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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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포르나제티 설립자인 피에로 포르나제티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회고전이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2세이자 가문의 상속자, 브랜드의 대표인 바나바 포르나제티를 만나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오래된 유산과 변하지 않는 가치, 새로운 생존법, 그리고 꽃무늬 셔츠와 나비가 그려진 넥타이 같은 것들에 대해.

건축가이자 산업디자이너, <Domus>의 창립자로 유명한 지오폰티는 피에로 포르나제티를 ‘진짜 이탈리아인’이라고 불렀다. 화가이자 조각가였으며 인테리어 장식가, 아트북 프린터, 전시기획자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동시에 패션에도 발을 걸쳤던 ‘진짜 이탈리아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이나 다재다능한 르네상스인이었다. 다채로운 재능과 이탈리아인다운 위트를 리빙 디자인 브랜드 ‘포르나제티’로 집약한 것이 아버지의 몫이었다면, 아들인 바나바는 가업에 생명을 불어넣으면서도 그 정통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오고 있다.

이번 회고전의 기획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전시 방향은 무엇이었나?
바나바 더 동시대적인 오브젝트를 보여주는 것. 리에디션(아버지의 아카이브 가운데 한정 수량, 전통 방식으로 재생산)보다는 리인벤션(선대의 미학적 유산에서 영감을 받되 본인이 새롭게 디자인해 생산) 피스를 소개하는 것, 그리고 그동안 한국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캐비닛, 러그 같은 큰 사이즈의 품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기억하는 아버지 피에로 포르나제티는 어떤 인물인가?
사랑스러운 분이자 자신만만한 예술가였다. 하지만 교육에 있어서는 엄하셨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아버지랑 종종 다투고 부딪쳤다. 같이 일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여서 독립을 선택했다. 하지만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 아버지가 경영난에 부딪치면서 같이 일을 해보자 제안하셨다. 돌아가니 다행히도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웃음).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동안 당신은 무슨 일을 했나? 아버지의 사업과 접점을 갖고 있었나?
잡지 에디터로도 일하고, 토스카나 지방에서 고건축 복원 프로젝트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밀라노의 유명한 미술학교인 아카데미아 디 브레라 출신으로 회화 작가를 꿈꿨다. 그리고 모든 그림과 디자인의 기본은 사람의 몸을 그리는 것이라 강하게 믿었다. 이런 신념이 당시 아트스쿨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충돌했다. 낡은 미술 교육 방식과 싸우다가 페인팅을 접은 아버지가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프린팅이었다. 석판, 동판 등의 프린트 방식과 기술을 발굴하고 연마해서 예술가들과 더불어 아트북이나 한정판 인쇄물을 찍어내는 밀라노의 중요한 인쇄 스튜디오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실크 소재에 프린트한 스카프 시리즈를 통해 패션 분야에 접근, 1959년에 니먼 마커스 상을 받기도 했다.

산업디자이너 지오 폰티와 피에로 포르나제티는 특히 각별한 파트너십을 유지했다고 알려졌다.
폰티는 아버지의 작품에 담긴 창의성, 기술, 테크닉을 보고 사랑에 빠져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일상생활에 쓰는 오브젝트에 아트적 요소를 부여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라 여겼다고 한다. 그때는 지금처럼 디자이너들의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순수하게 실험적인 협업이 가능했다고 한다. 가구, 아파트, 선박 내부, 바나 빵집 등의 인테리어, 리나센테 같은 대형 백화점 내부까지. 두 사람은 50년대에 천과 자수, 유리, 금속, 가구 등의 디자인 제품을 가지고 전시를 열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버지는 디자인을 대량 생산할 필요가 없으며, 적은 양을 한정판으로 만들어내면 된다는 확신을 안고 작은 아틀리에로 돌아왔다.

하지만 경영 위기가 찾아왔다는 걸 보면 소규모 아틀리에 운영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로열티를 받고 생산을 공장에 맡긴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통적인 생산 방식으로 직접 컨트롤했다. 게다가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쉴 새 없이 떠올리는 진짜 아티스트였기 때문에 경영에 능숙한 타입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티스트 성향이었다면 당신에게는 비즈니스맨의 피가 흐르고 있나 보다.
내 성향도 아주 사업 중심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완전히 아니었기 때문에…(웃음). 나는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경영을 배웠다. 공격이 아니라 디자인을 도용하려는 사람들, 정직하지 않은 파트너 같은 문제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포르나제티와 같은 브랜드는 굉장히 흥미롭지만 섬세해서 깨어지기 쉬운 정체성을 갖고 있다. 상업적인 제품으로 라이선스를 주기보다 이미지와 퀄리티에 있어 배타성을 지키고 싶었다. 대량 생산을 시작하는 순간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린다.

밀라노 현대미술관 트리엔날레의 뮤지엄 디렉터 실바나 안니카아리코는 포르나제티가 50~60년대 이탈리아 전통적인 주류 문화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천재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포르나제티는 어느 한 시대의 보편에 속하지 않는 대신 어떤 시대, 어떤 스타일도 살아남아 건너왔다. 하지만 그게 내가 패션 필드에 가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기도하다. 90년대에 모스키노, 아스페시 등의 패션 디자이너였던 로렌스 스틸과 협업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작업이었지만 패션은 너무 빠르고 순식간에 모든 걸 소진시켜버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한 시즌만을 위한 무언가는 아니다.

포르나제티의 디자인 모티프는 고전적이면서 모던하고, 전통적이지만 해체주의적이고, 아름답되 유머 감각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포르나제티 미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언급한 모든 것(웃음). 그리고 형태의 아름다움과 표면적인 장식성 두 가지의 적절한 균형이다.

필립 스탁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열린 문처럼, 포르나제티의 오브제는 방에 들이는 순간 현실의 공간이 아닌 것처럼 만드는 힘이 있다’라고 말했다. 포르나제티가 어울리는 공간은 어떤 장소일까?
보수적인 공간에 의외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장소가 어디든, 포르나제티의 오브제를 어디에 놓을까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유쾌한 스토리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서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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