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잔치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들을 주목하는 눈길이 적었지만, 두 사람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 등극했다. 스노보드의 이상호와 스피드 스케이팅의 차민규 이야기다.
“0.01초의 기적, 이상호 선수요.” <더블유> 촬영 스튜디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던 차민규에게 평창 동계올림픽 관련 뉴스 중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물어보자 돌아온 말이다. 그 대답은 의외였다. 차민규 본인이나 그의 종목인 스피드 스케이팅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 이번 올림픽에서 차민규와 이상호 모두에게 ‘0.01초’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자 단어다. 이상호는 남자 스노보드 평행대회전 준결승에서 상대 선수 잔 코시르를 0.01초 차로 제치며 은메달을 확보했다. 그리고 차민규는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34.42초라는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지만, 곧바로 이어진 경기에서 그보다 0.01초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한 노르웨이 선수 호바르 로렌첸에 이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차민규는 자신처럼 올림픽에서 0.01초의 터닝 포인트를 강렬하게 경험한 이상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이상호 역시 차민규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낀 모양이다. 그 공통분모를 핑계 삼아 궁금한 두 선수를 함께 만났다.
차민규와 이상호가 목에 건 은메달은 예상치 못한 깜짝 메달이었다. 메달 확률을 점치는 시선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차민규는 8년 만에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종목에 메달을 안겨준 선수다. 이상호는 대한민국 스키팀이 올림픽에 도전한 지 58년 만에 탄생한, 한국 설상 종목 첫 메달의 주인공이다.
차민규 (1993년생)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미터 은메달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 스케이팅 월드컵 3차 대회 남자 500미터 은메달
“초등학교 시절 유독 코피를 많이 쏟는 허약한 아이였어요. 당시 집 근처에 스케이트장이 생겼는데, 그걸 보신 부모님이 건강을 위해 스케이트를 타보라고 권하셨어요. 그렇게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3일짜리 스케이트 교실에 참가하며 스케이트 세계에 입문했어요.” 차민규의 스케이트 입문기는 생각보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대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참 흥미롭다. 초등학생 차민규는 스케이트를 꾸준히 탄 결과 선수반으로 올라갔다. A조와 B조로 나뉜 선수반에서 열등반인 B조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A조로 경기를 나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한국체육대학교 근처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대학생 선수들과 같이 훈련도 한 그는 2011년 쇼트트랙으로 한국체육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이유는 그가 몸싸움을 워낙 싫어했기 때문이다. 몸싸움이 치열한 쇼트트랙에서 몸싸움이 없는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옮겨간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쇼트트랙을 하던 시절 발전시킨 곡선 주로 주행 능력(많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에게 부족한 능력이다)을 장착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차민규는 승승장구했다. 그는 2015년 국가대표가 되었다.
이상호 (1995년생)
평창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 은메달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스노보드 남자 회전, 대회전 금메달
이상호의 별명은 ‘배추 보이’다. 그 별명은 이상호가 스노보드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 강원도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눈을 지겹도록 보고 즐겼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강원도 정선에서 사북으로 이사를 가서도 여전히 눈놀이 삼매경에 빠져 지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고랭지 배추밭 자리에 겨울마다 눈썰매장이 열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눈썰매장에서 처음으로 스노보드를 타봤다. 그런데 이상호가 스노보드를 타던 눈썰매장은 스키협회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눈썰매장을 오가던 스키협회 소속 장태열 코치 눈에 이상호는 탐나는 미래의 스노보드 선수였다. 장태열 코치와 함께하며 스노보드 실력이 일취월장한 이상호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선수로 활동했다. 여름에는 뉴질랜드로, 가을에는 유럽으로 전지 훈련을 다니며 스노보드 실력을 계속 갈고닦았고, 2013년 국가대표가 되었다. 스노보드만큼은 너무 힘들어도 계속 타고 싶다고 강하게 주장하던 초등학생은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스노보드 선수다. 얼마 전 이상호 선수가 경기를 뛴 휘닉스 평창의 슬로프가 ‘이상호 슬로프’로 운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인의 이름을 딴 슬로프가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평창 동계올림픽은 많은 관심 속에서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올림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다음 올림픽이 개최될 때까지는 점점 줄어들 거예요. 그런데 겨울 시즌마다 휘닉스 평창을 찾는 사람들이 이상호 슬로프를 타면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억하고 스노보드를 더욱 사랑해줄 것 같아 기쁘고 뿌듯해요.”
차민규와 이상호에게 라이벌이 있는지 물어봤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없다’고 답했다. 자만심에서 나온 대답은 아니었다. 스피드 스케이팅과 알파인 스노보드 모두 절대 강자가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늘 엎치락 뒤치락하는 순위나 다른 선수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실력을 키워야 성공하는 세계다. 이상호가 말했다. “롤모델은 있어요. 피겨 여왕 김연아요.” 절대 강자가 없는 스포츠 세계에서 1위로 기억되는 김연아처럼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비인기 종목이었던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과 활력을 불어넣어준 김연아의 대단함 때문이다. 이상호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 후배들이 예전보다 좋은 환경에서 훈련받고 지원받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처럼, 언젠가 비인기 종목인 스노보드를 타는 후배들에게 여러모로 도움 주는 선배를 꿈꾸고 있다. 차민규 역시 스피드 스케이팅을 더욱 널리 알리고 싶어 경기뿐만 아니라 경기 외의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는 오늘처럼 스튜디오에서 화보 촬영을 하는 일이 영 어색하지만, <더블유>를 통해 차민규를 만나는 독자 중 몇몇이라도 스피드 스케이팅에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한다. 그러고는 자기 촬영 순서가 다가오자 얼음 위를 달리듯 빠르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여 카메라 앞에 섰다.
많은 이들이 스노보드나 스케이팅을 대충은 알고 직접 즐긴 적은 있어도, 그 둘이 경기 종목으로 나타나면 나 몰라라 뒷걸음치곤 한다. 한마디로 스노보드는 알지만 알파인 스노보드는 잘 모르고, 스케이팅은 알지만 스피드 스케이팅은 잘 모른다. 이상호에게 알파인 스노보드가 뭔지 설명을 부탁하자, 그는 프리스타일 스노보드와 알파인 스노보드의 차이점부터 알려줬다. “프리스타일 스노보드는 스노보드를 타면서 점프와 회전 등 다양한 공중 연기를 펼치는 경기예요. 제가 타는 알파인 스노보드는 속도를 겨루는 경기고요. 그래서 알파인 스노보드용 보드는 일반 보드보다 속도가 더 잘 나도록 탄성도 적고 길이도 길어요. 알파인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알파인 스노보드는 회전 반경에 따라 평행회전과 평행대회전으로 나뉘지만,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평행대회전 경기만 있었다)용 보드는 길이가 보통 185cm예요.” 이상호 선수의 이번 준결승전을 떠올려보았다. 두 명의 선수가 동시에 출발해 최고 속도(시속 50km)로 슬로프를 내려오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였다. 속도라고 하면 스피드 스케이팅도 빼놓을 수 없다. 스피드 스케이팅 500m는 400m짜리 링크 1.25바퀴를 가장 빠른 시간으로 돈 선수가 우승하는 경기다. 한 번에 두 명씩 출발하며 정해진 레인에서 돌기 때문에 선수들 간의 몸싸움은 없다. 차민규는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그가 약하다고 평가받았던 첫 100m를 9초63으로 주파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고, 자신 있는 두 번째 곡선 주로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돌았으며, 막판 스퍼트까지 발휘해 좋은 성적을 얻었다. “첫 100m 구간에서 관중의 함성과 응원이 제 에너지를 끌어올렸죠. 경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선수 기량 증진에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해요.”
차민규와 이상호에게 각자의 종목에서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 세 가지를 물었다. 차민규는 ‘훈련, 분석, 꾸준함’을, 이상호는 ‘깡, 침착함, 테크닉’을 꼽았다. 그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며 빙상(설상) 훈련, 지상 훈련,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꽉 찬 하루하루를 보낸다. 물론 올림픽과 경기 시즌이 다 끝났으니, 당분간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차민규는 곧 제주도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고, 이상호는 운전면허 자격증에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알아보느라 제법 바쁘다. 휴가 계획을 말할 때는 편안히 웃던 이들의 눈이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티 나게 달라졌다. 투지가 보이는 눈빛이었다. 두 선수는 자세, 실력, 노력의 삼박자를 갖췄다. 그들에게 메달을 바라는 기대감이 크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갈고닦아온 기량을 증명하고, 은메달까지 따낸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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