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구는 어디까지 정교해질 수 있는가, 몽블랑의 장인 정신

권은경

정교함의 예술

필기구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필기구에 극강의 장인 정신이 깃들면 어떤 예술품이 탄생하는가. 그 생생한 실체, 몽블랑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 컬렉션을 교토에서 확인했다.

몽블랑의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 컬렉션. 왼쪽부터 LE 1994 코프레, LE 10, LE 333.
교토에서 열린 컬렉션 공개 이벤트 당시, 갈라 디너 장소인 ‘쇼군즈카 세이류덴’에 설치된 포토월이 교토의 느낌과 어우러진다. 이 장소에 각 도시에서 모인 프레스와 컬렉터가 함께했다.

만년필은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역설적인 사치품이다. 키보드와 터치스크린이 지배하는 2020년대에, 시간을 들이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펜의 캡을 열고, 잉크가 스며들게 만들어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가는 행위는 효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시간을 의식적으로 소비하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지난해 몽블랑 캠페인으로 <더블유>와 만난 소설가 김영하의 말처럼, 손으로 쓴다는 건 매번 다른 경험이다. 그 만년필이 장인의 손끝에서 극도로 정교하게 제작된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휴대 가능한 예술품이 된다. 중요한 계약서나 증명서에 서명할 때처럼 인생의 특별한 순간에 함께하는 작품. 혹은 컬렉터의 공간에 전시되어 그 존재 자체로 안정감과 뿌듯함을 안겨주는 오브제. 몽블랑의 컬렉터 중에는 집 안 거실과 현관 사이의 벽을 뚫고 공간을 만든 부부가 있다. 그들은 돌벽 안에 유리 진열장을 설치한 뒤, 그 안에서 몽블랑 컬렉션이 회전하도록 꾸며놓았다. 집에 손님이 오면 진열장 부위의 블라인드 패널이 내려와 컬렉션을 가려버린다. 그들에게 몽블랑의 특별한 만년필들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다.

몽블랑이 매해 선보이는 하이 아티스트리 컬렉션은 장인 정신과 기술을 집약한 최상위 라인이다. 수천만원에서 수십억원대에 이르는 예술품이기도 하다. 그 최신 컬렉션을 아시아 지역에 처음 공개하는 글로벌 이벤트가 지난 5월 말 일본 교토에서 있었다. 이번 컬렉션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장인 정신.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High Artistry A Tribute To Craftsmanship)’이라는 그 이름이 곧 내용이다. 이 컬렉션은 몽블랑의 핵심인 장인 정신을 기리며, 창작 예술을 살아 있는 전통으로 탐구한다는 태도로 탄생했다. “하이 아티스트리 컬렉션은 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합니다. 아티스틱 디렉터 마르코 토마세타(Marco Tomasetta)가 파리에서 정말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며 디자인하죠. 이제 그 팀은 아름다운 드로잉을 쥐고서 본사가 있는 함부르크로 옵니다. 그러면 엔지니어들과 장인들이 충격에 빠져요. ‘좋아요, 그런데 이걸 대체 어떻게 구현하죠?’ 하면서(웃음). 그들은 그때부터 함께 고민하기 시작해요.” 교토에서 만난 몽블랑의 라이팅 컬처 디렉터, 알렉사 실츠(Alexa Schilz)의 말이다. 몽블랑은 만년필 한 점마다 최고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과 협업하고자 했다. “우리는 창작을 시작하기 앞서 동아시아로 향했어요. 동아시아 지역에는 놀랄 만큼 풍부한 공예 전통과 아름다운 상징들이 존재하니까요. 아시아의 상징성과 장인 정신에 경의를 표하는 컬렉션을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이번 컬렉션은 특히 교토의 다양한 요소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되었다. 교토의 장인들과 협업한 결과물,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 리미티드 에디션 10에는 건축과 자연이 녹아 있다. 눈에 띄는 주요 색감은 검정, 금색, 초록. 만년필 디자인을 말할 때는 먼저 부위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닙은 펜촉, 캡은 뚜껑, 클립은 주머니나 노트에 꽂는 집게 부분, 배럴은 몸통, 콘은 몸통의 맨 아래쪽 끝부분을 가리킨다. 이 리미티드 에디션에는 교토 금각사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클립은 대나무 잎 모양이고, 닙에는 벚꽃, 캡에는 잠자리 문양이 3D로 새겨졌다. 잠자리는 힘과 용기를 상징한다고. 콘에는 거북 등껍질 무늬가 있다. “이 리미티드 에디션은 스타일 면에서 정말 유니크합니다. 일본 장인 정신의 정수를 잘 보여줘요.” 금각사 묘사에 쓰인 마키에(Maki-e) 기법은 옻칠에 금가루 같은 것을 뿌려 문양을 완성하는 전통 기술이다. 몽블랑 팀은 금가루와 자개를 더한 옻칠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펜의 중앙에 자리한 제이드 링은 누가 봐도 이 펜의 포인트다. 제이드라 하면 어르신들에게 선물용으로 적합한 강력한 후보. 우리나라에서 제이드는 보통 옥으로 통하는데, 옥에는 연옥과 경옥이 있다. 그 둘을 구분하기란 집요한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녹색 제이드와 가까이 있으면 좋은 기운을 받을 거라고만 생각하는 게 낫겠다. 오래 전부터 행운, 장수, 영적 보호의 돌로 숭배받았으니.

LE 333은 시원한 인상을 가졌다. 반투명 파랑 래커링에 거북 등껍질 패턴, 비단잉어와 국화 묘사가 눈에 띈다.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 리미티드 에디션 333의 첫인상은 시원함이다. 특히 ‘확신의 쿨톤들’이라면 이 청량한 파랑과 은색의 조화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육각형 패턴은 동양 문화권에서 오랜 시간 장수의 상징으로 통한 거북 등껍질을 형상화한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적으로 반투명 파랑 색감인 배럴 일부는 물을 의미하는 블랙 래커를 머금은 상태다. 눈앞에 놓인 펜을 들어 방향을 틀어보자, 잉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찰랑거리는 물속을 유영하는 고귀한 비단잉어. 그리고 선 정원의 차분함을 연상시키는 금색 장식의 국화. 닙에는 벚꽃, 캡 위쪽에는 잠자리 문양이 섬세하게 자리 잡았는데, 캡에는 검정 오닉스가 박힌 마더오브펄 소재의 몽블랑 엠블럼이 박혀 있다. 하이 아티스트리 컬렉션을 비롯해 아티스틱한 콘셉트를 지닌 몽블랑의 여러 컬렉션은 샅샅이 차분하게 살펴보고 음미하게 만든다. 실처럼 가는 선으로 새긴 인그레이빙과 입체감 있는 3D 장식이 교차하고, 여기에 부위마다 다른 소재와 처리 기술의 문제도 있다. 펜이라는 몸집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와 작디작은 요소를 가득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때로 신비롭게 느껴진다.

LE 1994 코프레의 주황빛 빨강이 강렬하다. 우아하게 짝짓기 춤을 추는, 두루미의 생동하는 순간이 펜에 담겼다.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 리미티드 에디션 1994 코프레의 선명한 주황빛 빨강과 마주하자, 교토에서 금각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사찰인 청수사(기요미즈데라)가 떠올랐다. 청수사 입구와 곳곳에 이와 비슷한 색의 거대한 문과 건축물이 있다. 1994년은 청수사를 비롯해 교토의 주요 역사적 명소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된 해다. 이 리미티드 에디션은 풍부한 문화유산과 오래 지속되는 예술성을 기린다. 1,994개 제작되었다는 점도 재밌다. 캡에는 검은 래커칠을 입은 두루미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두루미가 우아하게 짝짓기 춤을 추는 순간이다. 학은 천 년을 산다는 말이 있던가? 한국 문화에서는 십장생 중 하나다. 이 강렬한 빨강 배경 속 두루미는 날개를 활짝 펴고 솟아오르기 직전인데, 그렇게 두루미가 솟아오른 후엔 짝의 주위를 맴돈다고 한다.

이번 교토 이벤트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은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 리미티드 에디션 1을 처음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다. ‘펜 하나에 이런 것까지 담을 수 있다’, ‘펜이 이렇게 화려할 수 있다’를 몸소 보여준달까. 몽블랑 팀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동식물의 아름다움에서 영감 받은 결과물이다. 캡과 배럴을 따라 흐르는 선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문양은 그 어느 리미티드 에디션보다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다. 거기엔 검정 오닉스로 조각된 단풍잎과 서로 얽힌 나뭇가지, 벚꽃, 개구리 등이 있다. 벚꽃들에는 핑크 사파이어, 군데군데 다이아몬드 세팅이 점처럼 섬세하게 흩뿌려진 느낌이라 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빛이 화려했다. 정점을 장식하는 요소는 캡톱에 자리한 녹색 꿩. 장갑을 낀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지만, 라이팅 컬처 디렉터는 이 작품을 공개하며 단서를 붙였다. “캡을 닫은 상태로 감상해주세요. 특히 꿩 장식 부분은 조심히 다뤄주셔야 해요.” 3D 솔리드 화이트 골드로 만들어진 꿩 장식은 반클리프 아펠의 마스터 장인들이 에나멜 공정으로 완성한 것이다. 세상에 단 한 점 존재하는 이 리미티드 에디션은 현재 전 세계를 순회 중이다. 9월에는 베니스에서 열리는 국제 공예 비엔날레인 ‘호모 파베르’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원래 꿩 장식 쪽에 5캐럿 다이아몬드가 세팅되어야 하는데, 지금 이 피스에 있는 건 진짜는 아니에요. 진짜라면 훨씬 더 많은 보호 장치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순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완전히 분해할 예정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디테일한 부위까지 다시 폴리싱할 거예요.”

갈라 디너 장소인 ‘쇼군즈카 세이류덴’은 교토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사원이 있는 곳이다 .
갈라 디너 장소인 ‘쇼군즈카 세이류덴’은 교토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사원이 있는 곳이다 .

꿩 장식이 달린 피스도 압도적이지만, 광채로 압도하는 쪽은 하이 아티스트리 어 트리뷰트 투 크래프트맨십 리미티드 에디션 5다. 과장 조금 보태 ‘어이쿠, 눈부셔라’ 소리가 육성으로 나올 뻔했다. 이건 기세가 좀 다르다. 만년필에 호랑이가 자리 잡았다. 금각사에 있는 연작 패널 회화에서 영감 받은 호랑이 그림, 반클리프 아펠의 마스터 장인들이 에나멜로 양각 작업한 대나무는 동양 수묵화의 또 다른 버전 같다. 캡과 배럴은 18K 골드이고,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가 여기저기 세팅되어 호랑이처럼 용맹하게 빛을 내뿜는다. “이 리미티드 에디션에는 1,200여 개의 보석이 세팅되어 있죠. 옐로 사파이어, 차보라이트, 다이아몬드… 콘의 끝부분에는 제이드도 있고요. 콘의 패턴은 일본 정원에서 볼 수 있는 모래 고르기에서 영감 받은 거예요. 모래 고르기가 조화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행위라고 하더군요. 그 요소를 더하는 것이 아름답겠다고 생각했어요.”

몽블랑 본사는 독일 함부르크에 있다. 함부르크의 공장은 전 세계에서 몽블랑 펜이 만들어지는 유일한 장소다. 교토로 떠나기 전, 우연히 <타임>지에 실린 그 공장 취재기를 읽었다. 공장에서는 펜의 구조 설계, 금형 제작, 부품 개발 등을 한다. 만년필을 만드는 곳이라지만, 거기엔 부속품들이 각 펜에 절대적으로 정밀하게 적용되도록 돕는 최첨단 기계들이 있다. <타임> 기자는 그 풍경을 ‘강도 높은 개별 관리, 세심한 감독 때문에 공장이라기보다 수술실에 가까운 인상’이라고 했다. 몽블랑은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까지 직접 길러내야 한다. 몽블랑이 추구하고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진 장인은 세상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컬렉션 중 가장 장식적이고 화려한 LE 1. 화이트 골드 소재의 꿩 장식은 반클리프 아펠의 마스터 장인들이 에나멜 공정으로 완성한 것이다.

몽블랑의 여러 라인 중에서도 하이 아티스트리 컬렉션은 공예품 그 이상의 세계다. 하이 주얼리와 비슷한 인상이면서 정밀한 시계 메이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복잡다단하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오브제이지만, 실제로 잉크가 흐르고 필기 기능이 가능해야 하는 필기구다. 하나의 피스를 위해, 엔지니어링과 장인 기술이 함께 작동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몽블랑 메종의 아티잔 아틀리에에서는 보석 세팅이나 인그레이빙 등 많은 작업을 직접 수행한다. 이번 컬렉션에는 몽블랑 측에 낯선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토에서 만난 라이팅 컬처 디렉터의 말을 들으며, 함부르크의 공장, 아틀리에, 그리고 아시아 지역을 오가는 물질적, 정신적 교류를 상상했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기술을 굳이 배워서 대신하려고 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기술이 탄생한 원산지의 공예를 지원하고 싶죠. 특정 기법을 가장 잘 구현하는 장인을 세계 곳곳에서 찾아 협업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우리가 표현하는 방식이 정확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현지 전문가들과 많은 대화를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부속품과 미완의 피스가 여러 나라를 오가요. 부품 하나를 어느 도시로 보내고, 그 테스트 결과물을 받아보고, 다시 수정해서 보내고, 또 돌아오고…. 그것 자체가 흥미로운 여정이에요. 직원들도 결국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됩니다. 각각의 요소가 어떻게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되었는지도 그때 확인할 수 있죠.” 작년 하이 아티스트리 컬렉션의 경우, 몽블랑은 베르사유 궁전과 파트너십을 맺고 협업했다. 올해의 탐색지는 아시아였다. 어딘가의 유산과 역사가, 그리고 서로 다른 미학이, 만년필 하나에 안착할 수 있다는 것. 그 작은 오브제를 위한 길고 큰 여정이 지금 이 순간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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