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이제야 갖게 된 여전사

W

피 묻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총을 쏘는 독립군. <암살>의 옥윤, 전지현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멋진 여자 주인공이다.

“기관총만이라도 잡고 가겠습니다.” 암살단에 차출돼 독립군 기지를 떠나던 옥윤(전지현)은 적의 기습을 목격하고 서둘러 총을 꺼낸다. 부하들의 목격담은 이렇다. “적군 네 명을 잡는데 딱 총알 네 발을 썼어.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쁜지.” 한국영화 사상 가장 멋진 여주인공이 소개되는 순간이다. 며칠 후 암살단의 작전회의. 겁먹고 너스레 떠는 사내들을 옥윤이 평정한다. “작전은 5분 안에 끝나고, 우린 살아서 돌아갈 겁니다.” 상관을 죽이고 영창에 갈지언정 불의는 용납 못하고, 위기에 처한 동지를 외면하지 않으며, 뛰어난 결단력으로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여자. 게다가 압도적인 실력과 집요한 근성까지 갖춘 인물. <암살>의 옥윤은 ‘대장’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은 여자다. 평시 도시의 아귀다툼에서 보신을 하기로 마음 먹자면 처세의 달인 강인국(이경영)이나 기회주의자 염석진(이정재), 넉살 좋은 속사포(조진웅) 같은 이들을 대장으로 모시는 게 맞다. 하지만 이웃나라 전쟁광들이 총칼을 들고 코앞까지 쳐들어오거나, NASA가 보낸 암호를 잘못 해독해 열받은 외계인들이 지구와의 전면전을 선언하거나,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육식 공룡이 난동을 부려서 정말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면, 제 아무리 완고한 여성혐오자라도 옥윤의 치맛폭으로 쪼르륵 달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동훈 감독은 ‘피묻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총을 들고 걸어가는 여자’의 이미지에서 이 영화가 출발했다고 말한다.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 그래서 처연한 존재가 옥윤이다. 영화 초반 옥윤은 경성에 가면 “커피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가 평범하게 커피 마시고 연애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녀의 피묻은 웨딩드레스는 불발된 여성성의 상징이다. 숭고한 비장미는 예정된 것이되, 그것이 180억짜리 블록버스터의 대표적 스펙터클로까지 승화된 것은 역시 전지현의 공이다. 그녀의 민족애는 사내들의 비분강개와는 결이 다르다. 어린 학도병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죽어가는 동료를 두고 전장을 떠날 때, 그녀의 얼굴에는 혓바닥으로 병든 새끼의 털을 핥아대는 암컷 포유류의 진득한 연민과 절박함이 배어난다. 신성에 가까운 모성애가 초인적 의지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샤를리즈 테론이 연상된다.

전지현은 5kg짜리 총을 한 손으로 들고 뛰어다닌다. 여배우 중 가장 운동신경이 좋다는 하지원도 액션 동작마다 끙끙대는 신음이 섞여들곤 했는데, 전지현은 엄살 떨 줄 모르는 옥윤의 캐릭터 그대로 담담하게 동작에 집중한다. 그것이 그녀의 당당한 몸매와 어우러져 한 편의 검무 같은 영상이 완성되었다. 아이러니는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사법이다. 동서고금의 판타지들이 끊임없이 여전사 캐릭터를 재생산해온 이유다. 한국영화는 이제야 제대로 된 여전사를 갖게 되었고, 전지현은 또 한 번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옥윤의 또 다른 매력은 소탈함이다. 생전 처음 커피를 마셔보고선 “책에선 맛있다고 했는데…” 아쉬운 혼잣말을 할 때, 작전 전날 춤추는 동료들에게 정신 무장 운운하며 센 척하는 대신 에라 모르겠다 웃으며 손목 잡혀 무대에 나설 때, 그녀는 백발백중의 저격수가 아니라 누이 같고 친구 같은 한 명의 인간이다. 중심이 바로 서면 허세가 깃들 자리가 없고, 아름다운 것들은 꾸밈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이가 대장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수하가 되어 목숨 걸고 도시락 폭탄을 던질 것이다.

에디터
황선우
이숙명 (칼럼니스트)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