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의 주장과 해석, 취향과 연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펼쳐진 전시 세 개가 열렸다. 공통점은, 아주 많은 창작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는 것.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 W쇼
W가 무엇의 약자냐는 질문을 에디터로서도 자주 받는 데, 전시 W쇼의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에서 W는 Woman이자 Worker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모아서 보여주고, 수적으로는 다수이지만 파워에서는 비주류였던 그들의 성취를 재조명했다. 그 리스트에는 거북선 담뱃갑을 디자인한 이정숙과 소주 참이슬을 브랜딩한 손혜원부터 f(x)의 음반 아이덴티티를 담당한 민희진까지, 30년을 망라한 현업 디자이너 91명의 작업 85점이 들어갔다(언리미티드 에디션의 행사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한 박선경, 더스크랩의 황은정도 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는 연결 고리를 가진다).
2인 스튜디오 ‘텍스처 온 텍스처’가 이 작업들의 사진을 찍고 설치 구조를 만든 ‘아카이브’ 작품으로 전시 골격을 세우고 무게중심을 잡았으며, 박연주, 소목장 세미, 양으뜸, 용세라, 홍은주 등의 작가가 다양한 신작을 만들어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덧붙였다. 이 작가들에 더해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 이재원, 최슬기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사 윤민화 등의 전시 공동 기획자, 아카이브 구성에 있어 연구와 조사를 맡은 김린도 모두 여성들이다. “oo 계 내 성폭력 이슈가 불거진 이후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을 만들어 1년 동안 운영했어요. 그 결과를 묶어 정리하는 과정에서 출판이나 워크숍 같은 형식으로는 해낼 수 없는, 축제와 같은 파급력 이 전시에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봐줬으면 하는 마음, 특히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공동 기획자인 디자이너 최슬기의 말이다. 실제 W쇼 전시장인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에는 다수의 젊은 세대 여성, 그리고 몇몇 남성이 모여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이름과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W쇼의 운영진은 이 아카이브 리스트의 완성에 대해 완벽한 명예의 전당을 세워 문을 닫고 나온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여성 디자이너의 존재와 활동을 인정하고 기념하며 기록하려는 노력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리스트가 꾸준히 덧붙여지고 또 넓어질 것이라는 의미로, 아카이브 작품에 플러스(+) 마크와 더불어 빈자리를 마련해 상징적인 참여를 시각화했으며, Wlist.kr 웹사이트의 목록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있다. 전시 도록에서 밝혔듯 ‘목록은 현실보다 더 질서 있는 세계를 표상한다’. 전시에 ‘여성’이라는 설명을 넣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건축가, 시인, 영화감독의 리스트에서 굳이 성별을 표기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건 대개 남자들의 목록이었으니까 말이다. ‘설명 없이 여자들만 소개하는 리스트를 한번 보라, 그러나 반박은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식의 태도랄까. W쇼는 여성 실력가들을 모으고 내세운 다수의 힘, 그리고 그 다수가 손잡을 수 있다는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사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더스크랩
100명의 사진가가 각기 10장씩 모두 1000장의 규격이 같은 이미지를 내놓고, 관객은 누구의 사진인지 알지 못한 채 5장 또는 10장씩 ‘스크랩’한다. 구매하고자 하는 타깃이 있어도 그 사진가의 작품을 알 수 없으며, 작가의 이름이 가진 권위 대신 마음을 움직이는 비주얼이 힘을 발휘한다. 게임 같은 룰 아래 움직이는 ‘더스크랩’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진을 전시하고 또한 사고파는 경험의 장이다. 더스크랩의 운영진인 김익현, 김주원, 안초롱, 이정민, 홍진훤은 ‘지금여기’(http://space-nowhere.com)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모인 멤버다. 80년생부터 87년생까지의 분포로 사진에 기반해 따로 또 같이 기획자 또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 이들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사진을 찍고 보는 경험이 매 순간 일어나는 지금, 각기 단절되어 일어나는 사진 작업, 전시, 판매를 매끄럽게 작동시킬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공유하고 그 답을 찾아보기 위해 이 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기성 갤러리 에서 작품을 판매하는 구본창 같은 작가부터 사진 전공 학생까지, 권오상이나 박찬경처럼 주로 사진 아닌 매체로 작업해온 아티스트, 다른 시각 작업을 주로 하는 창작가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 풀은 첫 회인 2016년과 두 번째 해인 2017년에 한 명도 겹치지 않고 갱신되었다.
더스크랩의 총판매액은 기존 시장에서 판매되는 작품 1~2점의 가격이라고 한다. 전혀 다른 시장, 완전히 다른 접근법인 셈이다. “작가들이 수익을 균등하게 1/100로 나누어 갖는 규칙은 더스크랩을 일종의 축제로 만듭니다. 팔리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죠.” 기획팀 이정민의 말이다.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에 대해 이들은 ‘사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라는 경계를 설정했다. 널리 알려진 작가, 잘 팔릴 것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층,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모으는 것. 전시, 책, 잡지, 간행물, SNS 등을 통해 대략 10개월 동안 이미지를 리서치하며, 장소나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작가 리스트 전체를 바꾸는 것이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을 준다고 믿는다. 작가들을 따라가는 ‘스크랩’의 결과가 궤적을 남기는 등고선은 오직 구매자 자신의 시각으로 그리는 취향의 지형도일 것이다.
‘서울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에디션
9회째를 맞은 ‘언리미티드 에디션’(이하 UE)은 비유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멀리까지 왔다. 2009년 서교동의 작은 갤러리에서 시작한 이 독립출판물 제작자들의 행사이자 마켓이 서울 시립북서울미술관까지 개최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운영진인 유어마인드의 이로는 이번 행사 장소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가까이 있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때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제공한다’는 점은 UE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독립출판물 자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접근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 문화를 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관람객 위주로 결집할 수 있었고, 그 밀도가 참가팀에게도 즐거운 경험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접근성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행사 이틀간 UE의 191개 부스를 다녀간 총 관객은 1만8200명에 달했다. ‘그때 그곳에서만’ 만나고 구입할 수 있는 특별함은 SNS 시대에 특히 환영받는 경험이다. 그러나 UE 운영진은 앞으로의 성공까지 무난하게 낙관하지는 않는다. 행사 기간과 규모, 밀도, 신청팀과 선정팀의 비율, 운영 방식… 독립적인 제작자들이 모이는 행사의 한계 속에서도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현재 당면한 고민이자 과제다.
3년 전 더블유와의 인터뷰에서 UE가 상정하는 관객들에 대해 물었을 때 이로는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하고 쓸데없는 것, 무의미하게 아름다운 것에 관심을 가진 몽상가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취향이나 감각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논의되고 어디에 목소리를 높여야 할지 아는 사람들.” 이런 가상 관객 집단이 요즘은 어느 한 군데서 모이기보다 다양한 채널로 흩어지는 시기 같다는 것이 그가 파악하는 그사이의 변화다. “온라인에서는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텀블러, 커뮤니티, 오프라인에서는 크고 작게 생기거나 없어지는 공간에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면서 큰 지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때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신이 더 향할 곳을 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지금의 다양한 제작자, 행사, 공간 역시 하나의 이름 아래 뭉치기보다 서로 조금씩 참조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길을 닦는 중일 것이다. 2018년, 9회 다음이자 11회 이전인 10회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UE가 무엇을 보여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행사의 성격이야말로 ‘언리미티드’, 한계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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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황선우
- 사진
- 나씽스튜디오 (W쇼), HWANG YEOZI (언리미티드 에디션), COURTESY OF 더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