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서 과연 살 수 있을까?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출 수 없도록 자꾸만 팽팽하게 당기는 이 도시 밖으로 나가 자발적 유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삼시세끼 바다목장 편> <섬총사> <효리네 민박>. 지금 시청률 고공 행진 중인 이 세 예능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섬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남 고흥의 작은 섬 득량도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 제주도는 규모가 다르긴 하나 바다와 하늘이 펼쳐지고, 뭍에서 멀리 떨어져 호젓한 기분을 전한다. 세 프로그램은 다른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비해 호흡이 느리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출연자의 성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극적인 사건 없이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새로운 사람과 교류하고, 잠자리를 돌보고 하는 일과를 느릿하게 따라간다. 몇 년간 유행한 여행이나 음식 예능류의 맥락과도 닿지만 배경이 되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단출하고 친근감을 주며, 딱히 이뤄야 할 목표랄 게 없어 느슨하다. 투숙객을 위해 집을 청소하거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염소젖을 짜거나 문어 통발을 건지러 다니는 출연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골 생활은 확실히 손이 많이 간다. 정신 사나워 TV 예능을 잘 보지 않지만, 가끔 넋을 놓고 이런 섬 생활 예능 채널을 틀어놓는 이유를 깨달았다. <효리네 민박>에서 아이유가 자주 그러듯이, <삼시세끼 바다목장 편>의 고양이들처럼, 멍 때리거나 낮잠을 자는 한가로움이 내게 필요했던 거다. 차를 우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여유, 끼니 사이에 바다에 나가 몸을 담그는 시간, 마당을 보며 앉아 꾸벅 조는 한가함. 그런 템포로는 살아본 적이 없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모양새로 사는 것 같다. 늘 막히는 길, 붐비는 지하철로 출근하고, 종일 바쁘게 지내다가 또 막히는 길, 붐비는 지하철로 퇴근하는 직장인에게 집이란 잠을 자고 출근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도 천천히 느긋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어딘가는 있겠지만, 도시 곳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표정하게 전투적이다.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새벽을 밝히며 노는 것도 시간에 쫓기기 때문일 거다. 해외 대도시들도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서울은 유독 모든 것이 촘촘하다. 인구 밀도도, 도시의 밀집도도, 요란한 상업 시설의 시청각적 공해도, 그리고 사람들이 내뿜는 피로의 표정도 말이다. 이런 엇비슷한 삶에 회의를 토로하는 사람 가운데 한동안 제주로 이주하는 붐이 일기도 했다. 제주 순 유입 인구는 2014년 1만 명을 넘긴 이후 2015년 1만4천 명, 지난해에는 1만5천 명으로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올드독의 맛있는 제주 일기>를 낸 만화가 정우열은 5년 차 제주도민이다. 물론 제주도에 산다고 해서 귤 농사를 짓거나 물질로 해삼을 잡는 건 아니지만 서울 언저리에 살 때와는 확실히 달라 보인다. 인스타그램의 근황을 보면 개와 함께 자유롭게 이호테우 해변을 산책하고, 자주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잘 지내는 것 같다. 나 같은 서울 지인들이 가끔 제주 맛집을 추천해달라며 귀찮게 구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출퇴근할 필요가 없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프리랜서 작가기 때문에 가능한 생활 패턴일 것이다. 개가 아니라 아이가 있는 부부들은 자연이 있는 제주의 육아 환경에 더 호의적이어서, 제주로 내려가 함께 게스트하우스나 카페를 운영하며 살고 있는 사례를 적잖이 볼 수 있다. 물론 더 높은 연령대로 올라가면, 자녀를 제주 국제학교에 입학시키고 제주에 별장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 카페가 있는 제주는 서울 밖에서도 비교적 문화적 인프라가 풍성한 편이다.
문화 경험의 혜택을 얼마간 포기한다면, 대안적인 삶을 꿈꾸는 데 꼭 제주여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 부부인 스튜디오 ‘키미 앤 일이’는 얼마 전 남해군 삼동면에 ‘바게트 호텔’이라는 공간을 열었다. 호텔 장기 투숙자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동명의 그림책을 모티프로 한 이곳에서는 차와 케이크, 두 사람의 그림책과 디자인 제품을 판매한다. 살아가는 장소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여긴다는 이들은 부산을 거쳐 남해에 정착했고, 그곳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라고 한다. 더블유에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시골살이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직업군인 잡지사 패션 에디터 출신으로 지리산 자락의 경상남도 하동에서 민박을 운영하며 사는 사례도 있다. “적게 일하고 덜 벌고,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삶을 꿈꿨다”라며. 출판사 ‘남해의 봄날’은 서울에서 통영으로 내려간 지 7년이 되었다. 87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일하는 서점 장인의 이야기인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이나 대전 명물 빵집인 <성심당> 이야기를 펴낸 이 출판사는 통영의 문화예술지도 3부작을 책으로 엮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소프트웨어인 책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간도 운영한다는 점이다. ‘봄날의 책방’이라는 서점, 그리고 ‘봄날의 집’이라는 게스트하우스다. 통영의 건축가가 공간 리노베이션과 가구 제작을 맡아 방마다 통영 출신의 예술가들, 지역의 공방과 연결되는 스토리텔링을 부여했다. 문학가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영근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인 통영의 지역색을 세련되게 재해석한 이런 시도는 서울에서라면 쉽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부동산 시세에서 큰 차이가 나니까.
<제주, 살아보니 어때?>라는 책에서 박범준 바람도서관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곳으로 내려오는 사람을 ‘자발적 유배자’라고 불러요. 사회가 혹은 도시가 밀어 제주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죠.” 도산 윤선도는 네 차례에 걸친 25년의 유배 생활 동안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풍수지리나 의약, 천문 같은 분야는 당대 사대부들의 관심 사에서 비켜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계속 벼슬살이를 하며 치열하게 살았다면 ‘어부사시사’ 같은 작품은 후대에 남지 않았을 거다. 앞세대에게 부모님의 고향인 시골로 돌아간다는 개념의 ‘귀농’이 있었다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서울이 주지 못하는 다양한 기회와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 위한 ‘귀촌’이 있다. 농사를 짓는 대신, 서울에서 했던 일의 연장선상에서 가능성을 찾아가는 삶의 영역 확장이다. 이런 모색과 확장은 여유로운 시간에서, 저렴한 부동산에서, 혹은 남들의 시선에서 놓여나는 자유에서 온다. 그리고 그들이 내려가 살면서 문화를 바꿔나가는 이상 ‘촌’은 더 이상 ‘촌’이 아닐 것이다.
- 에디터
- 황선우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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