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처럼 무대를 날아다니는 매력적인 아티스트,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트위터 프로필에 “I’m Korean”이라는 한마디만을 적어놓은 뮤지션,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Japanese Breakfast). 무대 위에서 요정처럼 신나게 날아다니는 그녀는 엄마와 한국이라는 두 축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나는 H마트에 가면 운다. H마트는 한아름 마트라는 아시안 식료품 슈퍼마켓 체인이다.’ 작년 8월 <뉴요커>에 실린 한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에서 먼저 널리 퍼져, 국내에서도 트위터를 중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칼럼 ‘Crying in H Mart’는 여전히 종종 인터넷에 떠돈다. 글을 쓴 이는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 미셸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태어나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이다. 긴 분량의 <뉴요커> 칼럼에 음악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필라델피아 북동쪽의 타운 첼튼햄에 위치한 2층짜리 H마트 속 풍경이 해부에 가까운 수준으로 묘사될 뿐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장면 하나하나가 미셸의 감정을 날카롭게 자극한다. 반찬 냉장고에 가지런히 진열된 계란 장조림과 동치미 국물이 연상시키는 내 엄마의 맛. 콩은 왜 안 먹냐는 둥, 양파를 고추장에 찍어 먹어보라는 둥 다 큰 자식에게 먹는 법을 시연하는 한국인 엄마들의 익숙한 잔소리. 뻥튀기 봉지를 들고 뛰어가는 아이는 미셸의 어린 시절을, 내 엄마가 다다르지 못한 나이로 보이는 여인의 변색된 눈썹 문신과 뽀글뽀글한 파마는 오지 않을 어떤 미래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쓴다. ‘나에게 무슨 브랜드의 김을 살지 묻는 사람이 가족 중 아무도 없다면, 내가 더 이상 한국인이 맞을까?’
과거 필라델피아를 기반으로 한 밴드 리틀 빅 리그에서 음악을 시작한 이후 솔로 프로젝트인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를 하면서 역시 밴드 형태로 활동하는 미셸의 음악은 ‘죽음’에서 비롯된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저승사자’를 뜻하는 첫 앨범 <Psychopomp>는 미셸이 2014년에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직후부터 한동안 작업에 매달린 끝에 완성한 것으로, 상실과 혼란의 감정을 다뤘다. 2017년에는 두 번째 앨범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이 나왔다. 이제는 치유의 과정에 가까운 음악이었다. 두 앨범으로 영미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 인디밴드는 투어를 돌며 빠른 속도로 유명해졌다. “국제적인 규모의 리스너를 가지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거의 10년간 음악을 해오면서 아무도 제 음악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꼈거든요. 한국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에요.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을지 호기심도 생겨요.” 5월 27일 무브홀에서 열린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공연은 2017년에 이은 두 번째 내한 공연으로, 서울은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 장소였다. 친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세실리아 루가 만들어준 드레스를 입고, 드러머,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와 무대에 오른 미셸은 기타를 메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들었을 법한 어리고 고우며 높은 목소리. 하세가와 요헤이가 트위터에 남긴 후기 그대로, 그녀는 ‘요정처럼 무대를 날아다니는 매력적인 아티스트’였다.
스탠딩 공연장의 맨 뒤쪽, 관객 중에는 록 밴드의 팬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남녀 어른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공연을 즐긴 그들은 서울에 사는 미셸의 친척 어른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오리건주의 유진에서 자란 미셸에게는 지금 한국과 그녀를 연결하는 끈과 같은 존재, 이모가 있다. 어릴 적부터 방학이면 서울에 놀러 오곤 했던 미셸이 서울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 역시 이모의 집이다. “큰이모가 나를 볼 때와 내가 큰이모를 볼 때, 우리는 서로 상대에게서 같은 인물을 찾는 듯해요. 우리 엄마 말이에요. 한번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니까 이모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엄마랑 너무 똑같다고.” 미셸은 영어로 말하지만, 여덟 살 때부터 열다섯 살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의 한글 학교에 다녔다. 서울에서 잠깐 연세어학당에 다니기도 했다. 구사할 수 있는 한국말은 적을지 몰라도 한국어의 ‘억양’을 안다. 미셸이 대화 도중 짧은 한국말을 섞어 말할 때면 그 자연스러움과 천연덕스러움에 나도 깜짝 놀랐다.
미셸이 ‘아주 슬픈 이야기’라고 말하는 그 이야기는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의 곁을 지킨 약 6개월의 시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서울에 와서 고향과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비행 중에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고, 결국 서울에 온 지 사흘 만에 입원했죠. 호흡기에 의존하는,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상태였어요.” 숨 쉬기도 어려웠던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갑자기 상태가 조금 호전됐을 때, 미셸은 남자친구인 피터에게 전화해서 말했다. “우리 한 5년 안에 결혼하기로 했지. 그거 지금 당장 해. 아니면 난 널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거야.” 미셸은 약이나 치료 같은 주제 말고 다른 이야깃거리를 원했다. 엄마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결혼식을 위해 드레스나 꽃 장식이나 케이터링 등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재잘거리며 말을 건 것도 그 때문이다. “엄마가 기운이 없어질 때마다 결혼식에 관해 의견을 물어보며 이야기했죠.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은 어려웠지만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이상해지지 않으면서도 생을 축복하는 방법이었죠. 3주 만에 결혼식 준비를 끝냈고, 일주일 뒤 엄마는 코마 상태에 빠졌어요. 엄마는 그 기억을 좋게 간직했을 거예요.”
장례식과 결혼식이라는,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묘한 시간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누군가는 글을 쓰거나 경전을 읽었을 것이고, 술을 마셨을 것이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지나갔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이전의 일상과 똑같이 출근했을 수도 있다. 음악이 일상인 음악가가 그 시기를 작업으로 이어간다는 건 괴로운 자신에게 침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건 타오르는 괴로움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다. 미셸은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씨즈의 보컬 닉 케이브가 아들의 죽음에 대해 쓴 편지 내용을 언급했다. 누군가를 사랑한 거래의 일환으로 슬픔이 따라오고, 사랑이 큰 만큼 고통도 크다는 것.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고통을 느끼기로 결정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며 충격을 크게 받아 아무하고도 잘 지낼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하는 모든 말이 다 싫었어요. 고립되는 시간이었죠. 그래서 제가 낸 두 앨범은 저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음악을 하며 발견한 사실은 사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도 많은 사람이 보편적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엄마가 병원에서 죽어가는데 제가 결혼을 한 건 참 이상하고 특이하면서 개인적인 경험이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성격의 경험이 있다고 하나둘 내게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피드백 또한 구체적이었죠.” 나는 미셸에게, 당신과 비슷한 시기에 나 역시 병원에서 가족과 함께 그런 시간대를 거쳤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면, 그녀에겐 당장 결혼하자고 말할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미셸의 남편은 공연 때마다 미셸의 왼편에 서서 가끔 서로 눈을 맞추는 기타리스트다.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된 미셸의 파편 같은 감정은 슈게이징 사운드에 담겼다. ‘오, 엄마는 천국을 믿어?’라고 노래하는 ‘In Heaven’, 죽음의 이미지가 서린 ‘Till Death’, ‘괜찮아, Don’t Cry’라고 말하는 엄마의 생전 목소리가 흐르는 ‘Psychopomp’ 등. 슬픔을 떨쳐내는 방법 중 하나는 규칙적 일상에 뛰어드는 것이다. 어느 순간 미셸은 사실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관심이 생겼고, 그 관심은 제주도 해녀의 매일 반복되는 삶에서 영감을 얻은 ‘Diving Woman’, 로봇과의 사랑을 상상한 ‘Machinist’ 같은 곡으로 흘렀다. 댄서블한 ‘Everybody Wants To Love You’의 뮤직비디오는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유명세를 만든 신호탄이다. 거기서 미셸은 엄마의 한복을 입은 채, 쪽진 머리를 하고, 일렉트로닉 기타를 치며 귀여운 목소리로 ‘모두가 너를 사랑하길 원해!’라고 반복해서 외친다. 그러나 미셸은 유튜브에서 이 영상에 댓글을 달 수 없도록 조치해놨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는 이름을 지을 때, 저는 그저 그 이름이 귀여웠어요. 아주 정갈하고 예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문구이지만 사실 저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재밌었고요. 미국인에게 아메리칸 브렉퍼스트가 친밀하듯이 나에게 친밀하면서도 이상한 이름을 지은 거죠. 하지만 아티스트에 관한 기본 정보도 없는 사람들이 ‘일본인인데 한국 의상을 입고 있는 거야? 바보야?’ 같은 코멘트를 남기면서 내 감독 데뷔작이 포스팅된 공간을 흉측하게 만들죠. 내가 입은 옷은 엄마의 한복이고, 내가 한국인인 것도 모르면서.”
정치적, 사회적 감수성이 변화한 최근 트렌드와 서양 음악계에서 아시아인이 부상한 현상을 미셸도 다분히 체감하고 있다.한 예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전 밴드 활동 을 할 때 미셸은 “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느끼나요?” 같은 질문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자라면서 기타를 든 아시아 여성을 본 일이 없어요. 제가 하는 장르는 주로 백인 남성의 것이었죠. 최근 다양함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걸 느껴요. 산드라 오가 <SNL> 사회를 보고, 앨리 웡은 코미디 스타이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히트를 치고. 아시아인들은 그 자리에 가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을 거예요. 왜 이렇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는 지 모르겠지만… 다소 억압적인 분위기의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일에 큰 중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미국에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인지도가 생기자 미셸은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여성을 찾기 쉬워졌다고 한다. ‘작은 성공을 거둔 아시안 아티스트의 커뮤니티’가 형성된 거다. 미셸은 일본계 혼혈이자 그녀보다 앞서 활발하게 활동한 미츠키의 투어에 게스트로 초대되거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인디 록 뮤지션인 사사미 등과 서로 관심 갖고 지지하는 사이다.
이제 미셸 자우너는 잘 알고 있다. 언제까지 슬픔의 기운이 짙은 음악만 내놓을 수는 없다는 걸. 지금 그녀의 인생은 꽤 ‘괜찮다’. 행복한 결혼 생활 중이고, 꿈에 그리던 직업을 가졌으니까. 아직 다음 앨범의 색이 어떨지 모르지만 그녀는 ‘바라건대 행복 한 느낌의 앨범’ 정도라고 짐작한다. 그 전에 끝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책을 쓰는 일. “재작년에 내한했을 때부터 엄마와 한국에 대한 기억을 계속 붙들고 싶어서 한국 음식에 관한 글을 썼어요. 당분간 서울에 좀 더 있으면서 열심히 먹으러 다니고, 집필을 마무리할 거예요. 강남터미널 일대를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이 통화하는 소리 만 들어도 위안이 돼요. 엄마가 전화하면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던 그 목소리를 이제는 들을 수 없잖아요.” 미셸은 ‘한국 엄마들’에 대해 좀 아는 편이다. 그녀의 엄마 역시 ‘너무나 한국적인’ 분이었기 때문이다. 1절로 끝나지 않는 잔소리(이 대목에서 미셸은 엄마에 빙의한 듯한 목소리로 “어깨 좀 펴고 다니고!”라고 소리 질렀다), 자식을 향한 끝없는 사랑. 그녀가 한국 문화의 중요한 테마라고 파악한 한국식 모성애와 음식에 대한 추억은 엄연히 작가이기도 한 미셸의 에세이로 국내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다.
미셸이 책을 완성하면, 그때 비로소 엄마를 기리는 긴 의식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인이 극소수인 동네에서 스스로를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던 아웃사이더는 투어로 바쁜 3년을 보냈고, 코첼라 같은 큰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뮤지션으로 자랐다. 외동딸이 뭘 해서 먹고 살지 걱정 많았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얻은 결과이지만. 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음악을 쓰고 연주하는 사람인데 한국계 미국인 혼혈’일 뿐인 그녀에게 ‘미국에서 소수인 아시안 여성 로커’의 기분을 묻는 일 보다 음악 자체에 대해 묻는 일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저 정도의 성공을 한 아티스트가 앨범 발매 후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추락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성공한 아티스트라면 변화에 대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할 거예요. 가장 중요한 건 내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정직하지 않은 음악을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거죠. 음악하는 아시아계 여성이 더욱 많아지고 사람들이 더는 신기하게 보지 않는 때가 오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들떠요.”
-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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