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이고도 환상적인 세계를 동경하며 패션의 경계를 무한 확장시켜온 하이패션 디자이너들. 그들이 탄생시킨 강렬한 순간은 매 시즌 우리에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녀가 일하는 곳은 주소도 간판도 없는 작은 가게입니다. 사실 ‘가게’라고 불러도 될지 좀 망설여지는 곳이에요. 여기서는 물건을 팔지 않거든요. 이곳의 주인인 마녀는 방문객들의 위험한 부탁을 처리해주고 대가로 금화를 요구합니다. 10년째 붙들려 온갖 궂은일을 도맡고 있는 소녀도 마녀의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했어요. 서른 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삼백 살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소도 간판도 없는 가게에 숨어 지내기 때문에 죽음이 그녀를 찾아내지 못해서 지금껏 살아 있는 거라고요.
마녀는 수요일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외출을 합니다. 친구들과 모여 훔쳐온 갓난아이를 구워 먹고 두꺼비로 담근 술을 마시는 날이거든요. 가게를 나서기 전에는 소녀에게 늘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면 안 된다.” “네, 알겠어요. 시키는 대로 하죠.
하지만 그날 따라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더는 참을 수가 없던 소녀는 방문객을 맞기로 했어요. “남편이 저를 떠나려고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소녀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마녀의 화분에서 붉은 꽃 한 송이를 뽑아 여자에게 건넸습니다. 뿌리를 뜯긴 꽃은 사납게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이걸 달여서 남편에게 먹이도록 하세요.” “고맙습니다. 사례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가 가진 거라곤 누구든 잠들게 하는 이 찻잎뿐인데…” “할 수 없군요. 그거라도 받죠.
그 다음 주부터 마녀가 외출한 뒤 혼자 남게 되면 소녀는 가게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들였습니다. 눈이 네 개인 거인의 고민은 불면증이었습니다. 간신히 눈 두 개를 붙이더라도 나머지 둘이 말똥말똥하기 일쑤였던지라 그는 늘 피곤에 시달렸습니다. 소녀는 일전에 받은 찻잎을 거인에게 건넸습니다. “값은 어떻게 치르면 될까? 금화는 없지만 내 눈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가 있지.” “할 수 없군요. 그거라도 받죠. ” 거인이 가슴에서 눈알을 뽑자 검은 피가 줄줄 흘렀습니다.
수요일의 방문객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앞날을 궁금해하는 의사에게는 거인의 눈알을 주고 그 대신 가방에 담긴 심장을 받았으며,
그 심장은 자신이 만든 양철 소년의 가슴이 뛰길 원하는 대장장이에게 또다시 건네졌습니다. 대장장이는 대가로 무엇이든 열고 잠글 수 있는 열쇠를 소녀에게 선물했습니다.
늑대들은 양떼 우리를 열 방법이 궁금했습니다. 물론 소녀는 대장장이의 열쇠를 꺼내 주었지요. 늑대 무리 중 한 마리가 물어온 부엉이를 내려놓고떠 났습니다. 밤새 달처럼 차갑게 빛나다가 동이 튼 뒤에야 잠이 드는 짐승이라는 설명을 남기면서요.
소녀는 이 부엉이를 밤에게 선물했습니다. 모두가 잠이 들어버리는 시간에만 활동하는 그에게도 친구는 필요했으니까요. 밤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은하수로 목걸이를 만들어줄까? 아니면 달을 한 조각 잘라다 침실에 걸어줄 수도 있어. ” 하지만 소녀가 바라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형제 중에 죽음이 있지 않던가요? 그에게 이 가게로 찾아오는 방법을 알려주셨으면 해요” .
여느 수요일 밤처럼 마녀는 잔뜩 취한 채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두꺼비 술 때문에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는 심한 악취를 풍겼고요. “찾아온 사람은 없었겠지?” “네, 아무도요.” 마녀는 곧장 침실로 향하더니 이내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습니다. 소녀는 창문을 열고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한 걸 확인했습니다.
죽음과 그의 일꾼들은 드디어 오랫동안 찾아 다니던 마녀에게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소녀는 가만히 앉아 침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무서운 비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잠시 후 죽음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어요. 그간 피해 다녔던 몇백 년의 세월이 한꺼번에 닥치자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채 작게 쪼그라들어버린 마녀였습니다. 죽음과 그 일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혼자 남게 된 소녀는 주소를 신청하고 간판도 달았습니다. 가게의 이름은 ‘수요일’이라고 정했어요. 일주일 중 딱 하루만 문을 열 거라는군요. 나머지 6일 동안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만화책을 보고 클럽에서 펀치를 마시면서 보낼 생각이에요. 그동안 마녀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지내느라 못해본 게 너무 많았거든요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박연경(Park Youn Kyung)
- 포토그래퍼
- 제이슨 로이드 에반스
- 글
- 정준화
- 일러스트
- AHNJEN
- PHOTOS
- COURTESY OF INDIGI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