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는 화려할 수 있는 갖가지 방식으로 화려했던 과거를 지나 여유 있게 삶을 들여다보게 된 현재를 산다. 이제 미래 언제까지 엄정화라는 견고함이 유지될지, 그 자신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금해한다.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어떤 이야기 하는 걸 제일 좋아하나? ‘현재.’ 요즘은 열심히 영화 홍보를 하고 있다.
오랜만에 예능 프로(SBS <집사부일체>)에도 출연한 것 잘 봤다. 집과 정원이 참 예쁘다. 럭셔리하면서도 사람이 발붙이고 살고 있는 공기가 느껴졌다. 그런가? 친한 친구인 정재형도 비슷한 말을 자주 한다. 우리 집에 오면 따뜻하고 사람 사는 집 같아서 마음에 든다고.
8월에 코믹 액션물 <오케이 마담>이 개봉한다. 이야기의 주 배경은 비행기 안인데, 엄정화는 유명한 꽈배기 맛집 사장님으로 나온다고? 매일 새벽부터 일어나 바쁘게 사는 여자다. 컴퓨터 수리공인 남편(박성웅)과 알콩달콩 살다가 이벤트에 당첨 되어 처음으로 해외여행 길에 오르지. 반전이 많은 영화다.
예고편을 보니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긴박하게 전개되는 분위기도 난다. 보통 반전 영화를 볼 때는 그게 뭘지 골똘히 유추하면서 알아채는 데 집중하느라 오히려 재미없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우리 영화는 여러 번의 전환이 영화 곳곳에 있다. 관객 입장에서 완성본을 봤는데 재밌더라.
연기 활동으로는 5년 만의 작품이다.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나? < 오케이 마담>은 작년 상반기에 찍어놓은 작품이다. 2017년이 끝날 무렵 아주 오랜만에 앨범 <더 클라우드 드림 오브 더 나인>을 발표하면서 활동했고, 그다음 50부작 드라마를 하나 했다. 푹 쉬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끊임없이 일하던 과거에 비하면, 그 정도는 쉬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심심한 시간을 잘 견디는 타입인가? 심심하지가 않다. 일하지 않는 시간이 아까워서 동동거린 시절이 분명 있지만, 갑상선 수술을 하면서 심경의 변화가 많았다. 수술한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됐네. 그즈음부터 시작해 최근에야 비로소 여유 있는 시간을 제대로 즐길 줄 알게 된 기분이다.
엄정화를 만나면 가장 하고 싶은 질문은 이거였다. ‘엄정화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와… 그거 의외의 질문이면서 굉장히 기분 좋은 질문인데?
왜 의외인가? 아직까지도 분야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많은 연예인이 롤모델로 엄정화를 꼽는다. 한국에서 ‘마돈나’ 소리 들으면서 대종상 여우주연상까지 받는 여성이 또 나올까? 내가 워낙 오래 활동했으니까. 나는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오직 작품, 앨범에 있었던 사람이다. 일 외에는 뭘 생각해야 하는지, 일상의 즐거움 같은 게 뭔지 몰랐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다독이고 쉬게 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다. 요즘엔 나 엄정화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좀 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박세리가 언젠가 아버지에게 ‘왜 저한테 쉬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으셨어요’라고 했다는 게 떠오르는데? 쉰다는 게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난 그거 몰라, 못해’라고만 치부하면 계속 모르는 채로 사는 거고, 계속 생각하면 얻어지는 게 있다. 생각을 반복하면 방법을 찾게 되니까. 그것도 노력이고 훈련인 것 같다. 일하지 않는 시간을 맞았을 때 목적지를 잃고 텅 빈 채로 표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를 채워줄 만한 게 어디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밖에서 얻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하더라. 편안함이 있어야 과거를 들여다 볼 줄도 안다.
현재의 엄정화가 과거의 엄정화를 돌아봤을 때 지금 봐도 마음에 드는 연기가 있나? 음…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주인공 아이인 경민이가 떠나간 이후, 아이와 같이 지낸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의 여운이 오래 남아 있다. <싱글즈>에서 고 장진영과 둘이 ‘야 뭐 어때, 우리 둘이 키우면 되지. 나 아직 젊고 섹시해’라고 말하던 장면도 너무 좋았고. 그 작품 찍으면서 ‘맞아 이렇게 멋있게 살면 되는 데’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떤 작품에서 나의 연기 전체가 좋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아직은 마음에 드는 파편들만 있다.
왕년의 신촌 마돈나가 가수로 데뷔하는 <댄싱퀸>은 어떤가? 그 영화의 어떤 부분은 정말 나를 보는 기분이다. 나는 비교적 일찍 내 꿈을 이뤘지만, 가정을 이루지 않았잖아. 그런데 영화에서 엄마이자 아내인 정화가 자기 꿈에 대해 얘기할 때 굉장히 공감하면서 연기했다.
‘가정을 이루지 않았다.’ 그런 나도 괜찮다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된 시기가 언제인가? 아니, 받아들이고 말 것도 없이 별 생각이 없는 쪽이었을까? 김완선은 어느 인터뷰에서 ‘결혼 안 한 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같다’고 했더라. 정말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건 요즘이다. 지금의 내가 참 좋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반려견인 슈퍼와 보내는 일상도 좋고, 무작정 나가서 서핑하는 것도 좋고, 밥 짓는 것도 좋고. 별게 없는데 이상하게 편안하다(웃음). 사실 예전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무대 올라가고 싶고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데 결혼이란 상상도 안 되는 생활이지. 만약 결혼한다면, 바로 이렇게 나 혼자로도 진정 편안한 감정일 때가 적당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 나이가 동반자를 만나기 딱 적절한 나이라고 보는데, 우리나라에선 나이에 예민하지.
나이 때문에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나? 그러고 싶다, 진짜로. 내가 조바심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어떤 경우 나이 때문에 일에 조바심이 난다. 그거 아나? 나는 30대에 들어선 순간 부터 나이로 타박을 받아왔다. 이런 제목의 기사가 나는 거지. ‘엄정화, 33세 맞아?’ 내가 뭘 하면, 사진만 공개되면, 그 상태가 가능한 나이의 맨 끝에 서 있는 사람인 것마냥 나이 딱지가 붙었다. 그 세월이 계속된다. ‘엄정화, 40대 맞아?’ ‘엄정화, 정말 50세 맞아?’ 하는데, 네, 맞다구요….
‘이 나이, 이 미모, 실화?’ 식으로 자꾸 질문을 하는 기자님이 많지. 30대 초반의 나를 지금 보면 어리고 예쁘다. 그런데 그 한창때부터도 나이가 따라붙었으니 여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가? 나이를 가지고 조롱하는 듯한 문화와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나이란 열심히 살아온 자랑스러운 나의 연륜인데, 왜. 물론 지금 서른 살 후배들의 상황은 그 나이 때의 내가 느꼈던 한계와는 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일을 즐기면서 계속 간다면, 후배들이 ‘쉰 살 된 선배도 액션을 멋지게 했어’ ‘저 언니처럼 가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당신처럼 오래 커리어를 이어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고 싶다. 이효리가 2017년에 컴백하면서 <더블유>와 인터뷰할 때, 당신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하더라. 환경의 변화와 혼란을 고스란히 다 겪어봤을 당신이 떠올라서 먼저 긴 문자를 보냈다고. 그 문자, 기억한다. ‘효리가 힘들구나’ 느꼈다. 왜냐면 이효리는 이효리잖아. 나도 엄정화다. 갑상선 수술 후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내가 왜 앨범을 만들겠다고 이러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해내고 싶었던 건 그런 이유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갖은 노력과 시간을 들인 끝에 딱 내놓은 앨범이 차트 저 밑에 있을 때의 기분이란, ‘1위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적 없어도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냥 그게 세월이구나 생각했다. 어쨌든 앨범 완성도에 대한 평은 좋았으니.
이제 당신 인생의 화두가 있다면 뭘까? 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지속 가능성’. 내가 엄정화로서 얼마만큼 지속할 수 있는지가 내 화두다. 아이러니한 건 이제 일상의 행복도 누릴 줄 알고, 여유 있게 남을 다독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인생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엄정화가 아직 쟁취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게 있나? ‘이 작품 에서는 나의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 말하고 싶은 작품이 인생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시상식 같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기립박수를 받고 싶다. 공로상보다는 연기가 정말 멋져서 받는 박수 말이다.
연예계에 있으면 다가오는 사람도, 이별하게 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당신을 떠났거나 당신이 떠나보낸 관계를 생각하면 왜 그런 일이 생긴 것 같나? 아주 가까웠는데 안 보는 친구가 하나 둘 있기는 하다. 부정적인 사람이라 멀어진 경우가 있고. 일찍부터 만나 오래 함께 갈 줄 알았는데 안 보게 된 경우도 있고. 누구 탓인지, 정확한 원인이 뭔지 나도 모르겠다. 서운한 게 있다면 그건 서로가 마찬가지일 텐데, 나는 굳이 말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 내 곁의 사람들과는 오래 갈 것 같다.
어떤 부류의 사람을 좋아하나? 에너지가 좋고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스스로 확신이 약할 때, 기운이 빠질 때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들. ‘넌 이런 게 문제야’라고 부정적인 면을 잘 보는 사람에겐 마음이 가지 않더라. 누구나 단점이 있지만, 그보다 큰 장점도 분명 있을 테니까.
엄정화의 약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마음이 약한 것. 마음이 약해서, 정말 짜증 날 정도지. 마음 고쳐먹고, 선도 그어보고, 그렇게 살아보려 하니까 그건 또 불편하더라. 그냥 그 자체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그리고 내가 마음 약한 사람이라는 걸 이미 모두가 다 아는 것 같다(웃음).
천성은 혹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나? 엄마와 많이 닮았다. 엄마는… 우리 엄마는 강한 사람인 것 같다. 눈물이 나려고 하네. 나도 되게 약한 것 같지만, 사실 아주 강하다. 그래서 여태까지 해올 수 있었던 거다. 목표가 생기면 거기까지 가는 길의 작은 장애물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당신을 울렸나? 엄정화가 평생 동안 흘린 눈물은 몇 리터 정도 될까? 푸하하. 꽤 많을걸? 눈물은 갈수록 더 많아진다. 눈물이 많기도 하지만 눈물 흘릴 만한 일도 많았지(웃음).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 같다. 남의 힘듦을 잘 느끼고 흡수해서 나도 많이 아프다.
다들 힘들고 아프지 말고 재밌는 영화 보면서 힘내시라고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영화 보면 스트레스 해소는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우울하고 힘든 시기인데 맘 편히 웃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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