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ve a Gou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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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로 영역을 넓힌 DJ 페기 구의 브랜드 기린(Kirin) 팝업 스토어가 청담 분더샵에서 열렸다.

어디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활기차게 들어온 DJ 페기 구(Peggy Gou)가 반갑게 인사를 청했다. 자리에 앉아선 서울의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과 장난스레 자신의 짧은 양말을 탓하다가도 순식간에 인터뷰에 몰입한 그녀는 예상한 페기 구이기도, 아니기도 했다. 지난해만 약 2백 회가 넘는 공연 기록을 세웠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베를린 테크노 클럽 베르크하인에서 공연한 한국인 최초의 DJ이자 2019 포브스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리더 30인에 선정되는 등 1백만 명이 넘는 팔로어를 거느린 소셜미디어 스타의 화려함은 그대로였지만, 오만함 대신 솔직함과 빠른 결단력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묵묵히 쌓아온 그녀의 면모가 바로 전해졌다. 그리고 오늘 그녀와 마주 앉은 이유, 패션 디자이너로 영역을 넓힌 그녀의 브랜드 기린(Kirin)에 대해 시원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베를린에 거주하나? 이젠 인스타그램을 봐도 가늠이 안 되는 지경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디제잉하는 삶은 어떤가? 그렇다. SNS를 통해 내 삶을 보는 분들은 나에게 최고의 직업이 아니냐고 하지만, 연속해서 비행기를 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내가 불평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한국에 와서 부모님을 뵙고, 한남동 클럽 무어에서의 공연과 패션 브랜드 파티에 참석했다. 또 무엇을 했나? 시차 적응에 바빴고, 친구와 가족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힐링이 됐다. 한국에서 위시리스트는 쇼핑, 머리 자르기, 치과, 피부과 순례다.

무어 공연에서 우는 듯한 장면을 봤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해외에서 디제잉하면 관객들이 반주를 알아듣고 환호를 보내주는 경우는 있다. 1년 넘어 방문한 한국에서 ‘별이 빛나는 밤(지난 7월에 공개된 그녀의 가장 최신곡)’을 처음 틀었는데, 떼창을 해주는 건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 아닌가. 약간 격앙된 상태였는데, 절친한 배우 유아인이 와서 “너 울어?” 한마디에 터졌다.

기린 덕후라고. 그래서 브랜드 이름이 기린(Kirin)일 거라 예상했다. 타투도 있겠지? 있다(오른쪽 허벅지 위쪽을 가리키며). 내 공연에 기린 인형을 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다. 풍선뿐 아니라 기린 잠옷, ‘별이 빛나는 밤’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태권도복을 입은 사람들 등 코스튬이 다양하다. 난 기린을 내 영적 동물로 여긴다. 정신없는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동물이다.

버질 아블로가 당신에게 패션 디자이너를 제안하지 않았나(버질은 런던에서 열린 마이테레사x오프화이트 파티에서 디제잉하던 페기에게 처음 미팅을 제안했다). 전통적인 디자이너가 되는 방식 대신 당신의 영향력과 비전으로 기회를 얻은 것만도 아주 특별한 경우다. 그렇게 얘기하면 지름길을 간 것 같지만… 꼭 그렇게 얘기하고 싶진 않다. 버질은 항상 ‘샤넬의 디자이너가 될 거야’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루이 비통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나. (그렇다면 페기의 비전은?) 그런 질문 종종 받기도 했는데, 패션은 정답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목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입고 싶은 대로 입기로 한 거다. 기린을 시작할 때, 내 멘토(주로 나보다 경력이 많은 DJ, 프로듀서)들이 나의 약점(패션학도 출신으로 음악에 대한 그녀의 진정성을 의심받던)이 될 수 있었던 부분을 오히려 스위치한 것 같다고들 말해줬다.

풀 타임 디제이였으니까, 패션 디자인을 하는 프로세스는 좀 다를 것 같다. 물론 처음 제안받았을 때, 난 ‘디자인을 할 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옷을 보여줄 수는 있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의 보스는 ‘디자인은 우리가 할 테니, 너의 비전을 보여줘’라고 권유했다. 사실 아직 매장에 걸려 있는 내 옷을 보는 것도 쑥스럽고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남성 위주의 스트리트 웨어 공식 ‘Pink it and Shrink it’에 반대하는 이런 지점이 좋았다. 오버사이즈와 어떤 공식에 굴하지 않는 옷들. 원래 남자 옷을 좋아한다. 헐렁한 셔츠, 일자바지 같은. 사실 내 보스는 컬렉션에 좀 더 여성성을 가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컬렉션을 론칭하니, 내가 잘 팔릴 것 같다고 예상한 아이템은 모두 빗나가고, 보스의 예상이 적중했다. (어떤 아이템들인가?) 손목에 펄 장식이 들어간 빨간 코트 같은 경우 여성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좋고, 또 내가 입고 사진 찍은 것들은 바잉이 많이 됐다고 하더라.

컬렉션에 쓰인 프린트 얘기도 해달라. 이번 시즌 가장 많이 사용된 것으로 한국 궁궐 장식에 사용되던 해태, 총기 난사와 폭력에 반대하는 총구가 꼬인 프린트가 있다. 음악에도 한국적 장식을 많이 사용하는데, 한국과의 유대를 잃고 싶지 않기도 하고, 외국에서 많이 다뤄진 바 없어 신선하다.

기린 룩북은 사진가 목정욱이 찍고, 프린트 디자인은 스테레오 바이널즈 아트 디렉터 허재영이, ‘별이 빛나는 밤’ 뮤직비디오는 요나스 린드스트로엠과 촬영했다. 협업자들을 어떤 식으로 선택했나? 허재영은 예전부터 내 로고 디자인을 비롯해, 뮤직비디오 등을 함께 작업한 친구다. 재능이 많고 감각적이다. 목정욱도 마찬가지. 속도 면에서 한국인을 따라올 사람도 없고 말이다. <032c> 매거진의 MCM 슈팅에서 만난 요나스 린드스트로엠은 현재 내 연인이자 존경하는 아티스트다.

그렇다면 또 협업하고 싶은 분야나 인물이 있나? 아티스트로는 나의 영원한 우상 스파이크 존즈, 사진가 조니 듀폴트와 작업해보고 싶다. 최근에는 가구에 관심이 많은데, 알릭스(Alyx)와 협업하기도 한 뉴 텐던시(New Tendency)가 흥미롭다. 기린 홈을 내볼까 생각 중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했던 무수한 노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나? 음악을 하기 위해 패션 스쿨을 마치자마자 모든 것이 백지인 상태로 베를린에 갔다. 2년 동안 남자들이 취급도 잘 안 해주는, 보수도 말도 안 되는 레코드 숍에서 음악을 배웠고, 주말마다 베르크하인(베를린의 가장 유명한 테크노 클럽)에서 음악을 들으며, 짬을 내 레슨을 받고 음악을 만들었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을 견뎌낸 노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현재 난 부킹을 관리하는 에이전트만 있고, 아티스트 레벨을 관리해주는 매니저가 없다. 주변에서 “페기, 너 혼자 커리어를 쌓는다면 언젠가 유리 천장에 부딪칠 거야“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지금은 나에게 눈초리 주던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바뀐 걸 느낀다. 음악에 대한 나의 진지한 태도를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는 것과 그를 나다운 방식으로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좋다. 다음 컬렉션에 대해 힌트를 준다면? 레이브(Rave)가 주제다.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해서다. 태권도에 영감 받은 프린트도 등장할 거다.

오늘 분더샵 기린 팝업 스토어를 끝으로 바로 떠난다고 들었다. 이제 행선지는 어디인가? 팝업 스토어 시티 투어의 다음 목적지인 홍콩을 갔다가 마르세유, 플로렌스, 파리에서의 공연, 또 팝업 스토어가 열리는 모스크바, 9월 말에는 파리 패션위크에 참석한다. 올해 주말 공연은 이미 꽉 찼다. 아, 이번 행사를 위해 크로아티아 공연을 캔슬하고 온 거다. 기린 팝업 스토어 시티 투어의 첫 번째 도시는 서울이어야 했으니까.

패션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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