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은희, 그리고 박지후

영화 ‘벌새’의 은희, 배우 박지후 인터뷰.

영화 <벌새>가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한다. 평범한 소녀 은희의 시선을 따라가는 이 섬세한 영화가 반가운 파장을 일으킬 때, ‘발견의 기쁨’을 안겨준 인물이 바로 은희를 연기한 배우 박지후다.

이너로 입은 하얀 셔츠는 대중소, 검정 벨벳 원피스는 바체바 (by 매치스패션), 레이스업 부츠는 율이 제품.

1994년, 열다섯 살 여자아이 은희. <벌새>는 은희의 내밀한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다. 미치코 런던 다이어리, 베네통 책가방, 서예 학원,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복도식 아파트, 짝꿍에게 연필로 흘려 쓴 연습장 위 메시지들(‘저 선생은 맨날 저 바지만 입냐’ 같은). 그리고 세상을 박살 낼 것처럼 싸우다가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란히 앉아 TV를 보는 부모님, 동시에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부모님, “언니가 좋아요”라며 적극 다가오는 후배, 학기가 바뀌자 새 인생 찾아 떠나듯 언니 좋아하던 감정도 리셋하는 그 후배, 잠시 스치며 온기를 전달하는 학원 선생님. 누구나 거쳐 갔을 그 이상한 시절의 감정과 상실이란 지금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 없고,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상업 영화에 익숙한 문법으로는 결코 극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일상의 작은 균열이 쌓여가는 사이, 감독이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원형적 서사로 만들려고 했다’는 결과물은 관객의 보편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소녀의 우주에 생기는 균열들이 영화 후반부 성수대교 붕괴라는 거대한 균열과 맞물릴 때는 ‘시대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1초에 많게는 90회씩 날갯짓을 하며 꿀을 찾아 다닌다는 자그마한 벌새의 날갯짓처럼, 버거워도 가열차게 몸부림쳐야 살아 버틸까 싶은 그 시절 공기와 기분.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올해 8월 말 개봉하기까지, <벌새>는 세계 영화제를 돌며 27개의 상을 받았다.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영화에 지금까지 12만 관객이 호응했다. 독립영화로는 영화계가 오랜만에 소란을 떨 만한 쾌거다.

138분짜리 영화를 끌어가는 주인공 박지후는 재작년 은희와 같은 나이에 영화를 찍었다. “은희는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부모님은 방앗간 하느라 바쁘고,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공부하는 오빠만 집에서 대접받고, 언니는 주로 남자친구와 놀잖아요. 감독님은 저에게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자주 말해주셨어요. 제가 미리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면이 있거든요. 그래도 영화 촬영할 즈음이 한창 사춘기 때이기도 해서 은희의 예민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후는 요즘 은희와는 조금 다르게 사랑받으며 산다. 우선 지후에게는 배우 활동을 기꺼이 응원하는 가족이 있다. 박지후가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자 아침 조회 때 담임 선생님의 리드로 박수 타임이 있었고, 교내 TV에는 ‘동문고 1학년 박지후 CGV 등 <벌새> 상영’이라고 떴다. 교장 선생님은 영화 감상문을 적어 주었고, 영양사 선생님도 박지후에게 배식을 듬뿍 해주는 추세다.

지후는 3년 전 강동원 주연의 영화 <가려진 시간>에 잠깐 출연한 후로 단편영화 <나만 없는 집>을 비롯해 몇 작품을 했을 뿐이다. “제가 제대로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SBS <아름다운 세상>도 기억할 점이 있는 드라마지만, <벌새> 한 편으로 박지후는 배우의 궤도에 올랐다. 소녀를 담아내는 섬세함만으로도 특별한 영화 <벌새>는 ‘N차 관람’ 열풍과 ‘벌새단’이라는 팬덤을 일으켰다. 무려 91회차까지 영화를 관람한 관객도 등장했다. 영화에서 자주 클로즈업되는 지후의 얼굴과 눈은 자꾸 되새기게 되는 잔상을 남긴다. 새 학기를 맞아 수학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홀로 낯선 땅에 떨어진 듯 설렘과 두려움이 미묘하게 공존하던 얼굴. 대치동에서 ‘다른 땅’이었던 판자촌을 걸으며 순진무구한 물음표와 아련함이 섞인 시선을 보내던 눈.

배우의 얼굴과 눈이 훈련과 상관없이 타고난 힘이라면, 표현력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집에서 별말이 없던 은희가 ‘딸내미 성격’을 탓하는 부모님의 발언에 어느 날 폭발하는 장면은 깜짝 놀랄 만한 순간이다. “나 성격 안 이상해! 안 이상하다고!” 악을 쓰며 방 안의 물건을 집어 던지는 은희의 행동은 이 세상 은희들의 선언처럼 보였다. 뽕짝 버전 ‘여러분’을 틀어놓고 춤인지 화풀이인지 알 수 없는 몸짓을 보여줬을 때는 은희가 아닌 박지후에게 좀 놀랐다. 중학생의 그 아방가르드함이라니, <마더>의 김혜자가 보여준 몸사위에 이어 기억될 몸짓이다. “시나리오에 ‘오징어 춤을 춘다’고 한 줄 쓰여 있었어요. 과연 오징어 춤이 뭘까 혼란스러웠는데, 감독님이 한 유럽 영화에서 군인이 흐물흐물 몸을 쓰는 영상을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네가 귀엽고 착하고 예뻐서 좋아하는 게 아니니, 너의 날카로운 면을 꺼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죠. 딱히 춤이라기보다는 감정을 담는 행위라고 이해하면서 몸부림친다는 생각으로 표현했어요. 저도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나서 엄마와 <마더>의 김혜자 선생님이 떠오른다는 대화를 했어요.”

마주보며 대화하는 지후는 영화 속 은희에게서 보지 못한 표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과 친구들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망설임 없이 “저, 인싸였습니다”라고 답할 때는 사실을 말하는 자의 건조함과 의기양양함이 동시에 배어 나왔다. “낯을 좀 가리긴 하지만, 저는 활달한 성격이에요. 얼마 전 학교에서 야영을 다녀왔는데, 장기자랑 시간에 교관 선생님들이 랩을 하면서 콘서트 분위기를 만들었어요. 친구들과 방방 뛰면서 소리 지르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가족과 함께 영화를 자주 보고,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볼빨간 사춘기 노래 부르고, 저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어요. 다만 예전에는 영화를 보면 스토리 위주로 봤는데 이제는 배우의 발성이나 연기가 보이더라고요. 최근 TV에서 <친절한 금자씨>를 봤어요. 이영애 선배님의 그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에요. 복수의 칼을 간다거나 반전감이 있는 캐릭터도 언젠가 해보면 좋겠어요.”

지후는 대구시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2등을 차지한 적이 있다. 그때, 할머니를 주제로 한 가족 이야기를 썼다. 틈틈이 시집을 챙겨 본다(리뷰를 보고 관심 가진 ‘막강’이라는 작가의 문장집 <욕설>이 오프라인 서점에 없어서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벌새> 촬영 시기에는 당시 <쇼미더머니 6>으로 등장한 우원재의 ‘시차’에 빠졌다. 그러니까 지후는 예민한 감수성과 더불어 다크한 매력에 접속할 줄 아는 포인트도 갖췄다. 박지후가 ‘아역 배우’라는 타이틀에 갇히지 않고 새처럼 훨훨 날 거라는 가능성은 해외 유수의 영화제와 ‘벌새단’이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 영화계가 또 하나의 여배우를 얻은 가운데, 우선 박지후의 눈앞에 있는 큰 고민은 ‘당장 다음 주에 있는 중간고사’다. 다시, 사실 적시와 의기양양함이 버무려진 옅은 미소를 띠며 지후가 말했다. “걱정되지만, 항상 그랬듯이 저는 잘 볼 겁니다(웃음). 저는 막상 뭐가 닥치면 초인적인 힘을 내는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