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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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속세에서 신의 영역을 엿보는 특권, 혹은 미개한 미신으로 폄하된 신비로운 전통. 무속은 미술 작가이자 영화 감독인 박찬경이 수년간 파고들고 있는 주제다. 다큐멘터리와 재연으로 큰 무당 김금화의 인생 역정을 옮겨 낸 <만신>은 한 인물의 삶을 통해 한국의 뒤틀린 현대사를 되짚어보려는 시도다. 박찬경 감독과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배우 김새론에게 그들이 다녀온 신의 세계에 관해 물었다.

김새론이 입은 꽃무늬 미니 드레스는 레니본 제품.

김새론이 입은 꽃무늬 미니 드레스는 레니본 제품.

박찬경은 영화 팬보다는 미술 애호가들에게 더 익숙한 이름이다. 분단과 냉전이라는 필터를 통해 한국의 근대를 해석하고자 했던 초기부터 평단은 사진과 영상으로 구성된 그의 지적인 작업을 주목해왔다. 2008년은 이 아티스트가 일종의 전환점을 맞은 시기다. 1960년대~70년대에 활동한 민족 종교 집단들의 흥망사를 되짚어보는 영화적 설치 작업 <신도안>은 무속에 관한 박찬경 의 첫 번째 발언이었다.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영화가 박스오피스 기록을 갱신할 정도로 분단이나 냉전은 이미 대중문화 속에서도 충분히 논의가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좀 더 깊게 다뤄볼 무언가가 없을까 생각했죠.”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으며 종교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하나의 계기였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충분한 의미를 갖지만 다들 회피하려 드는 이야기에 쉽게 이끌린다고 했다. 급속한 서구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미신으로 폄하된 전통 신앙은 지금껏 우리가 듣지 못한 진실을 겹겹이 품고 있는 주제다. 결국 박찬경에게 무속이란 한국의 감춰진 역사를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나 마찬가지다.

개봉을 앞둔 <만신>은 미술작가로서 탐구하기 시작한 이야기를 영화감독으로서 정리한 결과물이다. 큰 무당이자 인간문화재인 김금화의 일생을 좇는 이번 작품에서 그는 한결 대중적인 화법을 시도한다. 영화는 실제 인물이 직접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와 배우들에 의해 재연된 드라마를 수시로 교차시킨다. 서로 다른 나잇대의 김금화를 나누어 연기한 건 김새론, 류현경, 그리고 문소리, 이렇게 세 명의 연기자다. 학교와 촬영장을 바쁘게 오가며 지내는 어린 배우에게는 이미 <만신>이 아득한 기억인 듯했다. 넘세(김금화의 어린 시절 이름)가 되어 맨발로 자갈밭을 뛰어다니고 무병에 시달린 게 작년인지, 아니면 재작년인지도 헷갈리는 눈치였다. 가장 많이 한 대답은 “기억이 안 나요”와 “잘 모르겠어요”다. “제가 실제로 겪어볼 수 없는 일이잖아요. 스릴러보다도 더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확실히 잡히는 느낌은 없었어요. 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감독은 김새론에 대해 말할 때 “천부적”이라는 표현부터 썼다. “뭐든 설명을 하면 제대로 파악해요. 연기 경험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아역 특유의 작위적인 느낌은 없고요.” 머리로 계산해서 만드는 흉내가 아니라 순수한 재능이 돌발적으로 빚은 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새론은 현장에서 박찬경과 나눈 대화는 거의 잊었다고 했다. 하지만 촬영 전 김금화 만신을 만난 경험만은 꽤 인상적이었다고 돌이켰다. “무섭거나 그렇지는 않았어요. 넘세에 대해 들려주셨는데 중요한 내용은 아니고 그냥 사소한 것들이었고요.” 역할과 관련된 것 외에 특별한 말씀은 없었을까? “뭐라고 하시긴 하셨는데 정확히 못 알아들었거든요. 어려워서 이해가 잘….” 인터뷰를 마무리하자 큰 부담을 떨친 듯 후련한 표정이 된다. 김새론이 자리를 옮겨 사진가 앞에 앉았다. 한참 셔터 소리가 울리는 동안, 박찬경도 자신의 카메라를 꺼내서 그 모습을 슬쩍 담는다. 감독과 배우라기보다는 아버지와 딸처럼 다정해 보이는 장면이기도 했다.

김새론이 스튜디오를 떠난 뒤에도 박찬경과는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전부터 파고들던 주제들이 김금화라는 인물 위에서 정확히 교차한다고 했다. “일단은 무속에 관한 이야기가 한 축이죠. 그리고 이분이 이북에서 피난 온 실향민이다 보니 남북 문제도 자연스럽게 언급돼요.” 곡절 많은 한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한국의 현대사에 관한 조망으로 확장된다. 일단 만신과의 만남에 대해서부터 질문해야 할 것 같았다.

롱 드레스는 자라 제품.

롱 드레스는 자라 제품.

<만신>은 인간문화재인 큰 무당 김금화의 일생을 좇아가는 작품이다. 첫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무속에 관한 리서치를 하다가 선생님의 자서전인 <비단꽃 넘세>와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를 읽게 됐다. 내용 자체가 무당의 시선으로 본 한국의 현대사였기 때문에 꼭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과거와 현재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조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워낙 큰 무당이라 처음에는 만나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흔쾌히 시간을 내주셨다. 첫 만남에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미술 작업으로든 영화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제안을 김금화 만신이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가?
그렇다. 워낙 굿을 비롯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걸 중요하게 여기신다. 일종의 사명이라고 느끼시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며 태도나 생각이 유연하고 세련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곁에서 지켜본 자연인 김금화는 어떤 사람이던가?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도 당당하고 낙천적이시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았으면 보통은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또 일상에서는 그냥 할머니인데 굿을 위해 무복을 갖추는 순간 굉장한 카리스마가 생기는 게 인상적이었다. 여든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진다.

사실 미술가 박찬경의 작업은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편이다. 그런데 <만신>은 극장에서 가능한 한 많은 관객과 만나야 하는 프로젝트다. 친절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
물론이다. 별로 안 친절했나?(웃음) 여러 극장에서 상영되고 많은 사람이 봐주는 게 내게도 중요한 문제다. 친절하되 군더더기는 없었으면 했다.

실제의 인물을 담은 다큐멘터리와 배우가 등장하는 재연 드라마가 뒤섞이는 구성이다. 이러한 방식을 택해야 했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나?
아무래도 김금화 만신에 관한 이야기니까 기록적 가치를 위해서라도 다큐멘터리적으로 인물의 현재를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 양반이 겪은 일을 구술로만 옮긴다면 생생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았다. 그건 과거를 과거처럼 다루는 방식 아닌가? 과거 역시 현재처럼 그리고 싶었다. 한 가지 더, 지금은 점쟁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무당은 굿을 하는 사람이다. 연기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말하자면 배우인 거다. 그래서 무당을 연기하는 배우를 함께 등장시키는 자체가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아이디어 같았다.

배우를 칭찬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신들린 연기’라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연기도 일종의 접신인 셈이다. 무당이 경험하는 실제의 접신, 그리고 예술의 형태로 행해지는 은유적인 접신을 영화 안에서 함께 보여줬다고 할 수 도 있겠다.
마지막에 노골적으로 영화와 굿을 연결 짓는 장면과 자막을 삽입하기도 했다. 굿과 비슷한 영화랄까, 그런 걸 만들어보고 싶었다.

김새론, 류현경, 문소리가 각각 다른 나잇대의 김금화를 연기한다.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이상적인 캐스팅이었다. 처음 셋을 떠올렸을 때 이렇게만 되면 더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류현경이 가장 먼저 합류를 했고, 김새론 측에서도 흔쾌히 출연 결정을 해줬다. 문소리는 특히 원작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애초의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캐스팅을 마친 셈이다.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문소리는 원작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문소리는 상당히 길게 이어지는 굿이나 소리 장면을 직접 소화하기도 했다.
전통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 시절에 창을 배웠다고 한다. 구수하게 잘해서 촬영도 수월했다. 그 장면에서 문소리가 “해 잡아 매놓고 달 잡아 걸어둘 수 없으니께…” 뭐 이런 대사를 하는데 그건 내가 써주지 않은 말이다. 자료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기억해뒀다가 애드리브를 한 거다.

무가에 등장하는 그런 가사는 무척 시적으로 느껴진다.
맞다. 배우가 내가 쓰지도 않은 대사를 읊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웃음).

김금화는 보통의 사람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암시 정도로 처리하는 대신 그의 눈에 비친 신의 세상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화려하게 묘사했다. 감독으로서 욕심을 낸 부분 같기도 하다.
요즘의 우리에게 익숙한 건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같은 서양의 판타지다. 그 영역 자체를 점령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속이나 불교만 봐도 알 수 있듯 한국에도 아주 강력한 시각적 판타지의 전통이 있는데 그냥 묵혀두는 느낌이다. 한국적인, 그러니까 지역 특징적인 판타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에둘러 표현하는 대신 환상을 대놓고 묘사하면서 이런 것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전체적인 색감 역시 가공된 파스텔 톤보다는 알록달록 흥이 나는 원색에 가깝다. 또 무속화나 민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으로 삽입하기도 했다.

물론 김금화 만신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전해주지만 이 작품의 목표가 전기 드라마는 아니다. 주인공은 민속 신앙, 혹은 예외적 예술가에 대한 한국인의 시선을 반영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기능하는 느낌이다.
그간 무속은 잘 다뤄진다 해도 어디까지나 음지의 문화였다. 그러지 말고 양지에서 떳떳하고 시원하게 풀자는 것이 <만신>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또한 이것은 개인사인 동시에 사회 전체의 문제다. 사회가 지나치게 빨리 서구화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역사를 되짚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미신이었던 게 아니라 미신이 된 거니까. 민속 종교를 미신으로 만든 힘이 무엇인지 밝히고 싶었다.

구상 중인 무속에 대한 프로젝트가 또 있는 것으로 안다. <신은 번개처럼 내린다>라는 제목의 호러이며 본격 상업 영화다. 어느 정도까지 구체화된 상태인가?
<만신>을 찍느라 미뤄둔 상태고 언제 어떻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빨리 진행시키려 했는데 덜컥 미디어시티서울의 예술감독을 맡게 됐다. 그래서 올해는 아무것도 더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일단 내년까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최근에는 미술작가보다 영화감독으로서의 행보에 더 치중하는 인상이다.
요즘도 구작들로 구성된 해외 전시는 꾸준하게 한다. 당연히 작가로서의 활동도 계속할 생각이다. 사실 나는 굉장히 행복한 예술가다. 영화가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보니 감독들은 작품과 작품 사이에 많이 놀지 않나. 미술 하는 사람들도 2~3년에 한 번씩 개인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튼 둘 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방학이 긴 직업이니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 많은 걸 배우며 생산적으로 살 수 있다.

무속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될까?
한국의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소수자, 즉 여성, 노동자, 도시 빈민 등에만 주목할 뿐 정신적으로 힘든 이들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 것 같다. 왜 아직도 신병에 걸리고 정신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 일이 벌어지는지,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이를 치유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정신적인 소수자가 아닐까? 내게는 무척 흥미로운 주제다. 샤머니즘의 전통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급속하게 현대화된 국가에 거의 30만 명에 가까운 무당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랍다.

관객으로서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인가?
데이비드 크로 넨버그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도 좋아한다.

미술작가로 출발해 최근 영화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감독으로 <셰임>, <노예 12년>의 스티브 매퀸이 있다. 그의 영화는 어땠나?
특히 <헝거>를 재미있게 봤다. <셰임>에는 좀 실망을 했는데 아무래도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스티브 매퀸은 미술작가로서도 아주 좋아하는 아티스트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역시 원래는 미술가였다. 이런 예들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본인의 취향과 가깝게 느끼는 건 아트 하우스 계열의 작품들일까?
나는 관심이 산만해서 이것 저것 다 해보고 싶다. 지금 당장은 잘 만든 상업 영화에 욕심이 있다.

이유가 있나?
감독뿐만 아니라 미술가도 관객에 제한을 두고 싶어 하진 않는다. 더 많은 이들에게 닿고 싶다는 건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욕심이다. 그리고 예가 많지는 않지만 상업 영화, 혹은 장르 영화로도 얼마든지 예술적 실험이 가능하니까.

형인 박찬욱 감독은 <만신>을 어떻게 평하던가?
너무 칭찬을 많이 받아서 혹시 동생이라 봐주는 건가 의심을 했다. 특히 문소리 연기가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숲에서 굿을 하는 장면이 애틋하면서 아름답다고 하더라.

<만신>의 감독으로서는 김금화 선생님의 반응이 특히 궁금했을 것 같다.
그분은 옛날 분인데도 예술은 예술가가 하는 거라는 생각을 엄격히 갖고 계신다. 그래서 웬만하면 뭔가에 대한 평을 잘 안 하신다. 그리고 좋다 나쁘다 대신 “고맙다”는 표현을 쓰신다. “고맙고 아주 재미있게 봤다”라고 인사를 들었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윤명섭
스탭
헤어 & 메이크업 / 이소연, 스타일링 어시스턴트 / 임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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