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옷장 밖에서도 패션 브랜드들의 부지런한 발자국을 어렵지않게 확인할 수 있다. 베르사체의 의자나 아르마니의 티 테이블, 에트로의 소파는 어느덧 같은 레이블을 단 드레스만큼이나 익숙해졌다. 올해 살로네에서 새로운 컨템퍼러리 가구 컬렉션을 발표한 에르메스 역시 적극적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는 패션 하우스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건축가 시게루 반과 장 드 가스틴이 공동 설계한 에르메스의 파빌리온 내부는 행사 기간 동안 엔조 마리, 드니 몬텔 & 에릭 벵케, 그리고 안토니오 치테리오가 완성한 가구들로 넉넉하게 채워졌다. 특히 필립 스탁, 론 아라드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이너로 꼽히는 안토니오 치테리오는 자신의 개성과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거실용 가구 컬렉션에 우아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녹여냈다. 막 6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청년처럼 정력적인 거장에게 이번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은 어땠는지, 스타일이란 단어를 왜 그토록 싫어하는지, 그리고 자택의 거실에는 어떤 물건들을 채워뒀는지 물었다.
interview with ANTONIO CITTERIO
이번 밀라노 국제 가구 박람회에서 에르메스와 함께한 작업을 선보였다. 그 내용을 설명해준다면?
소파, 독서용 의자와 콘솔, 커피 테이블 등 거실용 가구를 디자인했다. 각자의 본래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만드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기본 방향이었다. 16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상류층 환경에서 볼 수 있던 디자인 전통이 많은 힌트를 주었다.
비트라, 카르텔, B&B 이탈리아 등 여러 브랜드들과 다양한 공동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기존 프로젝트들과 비교할 때 이번 에르메스와의 협업은 어떤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을까?
르나 뒤마나 장 미셸 프랭크의 작업과 한 공간에 놓일 제품을 완성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고 영광스러운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장 미셸 프랭크는 지난 30여 년간 내가 멘토로 삼아온 거장이다. 그의 철저한 장인 정신, 완벽한 수공적 디테일, 특유의 현대적이면서도 에스닉한 감성에 어우러질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에르메스라는 믿음직한 브랜드와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수많은 클라이언트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한편으로 작업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험도 있었나?
어떤 프로젝트든 끝내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자기 비판이 있어야 발전도 가능한 것일 테고. 그런데 제작 당시 불만족스러웠던 결과물이 시간이 지난 뒤 새로운 관점에서 봤을 때 다시 만족스러워지는 경험도 종종 하게 된다. 자기 비판, 거리 두기, 재평가, 동기 부여, 창작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게 디자이너의 삶이다.
요란하거나 과시적인 것보다는 단순하면서도 기능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듯 보인다. 후자가 곧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일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좋은 디자인은 기능적이되 감성적이어야 하고 단순하더라도 평범하거나 지루해서는 안 된다. 디자이너가 제품 원래의 용도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소재를 충분히 이해하며 동시대적인 감각을 유연하게 발휘할 때 비로소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탄생한다. 과감한 표현을 무조건 억누르는 게 능사는 아니다. 어떤 것을 출발점으로, 그리고 도착점으로 삼을지 잘 파악해야 한다.
이번 에르메스 컬렉션에 선보인 제품 중 하나를 예로 들어 디자인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독서용 의자는 에르메스 박물관의 아카이브인 오래된 안장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것이다. 이 안장을 처음 봤을 때 그 비대칭적이고 율동적인 아름다음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제작 과정 자체가 기술적인 모험이었다고 들었다. 여행, 모험이라는 테마를 지니고 있는 르나 뒤마의 피파 컬렉션과도 맞닿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말 안장과 의자 본연의 기능성을 연결지었으며 여기에 모험이라는 테마를 더하고, 최적의 소재로 아이디어를 현실화했다. 이 모든 과정이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일’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스타일이란 이미 규정된 하나의 형태가 아닌가?
그걸 처음부터 목표로 삼고 좇는 태도는 무의미하다.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목적에 부합해야 하는지 잘 파악해서 프로젝트의 성격에 맞게 발전시키는 행위가 디자인이다. 창의적인 형상은 이런 과정에 의해 당위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여야 한다.
디자이너로서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소재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에 소개된 에르메스의 마티에르 컬렉션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청동, 구리 같은 오래된 금속, 즉 현대적 산업화와 다소 거리가 있는 소재에 관심이 많다. 이런 소재를 다룰 때는 다양한 경험과 정확한 테크닉이 필수다. 특히 목재, 가죽, 패브릭 등 다른 재료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려면 철저하게 준비하고 완벽하게 계산해야 한다. 작업 과정이 아주 예민하다는 점 때문에 도리어 더 매력적이다.
디자이너인 동시에 건축가다. 두 역할 중 본인에게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어느 쪽인가?
내겐 두 가지 일이 그리 다르게 여겨지진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건축가지만 소재나 디테일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제품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에도 본능에 가깝게 이끌린다. 큰 빌딩이든 작은 제품이든 내가 느끼는 흥미와 매력은 비슷하다.
몇 년 전 가진 인터뷰에서 성당이나 미술관처럼 비상업적인 공간을 디자인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성당 건축은 이미 진행한 바 있고, 미술관 프로젝트 역시 계획 중이다. 곧 출간할 건축 책에는 이런 프로젝트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회사가 크게 성장한 요즘엔 공익과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고자 한다. 큰 지진을 겪은 이탈리아 아퀼라 지역의 성당 재건축 사업에 참여한 것도 그래서였다.
가구, 빌딩, 조명, 주방용품, 그리고 운동기구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디자인한다. 안토니오 치테리오는 일상에서도 안토니오 치테리오가 디자인한 것만을 사용하면서 생활할까?
아니면 그보다 다른 사람들의 디자인을 더 자주 접하면서 살까? 집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눈 작은 추억의 조각들을 쌓아가며 찬찬히 완성해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여러 동료들이 디자인한 제품 중에서도 애정을 갖고 사용하는 게 많다. 예를 들면 필립 스탁,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까차 도미니오니, 그리고 아내인 테리 드완의 작업처럼. 이젠 에르메스의 제품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구입할 여력이 된다면(웃음).
그렇다면 당신 자신이 디자인한 것 중 한 명의 소비자로서 가장 좋아하는 제품은 무엇인가?
1997년에 발표한 소파인 찰스는 사실 내가 집에 두고 직접 쓰기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게 지금까지도 꾸준히 생산되는 베스트셀러 상품이 되어버렸다. 순수하게 당시의 개인적 필요에 의해 즐겁게 완성한 디자인이 대중적으로도 널리 사랑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안토니오 치테리오 자택의 거실에 초대된다면 어떤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을까?
그리고 거실을 잘 꾸미기 위해 기억해야 할 내용을 한 가지만 말해준다면? 우리집 거실 말인가? 엄청나게 편안한 찰스 소파와 에르메스 담요(웃음)! 농담이 아니다. 작년 생일에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담요가 소파 위에 항상 놓여 있다. 거실을 꾸미려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건네겠다.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실제로 사용하는 가구만을 둘 것. 그러면 세월이 갈수록 제 가치를 드러내는 공간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 에디터
- 인터뷰|우리 (밀라노 통신원)·, 피처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김두현, courtesy of HER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