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워크를 걸어가듯 뽐내는 스텝, 런웨이 끝에 멈춘 모델의 포즈처럼 과장된 움직임, 메이크업을 강조하며 절도 있게 꺾는 팔동작. 보깅(Voguing), 또는 보그 댄스라 부르는 이 강렬한 80년대 춤이 돌아왔다.
80년대 뉴욕 할렘의 클럽에서 유행한 보깅(Voguing 하이패션 잡지 모델이 취하는 포즈처럼 스텝을 밟고 팔을 움직이는 동작이 특징인 춤의 장르), 또는 보그 댄스를 세상에 알린 건 물론 마돈나의 1990년 히트곡 ‘Vogue’ 안무였다. 패션계 트렌드만큼이나 장르의 유행이 돌고 도는 대중음악계, 더구나 80년대 레트로가 넘쳐나는 가운데 지금 보깅의 열풍이 다시 찾아온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트렌드가 마돈나의 보그 25주년 오마주 비슷한 것이겠거니 오해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MTV 시대에 힘입은 마돈나의 전 지구적 성공이 단물을 쏙 빼먹은 뒤 다들 지겨워했던(진부한 답습이 될 테니까) 보그 댄스 신의 야성적 에너지가 다시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오고 있는 그림에 가깝다.
지금 대중음악 신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인 영국의 댄서 출신 뮤지션 에프케이에이 트위그스(FKA Twigs)는 8월에 새 EP<m3ll155x(멜리사)>를 발표하면서 16분짜리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4개의 노래가 마치 단편영화의 사운드트랙처럼 흐르며 연결된 이 영상은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진행되진 않지만, 느슨한 서사가 중심에 있다. 내한 공연 당시 더블유와의 인터뷰에서 트위그스가 ‘자신의 강한 여성적 에너지’라고 밝힌 멜리사라는 가상의 인물이 태어나고, 임신을 하고, 출산한 다음 보그 댄스를 펼치는 내용이다. 첫 번째 트랙 ‘Figure 8’에는 디자이너 릭 오웬스의 아내이자 뮤즈인 미셸 라미(Michele Lamy)가 등장하는데, 멜리사는 그녀가 입으로 토해놓은 덩어리로부터 탄생한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인 ‘Glass & Patron’에 이르면 멜리사가 자신이 낳은 보그 댄서들과 다 같이 대대적인 보깅 무대를 펼친다.
뮤직비디오를 직접 감독하는 트위그스가 어떻게 보깅에 심취하고 이런 아이디어를 얻었을지, 행적을 되짚으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지난해 11월 퀸스에서 뮈글러 볼(Mugler Ball)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짧은 보깅을 하는 모습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Glass & Patron’ 뮤직비디오 속에서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고 춤추는 보그 댄서들의 모습은 이 뮈글러 볼에서 경연을 펼치는 보거들과 흡사하다. 이날의 게스트인 리한나, 발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흥분된 톤으로 이 파티를 중계하기도 했다. 트위그스는 이렇게 말한다. “보깅은 내가 어떻게 내 자아와 여성성을
보듬을 수 있는지를 알려준 매개체예요. 보깅을 통해서 비판이나 편견, 모든 걸 겪고서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죠”.
그저 유난하고 개성 있는 춤의 장르로 보일지 모르는 보깅에 이런 거창한 의미까지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춤의 기원이 LGBT 문화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깅은 뉴욕의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강렬하게 드러내는 퍼포먼스이자 클럽을 중심으로 사교하던 하위문화였다. 80년대 보깅 클럽을 밀착 취재해 선댄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파리는 불타고 있다(Paris Is Burning)>를 보면 이들의 넘치는 끼와 현란한 춤, 스타일리시함, 그리고 보그 댄스 커뮤니티의 단단함에 놀라게 된다. 뮈글러를 비롯한 다양한 하우스들은 단지 댄스 클럽일 뿐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배척당하던 흑인, 라틴계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섹슈얼과 드래그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자 안전한 공동체 역할을 했다. ‘하우스 오브 발렌시아가’ 혹은 ‘하우스 오브 생 로랑’ 하는 식으로 아이코닉한 패션 브랜드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을 만큼 패션과 스타일이 그들 사이에 중요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문화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보깅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무엇이 된다. 패션 모델들이 워킹을 하듯 보그 댄서들은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메이크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손을 얼굴에 갖다 대는 행위는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자부심을 표현하는 몸짓으로 보인다. 트위그스가 말하듯이, 스스로의 자아와 성적 정체성을 보듬을 수 있는 매개로까지 느껴질 만큼.
그리하여 이야기는 2015 F/W 알렉산더 왕 캠페인으로 돌아온다. 왕의 캠페인 영상에서 춤을 추었고, 모델로도 출연한 일본의 댄스 듀오 아야밤비(Ayabambi)는 똑 닮은 외모와 절도 있는 보그 댄싱으로 스타덤에 오른 레즈비언 커플 아야 사토와 밤비다. 현재 보그 댄스의 대세인 이들이 마돈나의 최근 싱글 ‘Bitch, I’m Madonna’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다는 보깅의 연결고리도 흥미롭다. 패션에서나 음악에서나 새로운 세대는 끊임없이 매의 눈으로 예전의 멋진 것을 탐색하고 되살려낸다. 그리고 그 오래된 모티프는, 달라지는 시대의 맥락 속에 새로운 위상과 의미를 획득한다. 성소수자들의 게토에서 유행한 하위문화이던 보깅이 주류 문화의 열렬한 구애를 받는 지금, 동성 결혼이 인정받게 된 시대의 변화가 겹쳐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 에디터
-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