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감독님이 오늘은 어떤 해석을 내놓으실까, 점점 궁금함이 생겼죠. 박찬욱 감독님의 디렉팅을 통해 깨달은 건 대사에 주어진 ‘원초적 의미’가 중요하다는 점이었어요. 감독님과 처음 작업하면서, 대사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고 정통을 지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 배우 손예진


박찬욱 감독은 화보 모델로서의 임무를 마친 후, 느릿한 속도로 걸어 다니며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손에 든 라이카카메라 외에 두툼한 검정 배낭에도 두 대의 카메라가 더 들어 있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역할은 ‘사진가’였다. 매거진 화보 촬영장이란 에디터들의 욕심과 화보 주인공의 재능이 맞아떨어지며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곳이다. 주인공 중 하나가 박찬욱이라면, 그를 카메라 앞에만 세우는 건 직무 유기처럼 느껴진다. 영화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의 배우들 및 작업 여정을 담은 사진집을 낸 것은 물론, 국제갤러리 소속 작가로서 개인전을 열기도 한 그에게 사진은 진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오늘이 특별한 이유는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구성하는 여러 배우 중에서도 손예진과 감독이 함께하는 이 ‘투 샷’의 귀함에 있다. 영화 촬영장을 벗어난 두 사람은 따로 또 같이, 화보의 주인공으로 섰다. 그리고 손예진은 안주영과 박찬욱, 두 사진가의 눈을 통해 서로 다르게 포착되었다. “장소가 좋은데, 갑자기 해가 들어가버린게 조금 아쉽네요.” 박찬욱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 쨍쨍하던 해가 눈 몇 번 깜빡한 사이 사라져버린 건 기이한 일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 속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무심한 얼굴로 낯선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손예진의 무드와 불현듯 스산해 보이는 풍경, 그리고 박찬욱은 서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9월 24일이면 <어쩔 수가없다>가 개봉한다. 한동안 기쁜 소식이라고는 드물었던 한국 영화계에 잔칫날처럼 반가운 기운을 몰고 온 영화다.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중산층 가장이 돌연 해고 통보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필사의 생존극. 영어 제목으로는 되겠다. 나와 내 가정이 몰락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한다지만, 정말 그 선택 말고 다른 길은 없었던 걸까? 박찬욱 감독이 만든 이 통렬한 블랙코미디는 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를 거치며 온도가 달아올랐고, 토론토에서 ‘국제 관객상’을 수상했다. 9월 17일에는 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한국에 처음 공개된다. 꿈꾼 것처럼 정신없이 롱 테이크의 나날을 보내고 서울에 돌아온 박찬욱이, 잠시 숨을 고른다.

<W Korea>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정말 기대돼요. 감독님에게 영화와 사진은 결정적으로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박찬욱 꾸미지 않는다는 점에서 달라요, 저의 사진은. 평소에 찍을 때는 조명이나 다른 무엇처럼 어떤 설치를 따로 하지 않아요. 거슬리는 물건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치운다거나 하지도 않고. 그저 순수한 발견이죠.
어떤 이미지들에 주로 끌리시나요?
아주 정확한 그 타이밍이라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 정확한 광선 상태로, 또는 내가 어떤 앵글에서 바라볼지 정확한 위치를 잡아서,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면 하찮을 수 있는 것들. 대부분의 시간을 하찮은 상태로 보내다가 어느 한 순간과 딱 만났을 때 흥미로워지거나 찬란해진달까, 그런 피사체가 있죠.
<아가씨> 때부터 영화 한 편 마치실 때마다 사진집을 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잖아요. <어쩔수가없다> 촬영 기간에도 많이 찍으셨어요?
많이 돌아다녔으니 여기저기서 열심히 찍긴 했어요. 강원도 인제에서 사진 찍다가 계엄령 떨어진 것도 생각나고. 그런데 이번에는 배우들을 많이 못 찍었어요. 그게 아쉬워요. 병헌이가 자꾸 말 시키고 그래서… 농담 걸고 그러니까 내가 사진을 못 찍었지.
바로 어제 입국하셔서 오늘 이 촬영장에 나오셨죠. 베니스에이어 토론토까지, 열흘 정도 나가 계셨나요?
열흘보다 더 오래 있었죠. 보름 정도 되나. 꿈꾼 것 같아요(웃음).
예전에 이병헌 씨도 같은 표현을 썼어요. 해외에서 <오징어 게임> 시즌 2 프로모션을 한바탕 소화한 후 곧바로 <어쩔수가없다>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내가 꿈을 꿨나’ 싶게 멍했다고.
병헌 배우가 <오징어 게임>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때문에 정말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더라고요. 밖에 돌아다니면 너무 많은 사람이 알아봐서 다니기가 어려웠어요. 한국 스타들은 멀리 해외에 나가면 조금은 자유롭게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낙일 텐데, 그곳에서도 상황이 다를 게 없었죠.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여러 반응을 접하고 체감하셨죠?
베니스영화제 같은 예술 영화 축제에 나가기에는 너무 상업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애초에 상에 대한 기대를 전혀 안 했어요. 안 했다가….
그랬다가….
리뷰들이 워낙 좋으니까, 슬그머니… 기대하게 되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그러했고.
그런 영화제 기간에 여러 평론가와 저널리스트들의 별점이나 크리틱이 공개되죠. 여론 경향과 수상 결과가 꼭 일치하는게 아니더라고요.
나도 심사를 해봤잖아요. 칸에서도, 베니스에서도. 해봐서 알아요. 많은 사람의 의견 같은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심사위원들은 그저 자기 나름대로 심사해요. ‘다수가 높이 평가한다’는 점이 심사하는 데 전혀 고려 대상이 안 돼요. 그게, 그렇게 돌아갑니다. 수상 여부는 심사위원 각자의 취향에 달린 문제죠.
국제영화제에 나간 한국 영화 소식이 국내에 타전될 때, 아무래도 긍정적인 말 위주로 기사 작성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베니스 프리미어 후 <어쩔수가없다>에 관한 크리틱을 찾아보면, 호의적인 감상평이 대부분이라 놀랐습니다.
네, 그랬죠. 제 영화 중에서도 이렇게 모든 매체와 비평가들이 한 목소리로 좋아해준 경우는 처음이에요. 그리고 프레스 스크리닝 때는 보통 건조한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그때도 분위기가 좋았다고 해요.

베니스영화제 기간, 기자들이 영화를 보는 그 자리에 ‘밀정’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밀정으로부터 상영 분위기에 대해 어떤 보고를 받으셨나요?
네, 밀정(웃음). 다들 웃음이 많이 터졌대요. 프레스 스크리닝이 두 번 있었는데, 두 번 다. ‘고추잠자리’신이라는 게 있어요. 조용필 씨의 노래가 흐르는 장면. 그 장면이 끝나고서는 박수 소리까지 나왔다고 해서 아주 흐뭇했어요. 베니스영화제는 그랬고, 토론토영화제는 워낙 근엄한 분위기와 거리가 먼 영화제예요. 팔짱 끼고 보는 느낌이 아니라 호응도가 높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관객이 많죠. 그렇다고 해서 상영 시간 동안 아무 때나 웃음이 터진 것도 아니었어요. 아주 정확하게, 제가 의도한 순간들에 바라던 반응이 나왔습니다.
내가 심어놓은 포인트를 관객이 알아봐준다는 것. 굉장한 쾌감이 있었겠네요.
영화를 만들 때 ‘이 장면이 나는 웃긴데, 관객들은 이런 부분에서까지 웃지는 않을 것 같다’ 싶은 미묘한 부분들이 좀 있었거든요. 그런 데서도 깨알 같은 반응이 나와주니 정말 행복했어요. 배우들이 베니스에서 하나둘 떠나고 토론토에는 저와 병헌 배우만 갔거든요. 토론토에서도 다 같이 영화를 봤으면 좋았을 텐데. 베니스와는 또 다른 그 분위기를 함께 경험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칸이나 베니스에서는 ‘거장의 영화를 보면서 함부로 웃어도 되나’ 하는 심리가 조금은 있다더군요.
뭐, 제가 거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베를린도 마찬가지고. 그런 영화제들의 갈라 스크리닝 때면 관객들이 턱시도와 이브닝 드레스 차림으로 오죠. 영화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의미로는 좋은데, 영화를 대하는 자세도 그 옷차림과 어느 정도 비슷한 셈이에요. 근엄한 분위기가 깔려 있죠.

<어쩔수가없다> 작업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감독님은 촬영 전에 워낙 철저히 준비해두시는 스타일이죠?
나는 준비를 많이 하는 편이죠. 그런데 ‘적당함’을 찾는 게 참 어려워요. 무슨 말이냐면, 스토리보드 작업을 해놓고서 막상 현장에서 그대로 잘 지키지 않고 자꾸 바꿀 경우, 스태프들이 스토리보드를 잘 안 들여다봅니다. ‘사전에 열심히 공부해봐야 결국 다 바뀌네’라는 인식이 생기면 점점 스토리보드를 멀리하게 되는 거죠. 때문에 되도록이면 스토리보드 그대로 찍는 게 제일 좋아요. 하지만 현장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기존 계획을 바꿔야겠죠. 바로 그게 어려운 지점이에요.
밑바탕 작업을 꼼꼼히 해두었으니 그대로 하나씩 실행해가면 되는데, 현장에서 발전적인 변화가 생길 경우 그에 따른 딜레마도 있다는 거군요.
그 어려움을 풀어갈 방법은… 앞으로는 현장에서 더 좋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스토리보드 작업 단계부터 더욱 더 철저하게 계획을 짜야 한다는 거예요. 현장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라는 것이 물론 좋을 때도 있지만, 스토리보드를 만들면서 심사숙고한 것보다 좋기는 어려워요.
<어쩔수가없다> 촬영 후반에 만난 이병헌 씨가 현장 분위기를 좀 들려준 적 있어요. 감독님과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면서 여러 시도를 해보는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다고 해요. 시나리오보다 풍성하게 만들어간 느낌이라고.
이번 현장에서는 제가 지금껏 해온 것에 비하면 무언가 꽤 바뀌었어요. 사전에 그렇게 깊이 생각한다고 했는데도, 배우들이, 특히 이병헌이 좋은 아이디어를 자주 냈죠. 나도 덩달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수다를 떨고. 그렇게 농담처럼 내놓은 아이디어로 막 웃다가, 약 3초 정도 지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잠깐. 안 될 이유가 있나?’ 베니스와 토론토에서 병헌 씨와 같이 인터뷰할 일이 많았는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옆에서 꼭 ‘감독님 그거 제 아이디어였잖아요’ 하고 짚어주더라고요.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라고….

2004년 <쓰리, 몬스터>가 베니스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 받았죠. 오랜만에 그 영화를 다시 봤더니, 이병헌 배우 입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게 있는 거란 말이야’ 하는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아, 그래요? 모르고 있었네요. 우리가 평소 워낙 잘 쓰는 표현이니까요. 일상이 아니라 어느 영화에서든 한 번쯤은 등장할 법한 표현이지 않아요? 영화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도 관객들이 얼마나 무심코 그 표현을 쓰는지 깨닫게 하고 싶어서였어요.
<어쩔수가없다>라는 영화의 존재를 안 이후, 그 말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올 때마다 흠칫합니다(웃음). 이 영화는 한마디로 무엇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하시겠어요?
한마디로 소개하긴 어렵네요. 세 가지가 중요해요. 우선,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런 어리석음에 관한 거죠. 또 하나는 ‘중산층의 욕망’. 만수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우리 가정’이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은 유지해야 한다’, ‘요 정도 전락하는 건 몰라도 그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 당장 굶어 죽을 처지도 아닌데, 더 이상 전락하기 싫고 어느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죠. 마지막은 역시 ‘고용 불안정’. 직업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예요.
알려진 줄거리상으로는 ‘고용 불안정’ 키워드가 부각되는 면이 있어요. 외신에서도 이 영화를 두고 ‘AI 시대에 잠식된 고용시장’이나 자본주의 시스템 문제에 비중을 두어 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죠. 하지만 그런 줄기로만 보는 건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감독님이 일타강사처럼 세 가지 키워드를 살짝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물론 이 이야기에서 실직은 아주 중요해요. 다만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저는 좀 더 많은 레이어를 만들려고 했어요. 방금 말한 것들이 그렇습니다.
원작 소설이나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보다 더 풍성한 레이어를 만들어내는 요소 중에는 ‘웃음’도 있겠습니다. 이번 영화로 관객을 많이 웃길 생각도 하셨죠. 웃음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밸런스 조절 문제로 고민이 되진 않았나요?
웃음 나오는 장면이 많아도 이 영화를 코미디라고 할 수는 없어요. 사실, 비극이죠. 그런데 뜻밖에도 그 비극의 여정 곳곳에 우스꽝스러운 순간이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결국 만수라는 사람이 ‘어쩔 수가 없다’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해나가는 일들이 참으로 어리석기 때문에, 그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웃음이 아닐까 해요. 웃음의 강도나 빈도보다는 ‘유발될 그 웃음이 냉소일까, 그럼 안 되는데’하는 고민이 제일 컸죠. 만수가 왜 저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관객은 그 이유를 아니까 그에 대한 연민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거든요. 그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 사람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동정만 하게 되는 상태도 아니고, 너무 멀리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자칫 냉소로 빠지지 않을 상태, 그 적당한 거리에서 연민을 가지고 웃게 되는 것. 그 점이 목표였죠.
저는 원작 소설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를 좀 읽었거든요. 책을 덮으면서, 이상하게도 <액스>와 전혀 다른 내용인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가 떠올랐어요. 사회적 체면, 허영심과 욕망, 그로 인한 아이러니가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날카로운 연상이네요. 긴 세월의 노력이 공허해지는 이야기잖아요. 그거예요, 바로.
이병헌 씨와 부부로 나오는 손예진 씨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를 갖고 시작하셨나요? 첫 작업이었잖아요.
미리 역에는 섬세한 표현력이 필요했어요. 만수의 경우 평범한 한국 남자라고 해도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배우가 여러 가지 연기를 할 수 있죠. 슬랩스틱 코미디를 해 보이는 순간도 있으니까. 만수의 선택은 결국 지켜야 할 가정이 있어서, 그리고 아내에게 잘하는 남편이 되고 싶어서 하는 것들이죠. 그러니까 만수가 하는 모든 행동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이 미리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드라마의 핵심에 있는 인물인데도 배우 입장에선 병헌 씨처럼 해 보일 게 별로 없었죠. 맞서 싸워야 할 적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격한 행동을 할 일이라고 해봐야, 뭐…. 하지만 미리의 속은 사랑과 의심과 용서 등등으로 격렬하게 들끓고 있어요. 결국 배우가 미세한 표정과 말의 뉘앙스 같은 것만으로 다 해내야 하는 거죠. 예진 씨가 그걸 한 거예요.
손예진의 재발견에 해당하는 작품 중 하나가 영화 <비밀은 없다>(2016)입니다. 박찬욱 감독님하고도 관계가 있는 영화죠. 그 영화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은 또 <어쩔수가없다>의 각본을 함께 쓰셨어요. 손예진 활용법이랄까, 배우에 대해 이경미 감독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누셨을 것 같아요.
제가 <비밀은 없다> 때는 각본에 약간 참여한 정도였죠. 이경미 감독과 물론 얘기해봤어요. 나한테 이런 조언을 해준 게 기억나네요. ‘예진 씨가 처음엔 자기 주장이 좀 강한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한번 감독을 믿기 시작하면, 한번 믿음을 주면, 그다음부터는 뭐든지 한다. 그런 배우다.’
이병헌이라는 배우에게서는 어떤 면을 가장 애정하나요? 이번 영화로 그와 20여 년 만에 다시 작업하셨죠.
음. ‘평범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공동경비구역 JSA>(2000) 때도 나는 이병헌의 평범함 때문에 캐스팅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외모도 그렇고, 인상이나 모든 게 평범한 사람 역을 했을 때 믿음이 가는 경우예요. 그런 역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소리죠. 그리고 표정의 가짓수가 많다는 점. 이번 영화를 하면서도 느꼈는데, 그 가짓수가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어떤 배우의 팔레트에는 빨, 노, 파 세 가지만 있다면, 이병헌의 팔레트에는 몇백 가지 색이 있어요. 감독은 거기서 마음껏 골라 쓸 수 있는 거죠. 물론 세 가지 색만 가지고도 걸작을 그릴 수 있겠지만, 제가 원하는 그림은 좀 더 복잡하고 뉘앙스가 풍부한 쪽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병헌은 뭐랄까, 쓸모가 있달까요. 허허.

영화에 7080 시절의 가요들이 삽입곡으로 쓰였습니다. 좋은 노래가 많아서 즐거운 갈등을 하셨을 것 같아요. 극의 정서와 맞다고 판단하신 곡들이 그 시대 가요였나요?
조용필과 김창완의 노래들이 나와요. 배따라기의 곡도 꽤 인상적으로 나오고요. 영화에 사용할 노래를 고를 때는 당연히 각 장면의 정서에 맞는 것으로 골라야 하는데, 조용필과 김창완의 곡을 꼭 쓰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긴 했어요. 두 분이 워낙 많은 곡을 남겼잖아요. 작정하고 고르면 어느 영화의 어떤 장면이든 들어맞는 곡을 하나쯤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감독님은 젊은 시절 조용필을 좋아한 것이 길티 플레저였다고요?
외할머니가 조용필 씨의 큰 팬이셨어요. 새 앨범이 나오면 외할머니와 같이 음악을 들었어요. 10대와 할머니가 같이 듣고 즐기는 가수라니, 조용필의 위대함이 바로 그런 데 있죠. 제가 고등학생 때는 맘 편히 좋아할 수 있었는데, 대학생이 되어서는…. 한국 현대사 중에서도 학생들이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던 시기가 그때거든요. 대학교에 늘 전투경찰이 상주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시절에 대중가요를 듣는다는 게 좀 그랬죠. 겉으로 드러내기가 어려웠어요.
외국인에게는 조용필과 김창완의 노래가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네요.
해외에서는 노래 가사가 자막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대사가 있는 장면에서는 좀 고민스러워서 선택적으로 하긴 했지만. 외국인 관객도 대충 어떤 분위기의 가사인지 알 수 있어요.
전작인 <헤어질 결심> 때도 그랬듯이, <어쩔수가없다>는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를 갖춘 전용관에서도 상영됩니다. 일반관과 다른 그 소리와 감상의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 없겠죠.
소리가 훨씬 섬세해요. 그런 특별관에서는 스피커 개수가 훨씬 많고, 스피커 위치도 여러 방향에 있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소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들리죠. 전문가가 아닌 보통의 관객이 그런 환경을 갖춘 상영관과 일반 상영관 양쪽에서 다 관람해봐도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예요. 영화 한 편의 퀄리티 자체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감독님에게 영화는 여전히 ‘극장에서 보는 것’이지요?
물론이죠. 시리즈를 만들 때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나름의 필요성이 있어서 만드는 거예요. 즐겁게 시리즈 작업을 하고 나서도 그걸 극장에서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나는 갑자기 슬퍼져요. 특히 나를 진짜 무너뜨렸던 경험은… 런던 영화제에서 <리틀 드러머 걸>의 초반 두 에피소드를 틀었던 적이 있어요. 색 보정 작업을, TV 드라마라는 이유로 영화 만들 때처럼 큰 스크린으로 확인하면서 하질 못했죠. 그래서 좀 걱정되는 마음으로 보러 갔는데, 극장에서 틀어도 화면이 똑같이 좋더라고요.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보람이 있었죠. 그러다 문득 너무나 서글퍼졌어요. ‘지금 이 기회가 아니면 아무도 이걸 극장에서 못 보는구나’ 싶어서.
2019년에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을 국내 극장에서 상영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그 이벤트를 최대한 많이 했어요. 6개 에피소드 전편 상영회를, 하여간 힘닿는 대로 기회를 만들어서. 두 번의 휴식 시간을 주고 6시간 내리 상영하는데, 저는 상영할 때마다 가서 봤어요. 정말. 그 시간 내내 앉아서, 허허. 내가 만든 작품 중에 제일 많이 본 것 같아. 그래봤자 그때 이벤트로 본 관객이 총 1만 명도 채 안 되지 않을까요. 관객이 각자의 집에서, 제대로 튜닝되지 않은 모니터와 그 작은 화면으로, 당연히 극장에 비하면 음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본다는 게 슬퍼요.
<어쩔수가없다>는 ‘15세 이상 관람가’ 작품입니다. 모처럼 관객의 밀도가 높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8월부터 해외에서 전해져온 소식만 들린 이 영화가 곧 개봉하는데,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남기고 싶으세요?
제 영화에 슈퍼히어로가 나온다거나 화려한 액션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극장에서 보면 좋은 미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와 색깔을 아주 공들여 조율한 작품이기 때문에 집에서 감상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을 극장에서 맛볼 수 있어요. 어디서 영화를 보든 영화의 시간은 같잖아요. 극장에서는 같은 시간 동안 훨씬 더 큰 가치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시나리오가 쓰여질 때, 공간과 미술이 이야기에 맞춰 안착할 때, 스토리보드가 배우의 연기로 살아날 때, 음악이 장면의 정서를 풍성하게 끌어올릴 때, 감독이 화면을 보고 또 보고 수정을 거듭할 때… 그 모든 순간을 거쳐 극장의 불이 꺼지면, 기적과 같은 영화 한 편이 시작된다. 박찬욱의 어쩔 수 없는 집요함과 성실함이 또 하나의 기적을 낳았다.
“제 영화에 슈퍼히어로나 화려한 액션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극장에서 보면 좋은 미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쩔수가없다>는 소리와 색깔을 아주 공들여 조율한 작품이기 때문에 집에서 감상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을 극장에서 맛볼 수 있어요.”
단 하나의 장면, 단 한 줄의 대사만으로도 그해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더블유> Vol.10은 그들을 위한 빛나는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올해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Best Performances’ 프로젝트. 고현정, 김우빈, 박찬욱과 손예진, 소지섭, 송중기, 임윤아, 주지훈, 한지민. 그 이름을 되새기는 건 지금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도달한 감정의 깊이와 밀도를, 작품의 성취를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제 그들의 독자적인 순간이 찬란하게 펼쳐집니다.
- 포토그래퍼
- 박찬욱, 안주영
- 스타일리스트
- 최아름(손예진)
- 헤어
- 차세인(손예진), 장해인(박찬욱)
- 메이크업
- 무진(손예진), 장해인(박찬욱)
- 로케이션 매니저
- 김태형
- 로케이션
- 이회영 기념관
- 어시스턴트
- 박예니, 나혜선, 김수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