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 명멸하는 별들을 보며 우리는 평행 우주로 나아가고, 굽이진 스케이트파크 위 보더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타났다를반 복한다. 3년 만의 국내 개인전 <2O2O>로 한국을 찾은 구정아는 그렇게 우리를 지금 발붙이고 있는 현실 너머 ‘경계 없음’의 자장으로, 기묘하고도 위험한 세계로 초대한다.
자연광이 충만하게 들이치는 전시장에 백지처럼 새하얀 캔버스가 여러 점 걸려 있다. 그림에 다가가려고 발걸음을 옮기자 전시장은 일순 암전된다. 물음표를 띄운 채 떠 있던 눈은 갑작스러운 어둠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캔버스에서 발하는 형광 초록빛 별들과 조우하게 된다. 오는 11월 28일까지 PKM 갤러리에 전시되는 미술가 구정아의 회화 작품 ‘Seven Stars’(2020)가 마침내 맨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전시장 조명이 내뿜는 빛을 흡수했다가 암전 상황에서 이를 다시 방출하는 인광(燐光) 안료를 흩뿌려 완성한 ‘Seven Stars’는 전시장에 발을 들인 관객에게 짐짓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어둠 속에서만 지각되는 별들은 가시적이라 할 수 있나, 비가시적이라 할 수 있나? 혹은 서로 다른 조명 조건에서 상호적으로 존재하는 별들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며, 있지만 동시에 없는 것은 아닐까?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 뉴욕 디아 비콘,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일찍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아온 구정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그저 평범한 것은 없다(Nothing is merely ordinary)’는 태도 아래 나프탈렌, 아스피린, 자석 등과 같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사물을 재료로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풍부하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작업을 펼쳐왔다.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두 가지 양상으로 존재하는 별을 통해 시공을 달리하는 ‘같지만 다른’ 세계인 평행 우주를 환기시키는 ‘Seven Stars’, 온통 분홍색으로 뒤덮은 전시장 바닥으로부터 과잉적으로 번진 분홍빛이 벽면의 드로잉 작품에 침투하며 ‘무경계’의 풍경을 펼쳐 보인 공간 설치 작품 ‘닥터 포크트’(2010), 1998년 작가가 고안한 새로운 조어이자 ‘장소 아닌 장소, 세계 아닌 세계, 사람 아닌 사람’으로 치환되는 변형체 ‘우스(Ousss)’에서 파생해 구현한 3D 애니메이션 ‘미스테리우스’(2017)와 ‘큐리우사(2017)’ 등. 구정아는 빛과 어둠, 내부와 외부, 현실과 가상 등 서로 상반되고 평행하는 요소를 양립시키거나 그 경계 너머의 열린 가능성을 넌지시 제시하고 이를 관람객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지각하며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렇기에 ‘경계 없음’의 자장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구정아의 작품은 때로 기묘한 세계로 가는 통로이자 위험한 초대장으로 다가온다.
PKM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전시 <2O2O>는 2017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전시<구정아: 아정구> 이후 3년 만에 개최하는 국내 개인전이다. 회화, 드로잉, 조각 30점과 더불어 2012년 프랑스 바시비에르섬에서 지역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첫선을 보인 이후 2015년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 2016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2019년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전시하며 구정아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은 스케이트파크 조각 작품 ‘resonance’(2020)를 공개한다. 두 개의 크고 작은 요람 형태로 디자인한 스케이트파크는 갤러리 야외 정원에 설치되며, 실제 스케이트 보딩을 즐길 수 있도록 보더들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이 밖에 거주자의 요구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개방형 건축을 모색한 건축가 세드릭 프라이스를 향한 오랜 관심을 바탕으로 제작한 마그넷 조각 ‘88’ ‘518’ ‘625’ ‘911’ (2020)도 관객을 반긴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어느 가을날, 생기 넘치는 초록빛을 내뿜는 잔디밭 위에 불시착한 UFO처럼 초현실적으로 자리하고 있던 스케이트파크 앞에서 작가 구정아를 만났다.
2017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구정아: 아정구> 이후 3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9월 초 입국해 14일의 자가 격리 기간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보통 자가 격리를 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를 굉장히 끔찍한 시간으로 묘사하더라. 당신은 어땠나?
구정아 오히려 값진 시간이었다. 내년에 미국, 덴마크, 프랑스에서 순차적으로 대규모 야외 커미션 작품을 공개할 예정이라 격리 기간 동안 온전히 집중하면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실제 호텔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 아를에서 오프라인으로 진행하기로 했던 프레젠테이션은 온라인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대체해서 열기도 했다. 요새는 정부나 기업과 협업하는 경우가 잦은데, 협업에 앞서 서로 주고받는 동의서 분량만 30~50페이지에 달한다. 격리 기간 내내 그걸 읽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당신의 개인전 소식이 알려지자 전시 개막 전부터 국내 미술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3년 만이기도 했고,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다 국내에서 모처럼 개인전을 갖다 보니 특별히 의식한 것이 있었나? 한국은 어쨌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라 이곳을 더 잘 아는 것은 맞지만, 한 작가로서 작품을 전시한다는 점은 어딜 가나 똑같다. 국내라고 해서 특별히 ‘이 작업은 한국에 더 맞을 거야’처럼 로지컬하게 생각하면서 전시를 준비한 적은 여태 없었다. 전시를 기획하면 몸을 움직여 내가 직접 가야 하는 때가 있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다. 그럴 땐 단순히 땅에 발을 붙이고 생각한다. 전시가 열리는 도시까지 비행시간은 얼마나 되나, 그곳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긍정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나.
전시 <2O2O>의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기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게 있었다. 3년 전에 비해 당신이 작품을 설명하는 데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한 것 같달까? 작품을 말할 때면 유독 말을 아끼는 당신을 보며 우스갯소리로 ‘신비주의’라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소한 일이 쌓이고 점점 얘기가 번지면서 ‘이 작가는 이렇다더라’ 하는 얘기가 나오는 걸 텐데… 딱히 3년 사이 심적으로 특별한 변화가 있어서 적극적으로 나선 건 아니다. 다만 예전까지는 한 개인으로서 작업했지만 요새는 건축가, 과학자, 큐레이터 등과 함께 작품을 준비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 막상 전시회를 열면 결국 나 한 명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지 않나. 그때 내가 입을 다물어버리면 함께 협업한 사람들이 그림자 안에 갇힌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은 것 같다. 또 시대가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오해가 없어야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요샌 작품을 말할 때 이전보다는 쉽게 풀어서 얘기한다. 작가들, 특히 나 같은 사람들은 전 세계를 돌며 이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턱없이 적다. 그러다 보니 시간적으로 ‘횡포’가 심해진 거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를 땐 앞만 보고 가기 때문에 ‘이건 안 된다’, ‘저건 못한다’는 의사가 짧은 시간에 너무나 확실하게 결정된다. 그런 게 쌓이면서 작가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는 것이고. 다만 록다운 시기가 찾아온 덕에 예술 문화를 다각도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진 것 같다. 여태까지를 정리해 다시 ‘엮어가는’ 시간을 가졌다고 할까.
앞서 말했듯 내년 미국, 덴마크, 프랑스에서 대규모 야외 커미션 작품이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최근 들어 공공 설치물 중심으로 작업이 확장된 듯한 인상이 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예술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다방면으로 사회 곳곳에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글 쓰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금융, 부동산 사업을 하는 사람까지. 더욱이 요샌 정부나 기업이 작가와 손잡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가 빈번하지 않나. 지난 세월 동안 그런 사람들을 미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거의 매일 만나온 셈이다. 소규모든 대규모든 모임을 가지면 단순히 밥만 먹거나 차만 마시고 헤어지는 게 아니다. 서로 둘러앉아서 우리가 앞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어떻고, 우리의 과거는 어땠으며, 지금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과정이 축적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들의 생각을 흡수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영향력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만나면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차츰 들었달까. 정치적, 경제적 힘뿐만 아니라 ‘생각’에도 어떤 ‘힘’이 있기 마련이니까.
주로 전 세계 대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여러 분야의 사람과 교류할 일이 많았을 것 같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는 과정이 처음부터 쉽지만은 않았을 듯하다. 처음 한국에서 해외로 나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땐 막연히 혼자 조용히 작업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지금처럼 30페이지가 넘는 동의서를 매일같이 교정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웃음). 어렸을 땐 어떤 모임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면 ‘가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쩌면 작가가 기업, 나아가 정부 기관에 들어가 일하는 것에서 어떤 가능성을 많이 엿본 것 같다. 국내 사정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알바니아의 경우 벌써 10~15년 전에 작가 출신의 정치인이 국가 회의에 참석하고 정책을 결정했다. 재미있는 건, 틀에 맞는 얘기만 주로 하는 공무원들과 둘러앉아 회의를 하다가도 갤러리에서 자신의 드로잉 전시를 열기도 한다는 거다.
전시 <2O2O>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까 한다. 우선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야외 정원에 자리한 스케이트파크다. 2012년 프랑스 바시비에르섬에 자리한 아트센터에서 첫선을 보인 조각 작품인데, 당시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품을 구상했다고 들었다. 스케이트파크라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당시 바시비에르섬은 프랑스 도심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고 대부분의 지역이 그린벨트로 묶여 젊은 세대가 떠난 탓에 경제적으로 굉장히 낙후한 곳이었다. 이곳으로 젊은 세대가 다시 모일 만한 프로젝트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며 시작한 게 스케이트파크다. 당시만 해도 바시비에르섬에 대형 야외 조각 작품을 설치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2012년 작품이 완공되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는데 안전 문제 등으로 건축을 시공하던 도중에 제재가 들어오기도 하고 진행 과정이 아주 지난했다. 정부는 당시 프로젝트에 아주 적극적이었다기보단 다른 일로 바빴는데 그때 당시 나는 ‘절박한’ 작가였고, 그래서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작품을 전시하는 아트센터는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의 유작인데 그 주변으로 아주 너른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당시 아트센터의 디렉터는 정원을 활용할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다만 어딘가에서 조각 작품을 10~20년씩 대여해 와 버섯 심듯 잔디밭에 듬성듬성 놓고 조각 공원 형태로 안일하게 꾸미는 것만큼은 피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거의 절망감에 가득 찬 상태에서 나를 불렀다. 나를 통해 어떻게 하면 정원을 의미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지 고심했을 거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가 어떻게 발전했나? 당시 바시비에르섬에 위치한 학교는 커리큘럼상 학생들에게 미술관 견학을 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미술 견학 현장을 보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미술관에서 억지로 관람하는 학생이 많았던 거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미술관에 와서 피곤해하지 않고, 미술관이 일상에서 ‘이탈’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며 프로젝트에 접근했다. 훗날 아이들이 돌이켰을 때 학교 생활이 꼭 지루하지만은 않았다고 기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또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만난 공무원, 건축사무소 직원 가운데 어릴 때 스케이트보드를 탔던 사람이 많았다. 1970~80년대의 공원 기록을 보면 아이들이 자기끼리 시멘트에 물을 섞어서 구조물을 만들거나 겨울에 수영장이 비면 거기서 보드를 타는 일이 많았다. 이런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되면서 스케이트파크를 통해 하나의 공간을 만들면 거기서 사람들이 만나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 개인전에서 공개한 신작 스케이트파크는 지상에 설치한 ‘오버그라운드’ 형태지만, 2012년 당시만 해도 땅을 파서 만든 ‘언더그라운드’ 형태이지 않았나. 개인적으로는 언더그라운드 형태였을 때가 뭐랄까, 작품이 수평선을 깨트리지 않으면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없는 듯 기묘하게 보였다. 바시비에르섬에서 스케이트파크 프로젝트를 하던 당시에 이런 얘기도 들었다. 알도 로시가 지은 아트센터가 완공됐을 당시 ‘이건 도저히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건물이다’라며 건축을 보이콧한 정원사들이 많았다고. 그러다 프랑스 정원사 질 클레망이 정원 디자인을 맡았는데, 초창기엔 건물을 가리고자 높이 2m나 되는 갈대를 정원에 심어 멀리서 보면 마치 건물이 보이지 않는 듯한 디자인을 제안했다고도 들었다(웃음). 결국엔 나무를 정돈하고 잔디를 깎는 방향으로 디자인됐는데, 거기에 내가 대단히 큰 걸 세워 경관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어딜 가면 공공미술 작품이 눈에 확 띌 만큼 크게 들어서 있지 않나. 정말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작품도 많지만 개중엔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스케이트파크는 명확히 ‘유저’가 있는 작품이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닌 이용하는 설치물인 셈인데, 유저들에게 작품을 ‘푸시’하지 않고 우연히 발견해내는 기쁨을 주고 싶었다.
이후 스케이트파크를 비엔날레 전시를 통해 여러 차례 선보였는데, 그때마다 실제 보더들이 다양한 의견을 담아 당신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들었다. 갤러리에서 보낸 딱딱한 메일 사이에서 보더들이 보내온 메일을 발견했을 때 작가로서 참 흥미로웠을 것 같다. 실제로 정말 많은 메일이 왔다. 특히 2016년 브라질에서 열린 상파울루 비엔날레 당시가 기억에 남는다. 상파울루는 예부터 스케이트보드를 많이 타는 도시로 유명하고, 스타 보더도 많이 배출했지만 정작 50년 가까이 도시에서 제대로 된 스케이트파크를 제공해준 적이 없었다. 원래는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만 일시적으로 스케이트파크를 설치하고 행사 종료와 함께 철거할 예정이었는데, 그때 보더들 사이에서 철거 반대 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보더들이 내 웹사이트에 적힌 메일 주소를 보고 나에게도 철거 반대 서명을 해서 도와 달라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스케이트 파크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유저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진행한 기억이 유독 많다. 2015년 리버풀 비엔날레 당시에도 스케이트파크가 들어설 지역의 아이들과 여러 차례 만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라인만큼은 스케이트파크에 꼭 들어가야 한다’며 내 앞에서 직접 보드를 타며 시연을 보인 아이들도 참 많았다(웃음).
스케이트파크를 비롯해 실내 전시장에 걸린 회화 작품 ‘Seven Stars’ 등 이번 전시에서 많은 작품이 인광 안료를 사용해 구현됐다. 인광 안료에 대한 당신의 오랜 관심은 어디서 출발했나? 처음 바시비에르섬에 도착했을 때 밤에 차를 타고 달리다가 전조등을 꺼본 적이 있다. 그때 받은 첫인상은 앞이 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시가 굉장히 ‘어둡다’는 거였다. 지역 대부분이 그린 벨트로 묶여 있어서 대중교통도, 심지어 거리에 제대로 된 가로등조차 없었다. 그래서 인광 안료로 스케이트파크를 칠하며 불빛을 ‘안치’하고 싶었던 거다. 당시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별이 어떻게 생성되고 마침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별의 생성 과정을 보면 중력에 의해 수축하려는 힘과 가스압에 의해 팽창하려는 힘이 끊임없이 충돌하다가 어느 순간 빛이 나기 시작한다. 사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하지만 장차 그 세포가 분열해 사람이 되고 어떤 지식들을 축적하며 빛이 나지 않나. 달리 말하자면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꾸어놓는 순간이 있다. 또 아시아에선 예부터 사람이 죽어 몸에서 혼이 나갈 때 빛을 발한다는 자연적 현상이 전해지고, 그 밝음을 염한다는 뜻으로 노자는 ‘습명(襲明)’을 말하지 않았나. 말 그대로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염하는 게 아니라 밝음을 염한다는 거다. 어쩌면 인광 안료는 이러한 생각을 작품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말했듯 별이 생성되는 과정을 보면 중력과 가스압이라는 두 평행하는 힘이 충돌하고 지속되다 빛을 발하지 않나. 나아가 지난 작업 여정을 살피면 빛과 어둠, 내부와 외부, 현실과 가상 등 서로 상반되고 평행하는 요소가 양립하고 있는 상황이 빈번했는데, 이러한 주제에 오래 천착해온 이유가 있나? 2012년 설치한 스케이트파크 같은 경우만 봐도 다양한 종류의 원이 한데 있는 형태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긍정적인 원도, 부정적인 원도 있고 더불어 반구 형태의 터널도 있어 관객이 터널의 큰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작은 공간으로 빠져나오기도 한다. 말하자면 ‘다양성’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다. 사실 하루도 밤과 낮이라는 두 극단적인 명암과 시간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새벽녘 여명도 있고 어스름해질 때의 황혼도 있지 않나. 지금 한국이 밤이면 유럽은 낮이기도 하고. 어둠과 밝음만 하더라도 실은 굉장한 다양성이 있는 거다.
이번 전시에선 당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보여온 재료인 자석을 사용한 작품 ‘88’ ‘518’ ‘625’ ‘911’ 네 점도 만날 수 있었다. 작품 제목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짜들이어서인지 이를 두고 뜨거운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 같다. 자석 작업은 총 50~60점 정도 있는데 워낙 크다 보니 실제 전시할 기회가 많진 않았다. 이번엔 크기를 좀 작게 해 의미를 더 축적해서 전달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88, 518, 625, 911이란 숫자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구성하는 자석 유닛의 개수이기도 하다. 이 자석 작업들은 88, 518, 625, 911이란 총량만 정해져 있을 뿐이지, 그 크기와 모양이 장소에 따라 자유롭게 각색될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작품을 구현할 때 마그넷 개수를 동일하게 하고 형태를 달리해 전시한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여전히 ‘핫 포인트’이지 않나.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역시 911 테러가 여전히 뜨거운 쟁점이다. 지금도 테러를 누가 기획했다느니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이런 역사적 사건을 방향을 달리하고 거리를 조정해 바라보면 굉장히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9월 초 한국에 들어와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참 부지런히 움직였다고 들었다. 올해 11월 8일까지 열리는 ‘2020 부산 비엔날레’에도 ‘Seven Stars’를 출품하면서 최근 부산에 잠시 다녀왔다고. 올해 부산 비엔날레는 문인과 미술가의 작품을 짝지어 전시하는 형태인데, 당신의 작품은 시인 김혜순의 시와 함께 부산시립미술관에 전시됐다. 두 사람의 만남이라니 상상이 잘 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혜순 시인은 유럽의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하다. 나도 영어로 번역된 그녀의 시집을 접하고 정말 막힘없이 쭉쭉 읽은 기억이 있다. 특히 ‘저녁메뉴’라는 시에서 굉장히 많은 영감을 받았다. 뭐랄까, 그녀의 시는 정말 사차원적이다. 조만간 런던으로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뵙고 가려고 전화번호도 받아놨다. 워낙 좋아하는 시인이라 올해 부산 비엔날레 총감독인 야콥 파브리시우스에게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 김혜순 시인과 협업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전부터 문학은 당신을 움직이는 촉매제 중의 하나이지 않았나 짐작한다. 특별히 문학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하나? 무엇보다 문학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콘크리트’하다. 시각예술이 미묘(Subtle)하다면 문학은 단도직입적이고 거칠다(Brutal)고 할까. 문학 작품을 읽다가 가끔 ‘이게 이렇게 전달될 수 있구나’ 싶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까 2012년 스케이트파크 작업 당시를 말하며 그때 당신은 ‘절박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어느덧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당신은 지금도 절박한 심정으로 작업대에 서고 작품을 하고 있나? 긴박하고 절박한 것은 늘 여전하다. 말하자면 작품을 할 때는 매시가 초주검에 가깝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하나도 힘들지 않다.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나? 하나도 안 힘들다. 어떤 큰 힘이 내 옆에 있는 것 같다.
최근 작품으로 들어오고 있는 주제가 있나? 그런 걸 미리 말할 순 없다(웃음).
그럼 좀 바꿔서 묻겠다(웃음). 과거 인터뷰에서 어스름이 질 때에 영감을 얻곤 한다고 말한 적 있다. 이건 지금도 유효한가? 유효하다. 그리고 좀 다른 얘기일 순 있지만… 예전엔 강박 관념이 많았는데 요새는 그런 게 하나도 없다. 과거에는 어떤 ‘분리’가 안 돼서 ‘이건 너무 어렵다’, ‘이건 절대로 못한다’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굉장히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요즘엔 정말 그냥 한다.
그런 변화를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사실 지금의 이런 상태는 아주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다. 계속 공부하고, 한 번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거다. 사실 99%가 실패이지 않나. 작가라고 뭐 별 다른 게 있겠나. 대통령처럼 딱 5년만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 어쩌면 그 이후에도 그저 계속할 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사람들, 그러니까 예술가, 글 쓰는 사람, 과학자를 위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공간이라면,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건가? 맞다. 어쩌면 내년 서울도시건축비엔날에서 그 아이디어를 공개할 수도 있겠다. 앞서 말한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음…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장소도 아주 적당한 것 같다. 넓고 조용하고 집중할 수 있으니까. 말하자면 정적인 공간, 그게 아주 중요한 요소다. (이날 구정아와 마치 텅 빈 전시장처럼 아무런 요소 없이 한가운데 6~8인용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인 카페에서 인터뷰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관객들이 어떻게 봤으면 하나? 산책하는 길에 기회가 있으면 전시장에 들러서 고요히 생각하고… 자기의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생각하는 기회였으면 좋겠다. 흔히 A점에서 B점으로 옮겨갈 때 어떤 경로를 통해 가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정해지지 않나. 그런 과정에 이 전시가 있었으면 좋겠다.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 포토그래퍼
- 최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