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마시던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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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향해 흔들흔들, 한밤중 으슥한 바를 찾은 술꾼들은 바텐더에게 말한다. ‘늘 마시던 거로.’ 진열장에 꽂힌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정처 없이 흔들릴 때면 언제나 손길이 향하곤 하던 ‘원 픽’을 애주가들이 보내왔다.

글라스웨어 모두 바카라 제품.

번다 버그 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알코올 한 방울에도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예민한 체질이지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술 한 잔을 홀짝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습관을 들인 건 이 무렵이다. 일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 특히 혀는 알코올이 필요하다며 펄럭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자주 찾기 시작한 술이 흔히 ‘번디’라고 불리는 ‘번다버그 럼’이다. 퇴근 후 대충 옷가지를 벗어두고 유리잔에 큼지막하게 얼린 얼음을 2~3개 넣은 후 럼을 조금씩 따라 잽싸게 한 잔을 완성한다. 목 너머 유독 순하게 감기는 번다버그 럼은 온더록스로 즐길 때 바닐라 향취가 진하게 풍기면서 그 잠재력이 폭발한다. 두 번째 잔은 콜라를 섞어 럼콕으로 좀 더 캐주얼하게 즐긴다.

최상의 상황 호주 골드코스트에 위치한 야외 펍에서 저녁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잔. 처음 번다버그 럼을 마신 그 때를 회상하기에 이보다 좋을 순 없다.

몽키 47

주방 일을 마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허기가 찾아온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동네 바에 찾아가 간단한 안주와 함께 술을 즐기는 것이 습관이 될 무렵 만난 술이 ‘몽키 47’ 진이다. 몽키47은 독일 블랙포레스트에서 채취한 47가지 보태니컬로 증류한 만큼 한 잔 들이켜면 젖은 이끼, 야생화, 솔잎, 산딸기 향이 입 안에서 휘몰아친다. 특이하게도 코르크 병마개로 마감돼 있는데, 이를 둘러싼 측면에 금속 링이 감겨 있다. ‘여럿이 모여 하나가’란 의미의 라틴어 ‘E pluribus unum’이 새겨진 반지를 보자마자 주방에서 동료 요리사들과 나누는 팀워크가 떠올랐다. 요리사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장이지 않을까 생각해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최적의 장소 경리단길에 위치한 한국 술집에서 일하던 때 일을 마치는 밤 1~2시가 되면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바 ‘프레그릿’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간신히 어둠만 쫓을 정도로 듬성듬성 촛불이 놓여 있고, 세월의 흔적이 나앉은 벽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걸려 있는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서만큼은 정말 사람 냄새 나는 대화로 하룻밤을 지새울 수 있다. – 김봉수(도마 셰프)

호세쿠엘보 트레디셔널

세월이 흐르면서 입맛도 바뀌는데, 술도 예외가 아니다. 몇 년 전 잘 숙성된 위스키나 브랜디를 한창 즐기던 무렵을 지나 어느샌가 술을 고삐 풀리게 마시는 날이면 테킬라 ‘호세쿠엘보 트레디셔널’을 찾는 날이 많아졌다. 아가베 향과 질감이 섬세하게 피어오르고, 캐러멜로 착색 과정을 거치지 않는 등 인위적 공정을 최소화한 것이 이 술의 특징이다. 잔에 따랐을 때 찰랑이며 차오르는 투명한 액체는 막 사회생활에 첫발을 뗀 순간을 떠오르게 만든다. 젊었던 한때를 소환하는 듯해서 요즘 특히나 손길이 자주 머문다. 바 안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안주 삼아, 스프라이트를 섞어 슬래머(스트레이트 잔에 테킬라와 소다수를 채운 다음 냅킨으로 위를 덮어 테이블에 강하게 내리친 후 단번에 마시는 방식) 스타일로 연거푸 마신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잔을 비운 후 젖은 냅킨을 천장에 힘껏 던져 붙이는 순간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최고의 안주 당도 높은 오렌지, 혹은 설탕과 계핏가루를 뿌린 라임 조각을 곁들이면 최고의 조합을 맛볼 수 있다.

아드벡 우가달

동료들과 ‘소맥’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던 직장인 신분을 벗어나니 조용히 ‘혼술’ 로 하루를 달래는 날이 많아졌다. 특히 많은 사람을 만난 날이면 어김없이 달큰한 무언가가 당기는데, 군것질을 싫어하는 사람이 마시기 좋은 달콤쌉싸름한 위스키 ‘아드벡 우가달’이 나의 단골 술이다. 한 잔 따르자마자 느껴지는 아로마는 굉장히 알싸하다. 스모키하고 매운 향에 정신이 아찔해지다 잔을 흔들면 이내 부드럽고 달큰한 향이 조금씩 올라온다. 잘 녹인 캐러멜 같기도, 푹 졸인 과일 조림 같기도 하다. 뒷맛에 남는 은근한 짭짤함 덕분인지 이내 잘 구운 베이컨이 떠올라 입 안에 흥건히 침이 고일 때도 많았다. 아드벡 우가달을 즐기는 루틴이 있다. 우선은 강렬한 맛을 그대로 즐긴 후 물을 몇 방울 떨어트려 슬며시 풀어진 향과 맛을 즐기는 것. 그래야만 셰리 오크통에서 숙성해 완성된 부드럽고 달콤한 뉘앙스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최고의 안주 식사를 하지 않은 상태라면 매콤한 소시지를 곁들여 불맛과 술맛을 동시에 즐긴다. 식사 후 소화 겸 한잔하는 상황에선 멜론에 하몽을 곁들여 술맛에 자극된 입 안을 달콤함으로 진정시킨다. – 천수현(애주살롱 대표)

미셸 & 썬 옐로우 스폿 12년

런던 쇼디치에 위치한 바 ‘킥’에서 일하던 당시의 하루는 늘 이렇게 시작되곤 했다. 출근하자마자 바에 배송된 신제품을 모조리 마셔보는 것. 킥에서 일하며 새로 알게 된 사실도 하나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자국 위스키만 주문한다는 것이다. 아이리시 위스키 중에서도 미셸 & 썬에서 나온 ‘옐로우 스폿’은 바의 단골이자 인근에서 음악을 하던 아이리시 무리가 항상 시켜 마시던 술이었다. 어느 날엔가 평소처럼 옐로우 스폿을 내어주다 우연히 한 잔을 얻어 마셨는데, 첫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대체 이 위스키는 뭐지?’라고 생각하며 그날 퇴근하고 한 잔을 더 맛봤을 정도니까. 같은 회사에서 나온 또 다른 라인 ‘그린 스폿’도 마셔봤지만 그건 지극히 기본에 충실한 버전이었다. 옐로우 스폿은 뭐랄까 동서양이 섞인 위스키처럼 느껴진다. 포르투갈의 디저트 와인 ‘마데이라’가 떠오르기도 하고. 한 잔 들이켜면 복숭아, 말린 체리 향이 밀려오다가 백포도 향을 경유해 바닐라, 꿀 향이 진동하듯 피어오른다. 증류 과정에서 셰리, 말라가, 버번 캐스크 숙성을 거쳤기 때문에 이런 특별한 맛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거다. 위스키에 있어 옐로우 스폿에 대적하는 대체품을 아직 찾지 못했다. 현재 정식 수입이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1년에 한 병 정도쯤 이래저래 주변에서 선물을 받아 아주 아껴서 마시고 있다.

최고의 안주 대화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음악 선곡은 정말 슬프다. 술맛도 떨어뜨린다. 괜찮은 안주는 적당한 사운드 시스템으로 재생시킨 센스 있는 선곡이지 않을까? – 홍원기(와일드덕 칸틴 대표)

오반 14년

현재 헤드 바텐더로 몸담고 있는 바 ‘바람’에는 위스키를 처음 접하는 손님이 굉장히 많이 찾아온다. 40도가 넘는 독주에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금세 적응하고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스키가 ‘오반 14년’이다. 짭짤하면서도 단맛이 잘 어우러지고 뾰족함 없이 부드럽게 다가오는 스모키한 풍미 덕에 오반을 건넸을 때 퇴짜를 맞은 기억은 거의 없다. 오반은 한동안 강렬한 피트 향에 반해 아일레이 위스키를 즐길 무렵에도 중간 잔으로 어김없이 선택하던 위스키였다. 처음 홀짝일 때 느껴지는 갯내에 익숙해질 무렵 잘 익은 무화과, 벌꿀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최고의 안주 스테이크 하면 버번위스키를 떠올리지만 오반도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숙성 회와의 궁합도 꽤나 괜찮았던 기억이 있다.- 박수철(바람 헤드 바텐더)

하바나 클럽 3

이촌동에 자리한 바 ‘헬카페 스피리터스’를 기획한 이유는 두 가지다. 취기가 슬며시 올라오는 밤에 빈칸처럼 모자란 한 잔을 마시기 좋고, 타협 없이 만든 ‘본격적인’ 칵테일을 홀짝이기 좋은 공간을 만들겠다는 각오였다. 럼 ‘하바나 클럽 3년’을 기주로 만든 보스턴 쿨러는 이곳에 머물며 가장 자주 마신 칵테일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마시자’라는 정리의 차원에서든, ‘이제 본격적으로 마셔볼까?’라는 기합의 차원에서든 안성맞춤인 술이다. 레몬, 진저 에일, 하바나 클럽 3년까지. 마치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스르르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주문이 있는 것만 같은 조합이다.

최적의 장소 아무래도 헬카페 스피리터스. 혼자 마시기엔 어딘가 초라하고, 그렇다고 여럿이 함께하기엔 촘촘한 관계가 피곤하게 느껴질 무렵 주저 없이 향한다. – 임성은(헬카페 스피리터스 대표)

라가불린 16년

어린 시절부터 달고 살았던 아토피 피부염 탓에 으레 음주를 배우는 시기인 스무 살 초반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은 술을 밥보다 좋아한다 자부할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엔 ‘술을 대체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는 실언을 늘어놓았을 정도니까. 그런 나의 음주 생활은 피부염이 사라진 2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어느 겨울날 우연히 맛본 싱글몰트 위스키의 찌르듯 다가오는 피트 향에 빠져 그때부터 위스키에 발을 깊숙이 들였다. 그 무렵 처음 맛본 이후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가장 아끼리라 생각 하는 위스키가 ‘라가불린 16년’이다. ‘한겨울 청아하고 깨끗한 찬 바람에서 나는 냄새’라는 표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라가불린의 풍미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 스코틀랜드를 떠올리게 한다. 추운 계절 따뜻한 실내로 막 들어와 코트만 대충 벗어 던지고 한 잔 즐기면 그때부터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과하지 않은 피트 향으로 시작해 목 끝으로 뜨뜻한 기운이 전해지며 마무리되는 수순. 라가불린 16년은 특히나 시린 계절에 즐기기 탁월한 나만의 작은 ‘럭셔리’다.

최고의 안주 하리보 구미베어. 개인적으로 라가불린은 상온에서 아무것도 섞지 않은 채 니트로 마시는 것을 즐긴다. 안주도 예외는 아니라 입을 세척시키는 정도의 과하지 않은 음식을 곁들일 때가 많다. 시큼달달한 젤리의 맛이 건조해진 입 안에 침을 돌게 하는 것은 물론, 자칫 연거푸 마셔 지루하다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을 막아준다. – 이리아(스피키지썸띵 대표)

큐로 나푸에 진

내게 ‘진과 럼 중 무엇을 더 좋아해요?’라는 질문은 비와 눈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묻는 것과 같다. 물론 고민할 것 없이 대답은 ‘둘 다’이지만. 하지만 ‘늘 마시는’ 술에 부합하는 단 한 잔을 고르라면 단연 진을 꼽는다. 대개 일을 마치고 피로와 허기가 온몸을 휘감을 때 바를 찾기 마련인데, 쓰러지듯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 늦은 식사부터 주문한다. 뜨거운 스튜에 술 한 잔이면 하루가 완벽하게 마무리되기 마련이니가. 그리고 언제나 첫 잔은 입 안을 개운하게 만드는 진토닉으로 요청한다. 세상에 널린 수많은 진이 각각 다른 이유로 매력적이지만 큐로에서 나온 ‘나푸에 진’은 핀란드에서 증류한 진답게 자작나무, 산자나무를 첨가해 만든다. 잔에 한 잔을 따르면 숲에서나 느낄 법한 청량하고 개운한 향이 진동하듯 퍼진다. 따뜻한 욕조에서 반신욕을 마친 후 피로가 풀리는 기분. 나푸에 진을 들이켰을 때 가장 먼저 스치는 감상이다.

최적의 장소 서교동 골목에 자리한 오래된 바 ‘팩토리’. 몸이 으슬으슬할 때 진토닉 한 잔 들이켠 후 뜨거운 스튜를 먹으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아, 살 것 같다’고. – 이지연(쇼콜라디제이 대표)

크리스찬 드루앵 칼바도스 VSOP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에트르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겨울 초입이라 그 유명한 흰 절벽과 바닷가 풍경은 좀 황량했고, 인상파에게 영감을 줬다는 부서지는 빛은 충분히 따뜻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좀 시려서 찾아간 큰 길가 카페에서 나는 이 지역의 특산술 칼바도스를 마시기 위해 ‘칼바도스 쇼’라고 적힌 메뉴를 주문했고 이름 그대로 정말 ‘핫 칼바도스’, 데운 칼바도스가 나왔다. 증발하는 알코올을 조심했어야 하는데, 겁도 없이 코를 갖다댔다가 코점막이 찢어질 뻔한 기억이 있다. 펀치를 얻어맞고 잠깐 뒤로 나자빠졌다가 적당히 식은 칼바도스를 다시 마셨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따뜻함이 전해졌다. 들쩍지근하지 않은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뒷맛은 산뜻하고 말끔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도 칼바도스를 편애한다. 바에서 주문하는 가장 마지막 잔을 칼바도스로 하거나 브랜디가 들어가는 술을 칼바도스로 대체하기도 한다.

최상의 상황 집에 칼바도스 한 병을 사두고 따뜻하게 데운 칼바도스를 머리맡에 두었다가 반쯤 마시다 잠드는 것.내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다. –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헨드릭스 진

분방한 여름밤이면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다. 양가위의 홍콩 영화, 야마시타 타츠로의 시티팝, 마일즈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 최근 이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한 것이 있다. 투명하고 상쾌한 진 ‘헨드릭스 진’. 증류 과정 중 오이에서 추출한 내추럴 오일을 첨가하는 헨드릭스 진에선 개운한 오이 향이 아주 은은하게 끼친다. 앞서 고백하자면 평소 오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여름 날 끈적이는 몸을 이끌고 들어간 술집에서 들이켠 헨드릭스 진은 오이에 대한 내 편견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날 빠른 속도로 연거푸 들이켠 헨드릭스 진이 몇 잔이나 되는지 좀처럼 기억은 나지 않아도 그날 느낀 기분 좋은 오이 향만큼은 지금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최상의 상황 애인이 집에 놀러 왔을 때. 헨드릭스 진과 토닉을 섞어 예쁘게 담은 아이스크림과 함께 건넨다. 상쾌함과 달달함은 세팅됐으니 음악으로 묵직함을 채운다. 농도 짙은 재즈 바이닐을 플레이하고 헨드릭스 잔을 부딪친다. 그렇게 분위기에 취하고, 달큼함에 취하고, 마지막엔 서로에게 취한다. – 김성지(<아레나 옴므 플러스> 패션 에디터)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장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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