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이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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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아름다움과 추함, 환희와 절망까지, 이하이는 사랑의 다양한 모양을 수집하는 사람이 되어 정규 앨범 <4 Only>를 완성했다. 과거 가시 많은 장미라 말했던 이하이는 이제 ‘너’만을 위해 모든 걸 내어주는 노래를 부른다. 

검정 드레스는 산쿠안즈 by 아데쿠베 제품.

오늘 촬영한 당신의 사진을 보며 스태프 가 말하더라. 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떠오른다고.

어휴, 참(웃음). 전부 내 편들이라 그렇다. 늘 좋은 말만 해준다.

그 말을 듣고 당신의 눈을 보는데 정말 말을 걸어오는 것 같더라. 보통 배우들 눈이 그러한데.

희한하게 주변에서 연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들 한다. 실제 뮤지컬 출연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까진 영 부끄럽다.

며칠 전 공개된 ‘구원자’ 뮤직비디오에선 꼭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같던데?

하하. 감독님이 잘 편집해주신 덕분이다. 음산하고 싸한 느낌을 내고 싶었는데 감독님이 좋은 스토리를 짜주셨다. 이유 모르게 자꾸 코피를 흘리는 여자가 있고,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고 치유해주는 남자가 등장하는. 원래는 내가 본 어떤 영화를 오마주하려고 했다.

어떤 영화인가?

히스 레저가 출연한 영화 <캔디>. 중독을 다루는 영화인데 ‘구원자’ 작업을 하며 내내 떠올린 생각이 ‘사람에 대한 중독’이었다. 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치 그가 나를 구원해줄 것 같아서 점점 그에게 중독되지만 실상은….

파멸?

그렇지. 결국 내가 망가지게 된다. 자립심을 잃고. 노래에 이런 가사도 나온다. ‘내 인생을 망칠 구원자.’ 영화 <아가씨> 대사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패딩 브라톱과 미니스커트, 털부츠는 모두 미우미우, 두건으로 활용한 스카프는 에트로 제품.

9월 정규 3집 <4 Only>가 발매됐다. 2016년 <Seoulite> 이후 5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가 있나?

2집 <Seoulite>가 너무 좋았다. 좋은 프로듀서에, 좋은 아트워크로 완성된 앨범이었다. 그걸 하고 나니까 다음 앨범을 만드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사실 이전에도 준비한 앨범이 몇 장 있었는데 전부 엎어졌다. 생각보다 완성도가 좋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됐고, 또 그사이 회사를 옮겼고. 회사를 옮겨서는 빨리 앨범을 내고 싶었다. 그렇게 작년부터 준비해서 딱 1년 걸린 것 같다.

당신 말처럼 회사를 옮기고 내는 첫 앨범이라 부담도 있었겠다. 신인은 아니지만 어쨌든 ‘출사표’란 느낌은 있으니까.

부담 컸지. 처음엔 진짜 패닉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곡은 너무 많은데 정리가 안 됐다. 작곡가들한테 너무 미안했다. 쓸 거다, 안 쓸 거다 말해줘야 하는데 내가 결정을 못 내리고 모든 곡을 붙잡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번 앨범은 어디 하나 내 손이 닿지 않은 데가 없다.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부터 캐스팅, 색감, 콘셉트, 티징까지. 내가 전부 컨펌했다. 믹스를 직접 해본 것도 처음이고. 앨범을 마무리하면서 느꼈다. 아, 실은 이렇게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할 일이 많았구나.

아무래도 이전 회사에선 전문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보니?

거의 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나는 노래하고 공연하는 가수였지. 가끔가다 자작곡 한 곡 정도 작업하고. 그리고 몸 열심히 만들어서 뮤직비디오 찍고(웃음). 이렇게까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스스로 한 건 이번 앨범이 처음인 것 같다.

처음이니까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도 작용했을 것 같다.

그건 작년 싱글 ‘홀로’ 때가 정말 심했다. 이를 악물고 했다. 그때는 작업하느라 하루에 한 끼도 못 먹은 날이 많았다. 사람들한테는 ‘이제 마음 내려놓고 하려고요’ 하면서 회사를 옮겼는데 그게 너무 안 됐던 거지.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왔는데 ‘혼자 하니까 부족하네’ 소리를 듣게 된다면 내 자존심에….

금이 가지.

그렇지. 그래서 엄청 욕심을 냈다. 사실 ‘홀로’ 말고 이전에 쓴 곡이 있었다. 코로나19 직전 다녀온 여행 때 만든 곡이다. 혼자 한 달 정도 LA에 머물렀거든. 완전 잠적해 있었다. 그야말로 연락 두절 상태(웃음). 사실 그때가 FA 기간이라 여러 곳에서 온 계약서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LA는 어쩌다 그렇게 훌쩍 갔나?

이전 회사에 있었을 때 송캠프를 하러 자주 LA에 갔다. 전 회사에서 나한테 준 좋은 경험 중 하나다. 정말 유명한 프로듀서들을 만나 함께 곡 작업을 하고 이곳저곳 구경도 하면서 2주를 보낸다. 그때 기억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번엔 직접 숙소도 예약하고 마일리지 쌓인 것 끌어모아 비행기표를 직접 끊어서 떠났다.

그곳에서는 어떤 시간을 보냈나?

막상 갔는데 할 게 너무 없더라고(웃음). 게다가 추수감사절이 겹쳐서 숙소에 머문 시간이 길었다. 다행히 SNS에 LA 사진을 올리니까 현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이 많이 왔다. 그렇게 채린(씨엘) 언니도 만났고, 데뷔곡 ‘1,2,3,4’의 프로듀서였던 리디아 백 언니도 만났다. 리디아 백 언니네 가서는 젠더 리빌 파티애도 참석했다. 미국에선 부부가 출산을 앞두고 아기의 성별을 공개하고 축하하는 파티를 여니까. 거기 가서 ‘짝짝’ 박수 치는 날도 있었다(웃음).

뭘 많이 했네(웃음).

재미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한국에 들어왔더니 지금 회사의 대표인 DJ 펌킨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하이 씨, 우리 당연히 함께하기로 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 우리 약속하지 않았냐’며(웃음). 이전까지 대표님과 연락을 나눌 땐 내가 정말 예의 바르게 대했는데 갑자기 한 달 동안 연락이 두절되니까. 서울에 오자마자 대표님이 직접 나를 찾아오셨다. 그때 내 마음이 완전히 간 것 같다. 그 모습에. 대표님은 모르시겠지만. ‘아, 진짜 나를 필요로 하시는구나.’ 나를 간절히 원하는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 같다.

아까 대화 중에 스쳐 지나갔지만 LA에서 ‘홀로’ 대신 썼다는 곡도 궁금하다.

아, 그 곡.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듣는데 너무 별로인 거다(웃음). 그래서 예전부터 함께 곡 작업을 해왔고 ‘홀로’, ‘For You’를 작곡한 바버렛츠의 리더 (안)신애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거기가 완전 노다지였지. 이번 앨범에도 신애 언니가 세 곡에나 참여했다.

공들여 완성한 앨범엔 몇 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나?

70점?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참여한 앨범이다. 스타일리스트와 밤을 새워가며 시안을 만들었을 정도니까. 지금 회사가 약간 미국 레이블 같다고도 느껴진다. 가수가 직접 모든 것을 하는 구조다. 누군가 ‘왜 앨범이 안 나와요?’ 물었을 때 회사 탓을 할 수 없다. 부지런해야 앨범을 낼 수 있다. 그래서 뿌듯한 게 확실히 크다. 이전엔 큰 회사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 일이라도 여러 명이 분담해서 처리했다. 여기선 네댓 명이 30~40명이 달라붙어 처리할 일을 한다. 스태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배웠다.

검정 바 재킷과 안에 입은 셔츠는 디올, 팬츠는 문스워드 제품.

3집 <4 Only>는 사랑의 다양한 모양을 담은 앨범이라 들었다. 작업하며 가장 많이 떠올린 사랑의 단상은 무엇이었나?

‘내 사랑과 너의 사랑은 다르다.’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남의 사랑을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고, 내 사랑도 남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사랑에는 좋고 나쁘고가 없는 거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사랑이든 무엇이든 쉽게 판단하려 들지.

그렇지. 사실 사람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만나 뭔가를 채우려는 마음으로 사랑을 하는 건데. 사랑을 할 땐 자꾸 실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실수를 남이 단면만 보고 절대 판단할 수 없고. 그래서 사랑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마 앨범에 수록된 10곡을 전부 듣고 나면 마치 각기 다른 10명의 사람을 만나 쓴 곡 같다고 느낄 수도 있을 거다.

앨범을 들은 누군가 이럴 수도 있겠다. ‘이하이 대체 몇 명이나 사귄 거야?’(웃음)

정말 그럴 정도로! 아니면 ‘다중인격 아니야?’ 하겠지(웃음). 그런데 나는 한 사람과 정말 제대로 연애하면 온갖 감정을 다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고, 슬프고, 화나고, 질투하고, 추악한 것까지 전부 사랑이니까.

리본 장식은 크리스토퍼 케인, 데님 팬츠는 큐리티 제품.

앨범에서 ‘이런 기묘한 사랑도 있다’를 말하는 곡이 있나?

기묘하다기보다 지금 아니면 부를 수 없는 사랑 노래다 싶은 곡이 있다. ‘그대의 의도’라는 곡이다. 가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왜 어린 여자를 자꾸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왜 나에게 이것저것 해라 말하는지 모르겠다.’(웃음)

통쾌하다.

통쾌한데, 그러면서도 찌질하다. 그저 네가 나를 좋아해주길 원하는데 왜 나를 이런 모습으로, 저런 상황으로 맞춰 가려 하냐는 이야기를 툭 터놓고 하는 노래다. 어떻게 보면 상대방의 조건 없는 사랑을 원하는 거지.

문득 사랑에 빠진 이하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내가 은근히 순정파다(웃음). 그러다가 일순 돌변해 차가워질 때도 있지만. 약간 모 아니면 도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인데. 사랑에 있어 맺고 끊는 게 칼 같은 사람.

때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너무 좋으면 상대에게 내 마음을 다 준다. 그런 때만큼은 순정파다. 원래는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때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좀 더 진실한 사랑 노래를 쓸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대로 내 마음이 훤히 보일 때도 있다. ‘내가 이 사람에게 태울 마음이 더 남아 있나?’ 돌아보면서 아니다 생각이 들면 ‘마음이 식었다’라고 아주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때도 있다.

사랑하는 상대에겐 나의 전부를 꺼내 보여주는 편인가?

이건 나의 습관인 것 같은데, 자꾸 나를 숨기려 한다. 나를 드러내는 게 잘 안 된다. 진짜 나를 꺼내면 상대가 도망갈 것 같아서. 실은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애써 무던해 보이는 척한다. 눈에 띄지 않도록 평범해 보이는 척한다.

여태 척한 거였다면 성공이다. 오늘 촬영하는 동안에도 아주 무던해 보였다(웃음).

하하. 그런 얘기를 정말 많이 듣는다. 이번에 앨범을 같이 작업한 프로듀서 피제이 오빠도 늘 말한다. 너는 심지어 무던해 보이는 연기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웃음). 가끔 그 무던함이 너무 무던해서 특이해 보인다고. 감정 변화 없이 하루를 무던하게 잘 보내면 ‘아, 좀 뿌듯하다’ 이런 게 있다. 잘 해냈다 오늘도, 싶은 거지.

하지만 속에선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거지.

맞다. 내가 ‘업다운’이 심하다. 중간이 없다. 하루에도 마음이 수십 번 바뀐다. 기분이 좋다가도 갑자기 나빠지고. 그걸 옆에서 본 사람은 ‘도라이 아니야?’ 생각할 거다(웃음).

검정 맥시 드레스는 산쿠안즈 by 아데쿠베, 검정 워커는 미우미우 제품.

2013년 첫 앨범 <First Love>도 사랑을 주제로 한 앨범이었다. 그때 말했던 사랑과 <4 Only>를 통해 말하려는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First Love>는 정말 풋풋한 사랑을 말하는 앨범이었다. ‘사랑에 빠진 나를 왜 이상하게 보지?’, ‘그냥 지켜만 보아도 좋아요’를 말하는 소녀였달까. 그런데 지금은 너만을 위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자’에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그냥 달이 뜨면 둘만의 궁전으로 떠날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대변하는 가사 같다.

2013년 노래 ‘Rose’에서 당신은 스스로 가시 많은 장미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2021년의 이하이는 어떤 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수국. 수국은 꽃말이 정말 많다. 변덕, 순정, 냉정 등등. 심지어 같은 수국이라도 색깔마다 꽃말이 다르다. 어쩌면 내게도 수국 같은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확실히 지금은 장미가 아닌가?

장미도 내 안에 있지. 그런데 과거엔 빨간 장미 같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뭘 잘 모르는데 장미가 너무 매혹적이니까 장미이고 싶은 사람이었달까. 그런데 지금은 어느 정도 내가 장미 같은 사람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한다. 너무 신기한 사람이라고, 특이한 사람이라고, 친해지고 싶다고. 실제로 겪어보니 너무 좋은 사람이더라, 아니면 걔 너무 차갑고 별로더라고 말한다. 어떤 말이든 내가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나오는 얘기이지 않을까? 내면에 상처가 많아 자꾸 숨지만 겉으로 봤을 땐 활짝 예쁘게 핀 꽃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도 내게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장미가 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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