀 있어라’ 하는 선생님도 있었죠. 다행히 부모님은 저를 틀에 가두려 하지 않았어요.” 유명한 목사 아버지를 둔 <더 글로리>의 이사라는 교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약에 취해 라이브쇼를 하던가? 모태신앙인 김히어라가 어릴 적 ‘나는 모난 사람인가?’ 싶어 혼란스러울 때, ‘어라가 똑똑한 친구라 남들보다 더 많이, 빨리 느끼는 것 같다’고 부모님 앞에서 아이 들으라는 듯이 따뜻하게 말해준 이는 목사님이었다. 그리고 예능계 반이었던 고등학생 시절, 수업에서 연기라는 걸 처음 해봤을 때, 김히어라는 자신이 살아 팔딱거리는 걸 느꼈다. “늘 별난 아이처럼 취급받았는데 연기할 때만큼은 온전한 내가 허락되는 시간 같았어요. 얼마든지 질문을 던져도 됐고요.”
시청자와 관객은 감성 충만한 배우가 직관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여기기 쉽지만, 그 매끄러운 결과물 뒤에는 ‘따져 묻는’ 과정이 있다. 그러나 배우가 파헤쳐야 할 그 인물이 지독한 악인이라면? “저는 연기할 때 물음표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왜 이 장면이 필요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카메라 앞에서 선보이는 건 그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 후에 행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사라는 일반적인 인물이 아니잖아요. 어느 순간 제작진이 그러더라고요. ‘사라는 그냥 나쁜 애야. 너무 이해하고 이유를 찾으려 들지 말자’라고.” ‘왜’에 대한 정리가 되지 않을수록 연기가 옅어지는 느낌이 든다는 김히어라는 그 말에서도 단서를 찾았다.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친구는 자신이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조차 몰라서 하는 행동이 많을 거라고 봤어요. 제대로 살고 싶지 않은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고 싶기 때문에, 무언가를 직면하기 두려워서 회피하는 거라고.”

연극과 다수의 뮤지컬을 통해 대학로에서는 전부터 ‘나름 알려진 존재’였던 김히어라는 그 동네에서 카페를 운영 중이기도 하다. 배우를 꿈꾸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일하고, 김히어라가 그린 그림도 걸려 있는 카페다. “무수한 ‘왜’를 찾아간 끝에 결과물을 보여주는 게 연기라면, 그림을 그리는 건 저도 알지 못한 제 감정을 알아가는 과정같아요. 일기장 내지 낙서장 같은 역할이죠.” 조카에게 사줄 옷을 찾아 도매시장에 간 일을 계기로 한동안 옷 장사를 하며 꽤 수입을 올렸던 것, 대학 시절 문예창작 수업 때 쓴 시를 발전시켜 ‘서른대의 사랑’이라는 싱글을 발표한 것 등등. 행동으로 움직이는 김히어라의 삶의 한 시점마다 크고 작은 이야기가 가지를 뻗는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과거 학전에서 오디션을 봤을 때, 김민기 대표가 했다는 말은 앞으로 이 배우를 볼 때면 주석처럼 떠오를 것 같다. “하늘의 별을 보며 말하는 상황을 연기했는데, 그러시더라고요. ‘너는 실제로 별을 많이 보면서 자랐구나. 복 받았다.’ 어릴 때 집이 시골에 있었거든요. 학교는 시내에 있었지만요. 저는 배산임수 환경에서 자라, 뱀과 함께 학교에 다녔습니다(웃음).” 김히어라는 <더 글로리> 현장에서 스태프들에게 애정을 받으면서, 어쩌면 자신이 정말 괜찮은 배우가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10년 이상 공연하며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꽤 잘 살아온 것 같다고 느낀다는 그녀의 얼굴에 고마움이 보였다. “신기한 일이죠. 내 자리에서 혼자만의 길을 가는 것 같아도, 누군가 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김히어라와 차주영이 입은 깃털 장식 재킷은 발렌티노, 김건우가 착용한 케이프는 발렌티노, 목걸이는 디올 제품.

믿고 보는 ‘더 글로리’ 배우들의 차기작

차주영

차주영이 입은 꽃 모형 장식의 드레스는 로에베 제품.

차주영이 아닌 혜정이를 상상하긴 힘들다. 눈치 보기 바쁜 큰 눈과 감정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하며 미세하게 실룩거리는 이목구비. 깊이 얽히지 않은 사이로 주변에 있었다면, 명품 좋아하는 푼수 쯤으로 취급했을 듯한 여자. ‘친구’라고 분류되는 이들에게 모욕당해도 그걸 모욕이라 받아들일 세포가 혜정에겐 없거나, 있어도 애써 무시하며 무리에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악을 쓰는 게 그녀의 삶이다. 드라마에서 연진(임지연)은 어떤 순간을 맞닥뜨려도 자기를 굽히지 않지만, 혜정은 시어머니 될 사람과 복수를 계획 중인 피해자 동은(송혜교)이 가까운 사이란 걸 알자 바로 무릎을 꿇는다. 그런 인물의 사악함은 불안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무리에게 희생양이 없다면, 타깃은 바로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혜정이 같은 인물을 찾을 수가 없어 막막했어요. 툭하면 화가 난 상태로 메모장에 뭔가 썼어요. 답 없는 고민을 안 좋아하는데,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고…. 그러다 내린 결론은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대본에 집중하자는 거였죠. 그래서 그냥 읽었어요, 대본을.”

대본을 너무 탁월하게 읽어버린 차주영은 돌이켜보면 8개월 정도의 촬영 기간 내내 극도의 긴장 상태를 이어갔다고 한다. 현장 자체는 그 누구도 힘들게 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스스로 강박과 압박이 심했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볼 때는 제가 그저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나 봐요. 저는 사실 많이 힘들었어요. ‘컷’ 소리가 난 후에도 감독님 얼굴에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러다 촬영 기간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좋다, 더 마음껏 해’ 식의 반응을 들었죠. 배우들과 이런저런 얘길 해보면서 시간이 지나 알게 됐어요. 초반엔 제가 더 혜정이답게 머물도록 감독님이 환경을 조성해준 것 같아요. 어느 순간 확실히 저를 북돋워주셨어요.” 차주영은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와 <더 글로리>를 같은 시기에 촬영했다. 배우 이경영 옆에서 틈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차갑고 조용히 존재하던 수행비서의 모습을 떠올리면, 연기의 온도 차가 더욱 극명해진다. 촬영장을 나오면 바로 일상으로 복귀 가능한, 이른바 ‘온·오프’가 잘되던 배우인 차주영은 혜정이라는 어려운 미션을 만나 일상에서도 ‘혜정이스럽게’ 사는 연습을 했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고 단순하게, 그리고 가감 없이 표현하는 식으로.

“저는 신중한 성격이거든요. 가볍고 단순해져보니 점점 뭔가가 해소되는 느낌도 들었어요.”

차주영은 요즘 3월 25일부터 방영할 KBS 주말 연속극 <진짜가 나타났다!>를 촬영 중이다.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으로 등장한다. 히트한 OTT 작품에 이어 전국의 중년 부모님들이 지켜보는 주말연속극에 출연하게 된 이상,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이 보다 넓어질 시점이다. “오늘 <더블유> 촬영장에 오기 전 사우나에 다녀왔어요. 제가 사우나를 좋아하는데, 오늘이 마지막 사우나라는 각오로 하고 왔죠(웃음).” 차주영은 ‘같아요’ 식으로 말끝을 부정확하게 흐리는 표현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연기에 대해서라면 ‘재미있는 것 같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웃음). 저는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현장이 전혀 재밌지 않았어요. <치즈 인 더 트랩>에 출연할 때만 해도 이 일이 직업이라는 생각으로 한 게 아니거든요. 음악, 영화, 건축처럼 제가 관심 있는 분야를 종합해놓은 매체가 영화라, 언젠가 영화 속 세상에서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만 있었어요. 그러다 연기에 코가 꿰어버린 건데… 이렇게 계속 코가 잘 꿰어져 있으면 좋겠네요. 워낙 좋은 에너지를 가진 배우들 틈에서 저는 거기에 못 미친다는 걸 잘 알아요. 그러니까 쓰임을 받을 때 총력을 다하자는 마음 뿐이에요.”

[ENG] ‘The Glory’ Villainous Five Group Interview

반전 매력 ‘더 글로리’ 악역 5인 화보 B컷 공개

‘더 글로리’에 대한 7가지 후일담

디지털 에디터
장진영
피처 디렉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고원태
스타일리스트
조운진(임지연), 김기만(박성훈), 구원서(김히어라), 박선희(차주영), 장빛나(김건우)
헤어
오지혜, 배경화, 박미형(글로스)
메이크업
이 영, 박윤지(글로스)
어시스턴트
김하은,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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