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게, 투명하게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보다 단단하지만, 일상에서는 감기에 잘 걸리고 영양제를 챙겨 먹는 여린 면모도 있다. 고양이 사료통이 비길 바라는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 배우 김영광의 이야기는, 그만의 솔직함으로 빛난다.

<W Korea> 요즘 많이 바쁘죠?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트리거>, KBS <은수 좋은 날>, 그리고 10월 말 개봉하는 영화 <퍼스트 라이드>까지, 그간 촬영한 작품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요.
김영광 <트리거>는 1년 반쯤 전에 촬영했어요. <은수 좋은 날>은 올해 2월 초까지 찍었고요. 영화 <퍼스트 라이드>는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진행됐어요. 3월부터 시작해서 5월, 6월쯤 마무리한 것 같아요. <퍼스트 라이드>에서 함께한 (차)은우가 입대를 앞두고 있었거든요. ‘빨리 찍고 보내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에 정말 서둘러 끝냈습니다.
다행이네요. 촬영 시기가 겹치진 않아서.
다행히 작품마다 한 달 정도는 여유가 있었어요. 어두운 캐릭터를 반복하다 보니, 어두운 기운이 길게 남을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대본에 ‘누군가 쳐다본다’고 적혀 있다면, 예전에는 ‘부끄럽게 왜 이렇게 오래 바라볼까?’ 하는 감정이 먼저였는데, 장르물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뭘 봐?’라는 반응이 먼저 나오더라고요.
몇 개월간 그 인물로 살다 보면 잔향처럼 남는 게 있나 봐요.
맞아요. 악역이든 어두운 역할이든, 그 에너지를 몸으로 표현하다 보니 후유증이 있어요. 그래서 작품 사이 쉬는 시간에는 일부러 시선을 다잡는 연습을 해요. ‘이 장면은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을까? 내가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진 않을까?’ 하면서 스스로 점검하는 거죠.
신기하게도 세 작품 모두 결이 다르고, 맡은 캐릭터의 색깔도 확연히 달라요. <트리거>의 ‘문백’ 은 선과 악을 넘나들고, <은수 좋은 날>의 ‘이경’은 두 얼굴의 미술 강사예요. <퍼스트 라이드>의 ‘도진’은 농구선수 출신의 해맑은 인물이죠. 캐릭터가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본인만의 장치가 있었을까요?
쉽지는 않죠. 사실 특별히 정해둔 장치가 있는 건 아니에요. 현장마다 스태프도, 감독님도, 공간도 모두 다르잖아요. 처음엔 낯설어서 바로 적응하기 힘들지만 시간이 흐르면 현장 고유의 분위기가 형성돼요. 저는 그 분위기를 많이 타는 편이에요. 촬영장이 달라지면 저도 조금씩 달라져요.
한창 방영 중인 <은수 좋은 날>은 평범한 주부가 의문의 마약 가방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이영애 배우의 26년 만의 KBS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죠. 이영애씨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선배님은 생각보다 아주 털털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있어요. 하루는 제가 “선배님 식사하셨어요?” 하고 여쭸더니, “응. 나 짜파게티 먹고 왔어” 하시더라고요. 그런 소소한 모습이 참 인상 깊었어요. 저에게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강렬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평범한 주부를 연기하시잖아요. 그런데 그 모습이 또 너무 잘 어울리세요. 실제로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 같고요. 무엇보다 목소리에 엄청난 힘이 있어요. 대사 한 마디만으로도 몰입도가 확 높아지죠. 선배님 목소리에는 설명과 감정, 정보가 다 담겨 있어요.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장면이 충분히 설득력을 얻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인터뷰에서 이번 작품을 선택한 배경에 이영애의 영향이 컸다고 했더군요. 구체적으로 그녀 에게 배운 점이나 인간적으로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을까요?
선배님은 세트장에 들어오실 때부터 이미 ‘은수’ 그 자체세요. 작품 속 캐릭터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늘 집중하고 계신달까. 저는 촬영 전까지 스태프들과 떠들고 커피도 마시다 들어가는데, 선배님을 보면 그 순간 풀려 있던 마음이 바로잡히는 느낌이에요.
촬영 전부터 캐릭터에 몰입하는 배우들이 있죠.
맞아요. 제가 작품을 하면서 그런 모습을 본 건 두 분뿐이에요. 신하균 선배님, 그리고 이영애 선배님. 신하균 선배님 역시 촬영 전에는 농담도 거의 안하세요. 두 분 모두 집중력이 엄청나신 듯해요. 저도 닮고 싶은 부분이에요. 물론 배우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저는 현장 분위기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촬영장에 일부러 일찍 가요. 20분이라도 먼저 가서 현장을 둘러보고 분위기를 느끼면서 몰입하려고해요. 괜히 촬영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딱 일만 하는 스타일이에요. 촬영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고, 현장에서도 말을 아껴요. 후배들이 가끔 “형, 이 연기 이렇게 해보려는데 어때요?”라고 물으면 저는 “마음대로 해도 돼요. 그런 건 저 말고 연출 감독님께 여쭤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라고 해요. 연기라는 건 누군가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번에 연기한 ‘이경’은 명문대 출신 중학교 미술 강사이자, 동시에 정체불명의 클럽 MD로 살아 가는 두 얼굴의 캐릭터죠. 당신이 바라본 ‘이경’은 어떤가요?
‘이경’은 참 복잡한 사람이에요. 마치 양파처럼 겹겹이 싸여 있어요. 촬영이 끝날 즈음엔 ‘이 사람이 어떻게 견디면서 살았을까? 어떻게 삶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만 남았어요.
회차가 거듭될수록 숨은 이야기가 드러나는군요.
맞아요. 낮에는 미술 강사지만 밤에 클럽에서 일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그런데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또 다른 이유가 있고, 그 안에서도 또 다른 사정이 있어요. 설명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이경’의 내면은 복잡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경’이 많이 안타까웠어요. 삶에 긍정적인 부분이 거의 없고, 속은 비어 있는데 그 빈자리를 어두운 면이 가득 채우고 있거든요. 누군가를 만나도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인물, 그래서 더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캐릭터에 접근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본인의 내면에서 끌어온 부분이 있어요?
‘이경’은 제 안에서 꺼내 쓸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존재예요. 그의 인생은 90% 이상이 가짜니까요. 무엇 하나 진실한 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 제 안에서 가져올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더라고요.
<은수 좋은 날>이 김영광에게 남긴 건 뭘까요?
이영애 선배님과 함께했다는 사실이죠(웃음). 선배님 번호도 가지고 있어요. 얼마 전엔 연극 보러 오라고 따로 연락도 주셨고요. 이렇게 뛰어난 분과 호흡을 맞췄다는 경험은 그 이상의 의미로 제 안에 남아 있어요.
2020년 <더블유>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재미있는 악역, 독특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 주변에서도 이렇게 밝게 웃는 사람이 악역을 하면 더 무서울 것 같다고 한다.” 이후 넷플릭스 시리즈 <썸바디>, <트리거>, ENA <악인전기>, <은수 좋은 날>까지 꽤 많은 악역을 맡았어요.
그런 역할이 한꺼번에 몰려온 건 아니에요. 마침, 저도 강렬한 캐릭터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때였죠. 소속사 대표님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후 대표님도 미팅 때마다 ‘혹시 이런 캐릭터 없을까요?’ 하고 배역을 찾아다니신 것 같아요. 결국 오디션 기회가 주어지고, 자연스럽게 악역을 연기하는 순간이 많아졌죠.
나쁜 사람을 연기하는 느낌은 어때요?
장르물만의 매력이 있어요.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마치 초능력이 생긴 것처럼 악역의 행동 하나로 상황이 바뀌고 모두가 휘둘리잖아요. 그런 점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악역을 연기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감정이 있나요?
많이 차분해졌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무서워할까? 공포심을 느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결국 침묵이 가장 무섭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그래서 <썸바디>에서 ‘성윤오’를 연기할 때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한동안은 실제로도 그 몰입이 이어진 것 같아요. 원래는 촬영장 가면 “식사하셨어요?”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땐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요. 그 침묵이 쌓이면서 오해가 되고, 오해가 깊어지면 결국 공포로 이어지더라고요. 또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말수가 줄고 단답형으로 변해가는 것도 느껴요.

그럼에도 오늘은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네요. 김영광의 미소에는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 하게 넘나드는 표정이 담겨 있는 듯해요. 멜로부터 악역까지 폭넓게 소화하는 배우도 드문데, 어 떤 역할이 가장 편하고 자유롭나요?
저는 로맨스나 코미디가 제일 편해요. 원래도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데, 장르물은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아야 하니까 힘들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퍼스트 라이드>에서의 코믹 연기를 기대하는 팬이 많았나 봐요. 24년 지기 친구들과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라는 설정에, 강하늘, 차은우, 강영석 등 차세대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정말 편했어요.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촬영한 것 같아요. 제가 맡은 ‘도진’은 단순하고 해맑은 캐릭터라, 연기할 때도 복잡한 고민이 필요 없었죠. 그냥 즐기면 되는 역할이라 더 좋았어요. 현장 분위기도 늘 유쾌했고요. 또래 배우들과 매일 장난치고, 아침마다 만나 조식 먹고, 단체 MT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도진’은 어떤 캐릭터예요?
농구 선수 출신인데, 고등학생 때 부상으로 농구를 그만뒀어요. 저도 연기하면서 ‘도진’과 닮은 부분을 많이 느꼈어요. 장난칠 때나 아무 생각 없을 때는 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더라고요.
예전 인터뷰를 보면 감독님의 “컷!” 소리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 종일 ‘대체 어떤 부 분이 문제였을까’ 고민한 시절도 있더라고요. 지금은 달라졌나요?
지금도 그래요. 그건 소심한 게 아니에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감독님도 모르게 기분이 좋을 때와 ‘조금 애매한가?’ 싶을 때는 “컷!”을 외치는 톤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께 여쭤보면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하시죠. 그래도 저는 늘 궁금해요. 연출은 감독님이 하는 거니까, 내가 그 연출에 맞게 잘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요즘은 스스로 만족했다고 느끼는 기준이 달라졌어요?
저는 칭찬이 좋아요. “잘했다! 좋다! 오케이!” 이런 말 한 마디면 그날은 기분이 정말 좋거든요. 물론 연차가 쌓이면서 굳이 칭찬이 없어도 스스로 괜찮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퇴근길에 뿌듯한 마음이 들고, 그날은 푹 자고요(웃음).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시간의 흐름을 크게 느끼는 순간도 있나요?
이런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돼요. 얼마 전에도 모 기자님이 “데뷔하신 지 20년이 다 되어가더라고요” 하는데, 저도 놀랐어요. “제가요? 벌써요?” 혼자서 ‘오늘은 데뷔 몇 주년이구나’ 하고 세어본 적은 없으니까요. 기자님이나 팬분들이 알려주셔서 실감하죠. 나이가 안 들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나 봐요.

데뷔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김영광에게 ‘좋은 배우’란 어떤 의미일까요?
한마디로, 1인분은 하는 사람. 자기 몫을 다 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저는 늘 최선을 다하는 배우이고 싶어요.
결이 사뭇 다른 두 작품이 동시에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설렘 속에서 지내고 있을 듯한데, 지금 의 김영광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요?
사실 좀 당황스러워요. 이렇게 시기가 겹쳐서 작품이 공개될 줄 몰랐거든요. 회사도 처음 겪는 상황이라 홍보 일정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 마음을 표현한다면, ‘당황스러운 요즘’입니다.
마지막으로 김영광의 비밀 세 가지를 알려주세요.
첫째, 생각보다 여려요. 잔병치레가 끊이질 않아 최근 병원을 자주 다녔어요. 감기도 자주 걸리고요. 그래서 제 가방의 70%는 영양제예요. 차에도 영양제 박스가 있어요. 둘째, 새치가 많아요. 그래서 3주에 한 번씩 염색해요. 안 하면 반 백발 수준이에요. <트리거>에서 머리가 하얗게 올라온 장면이 있는데, 다 제 머리카락이에요. 셋째, 그래서 은근히 기대도 돼요. 40대 후반, 50대가 되면 완전히 새하얀 백발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때 또 멋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른들이 이런 말씀 종종 하시잖아요. “이렇게 흰 머리가 많은 건 다 네가 속 썩여서 그래. 속 좀 그만 썩여라.”
누가 절 속 썩였죠? 요즘은 고양이들이 사료를 잘 안 먹어서 속 썩이는 것 같아요. 애들이 간식만 찾고 사료통은 늘 그대로거든요. 제 잘못이죠. 제가 간식을 자주 줘서 입맛을 잘못 들였나 봐요. 오늘 집에 가면 사료통이 조금은 비어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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