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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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의 여성이 오랜 시간 남성으로만 이뤄진 조향사 업계를 뒤흔들며, 오늘날 가장 유혹적인 향수를 만들고 있다.

1.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아웃레이져스 100ml, 28만원.

2. Nars 어데이셔스 오 드 퍼퓸 50ml, 21만원대.

3. Diptyque 필로시코스 오 드 퍼퓸 75ml, 21만원.

4. Hermes 트윌리 데르메스 오 프와브레 50ml, 136천원.

5. Jo Malone London 베티버 앤 골든 바닐라 코롱 인텐스 100ml, 248천원.

나와 남편이 처음 만난 곳은 클럽이나 레스토랑이 아니다. 나는 그를 리버티 백화점의 사랑스러운 향수 가게에서 만났다. 그는 내가 그날 사용한 향을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샤넬의 ‘No.5’와 같은 아이코닉한 향수였다면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을 테다. 그는 딥티크의 ‘필로시코스’라는 이름과 그것이 여성 조향사(올리비아 지 아코베티)가 만든 향수라는 것까지 정확하게 짚어냈다. 이 정도 남성이라면 적어도 술 한잔 같이 마셔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의 향수 컬렉션에는 여성 조향사가 만든 향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최근에 눈에 띈 제품은 나스의 ‘어데이셔스’다. 프랑수아 나스는 평소 딥티크의 ‘필로시코스’를 즐겨 뿌렸고, 그러한 개인적인 선호도를 바탕으로 자신의 브랜드에서 내놓는 첫 향수의 조향사로 올리비아 지아코베티를 선택했다. 그 외에 라티잔 퍼퓨머의 셀린 엘레나가 만든 향수 ‘바나 바나나’와 프리스크립티브스의 ‘칼릭스(조향사는 소피아 그로스만)’, 로베르 피게의 ‘프라카(조향사는 저메인 실리에)’ 등 여성 조향사가 만든 다양한 클래식 향수도 소장하고 있다. ‘프라카’는 자주 사용하지 않아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향수다. 이 향수를 뿌리면 행복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마돈나가 사랑했던 향수이니까.

인류 최초의 조향사로 기록된 여성은 바빌론 제국 시절의 화학자 타푸티 벨라테칼림으로, 그녀는 약 기원전 1200년경에 향을 추출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 이후 여자 조향사는 항상 존재했지만, 최근에 와서야 그들의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작년에 많은 여성이 향수 업계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스위스의 조향사인 크리스틴 나이젤은 에르메스의 향수 파트를 지휘하는 최초의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마틸드 로랑 역시 까르띠에에서 향수 파트를 이끌게 되었다. 캘빈 클라인의 ‘이터니티’와 에스티 로더의 ‘화이트 리넨’, 랑콤의 ‘트레조’를 만들며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조향사 중 한 명이 된 소피아 그로스만은 수십억 가치를 지닌 향료 및 향수 회사인 IFF(International Flavors & Fragrance)의 부회장이다. 얼마 전 프레데릭 말을 만났을 때, 요새 재밌고 젊은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는 대부분 여성인 것 같다고 하더니, 결국 프레데릭 말의 새로운 향수 ‘셀 거쓰(Sale Gosse)’의 조향사로 32세의 떠오르는 스타인 패니 발을 발탁했다.

‘남자들만의 네트워크(Old Boy Network)’로 알려진 향수 업계에서 여성 조향사들은 어떻게 돌파구를 찾은 걸까?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고, 딸들은 그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 직업에서 말이다. 겔랑의 향수 왕가에서 태어난 여성, 파트리샤 드 니콜라이는 가족 사업에서 직책을 얻지 못하고 암암리에 제외되자, 자신의 향수 브랜드인 니콜라이를 론칭했다. 유명 향수 제조사 오르몽드 제인의 창립자인 린다 필킹턴은 디지털 혁명이 이러한 변화에 크게 일조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라스(엘리트 조향사가 많이 탄생하는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어떤 혈연이나 지연 없이 독학한 여성으로,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까지 남자 조향사와 동등한 기회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초반에는 향수의 원료조차 살 수 없었어요. 저는 어떠한 실적 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여성이었으니까요. 인터넷은 성별과 나이를 초월한 모든 이들이 평판 있는 공급자와 퍼퓸 하우스로부터 원료를 직접 주문할 수 있게 만들어줬죠.” 그녀의 설명이다.

과거에 비해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젠 더-플루이드’ 시대에 여성 조향사의 인지도가 올라가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닌 듯 하다. 남자, 여자 향수라고 해서 자신의 성별과 반대되는 제품을 거부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을 남긴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개념이 좀 더 유연해졌다는 의미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 평론가 중 한 명인 루카 투린은 프랑스 상류층 백인 남성으로 이뤄진 조향사 업계엔 여전히 성 차별이 만연하다 말한다. “천재는 성별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분포되어 있어요. 하지만 인식은 그렇지 않죠.” 에르메스의 크리스틴 나이젤도 여성 조향사가 되는 길이 항상 꽃길은 아니었다고 인정한다. “이 일을 하며 저 자신이 향수 제조사의 딸도 아니고,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극복해야만 했어요. 그러나 가장 큰 장애물은 제가 여자라는 점 이었죠.”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장애에 굴복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선택받는다면, 오롯이 당신의 창의력과 특징 덕분이지 성별과 피부색, 나이, 인종, 종교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클레어 웨이트 켈러(지방시 아티스틱 디렉터)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라 버튼(알렉산더 매퀸,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처럼 여성이 메이저 패션 하우스를 이끄는 상황에서 (때때로 쿠튀르 비즈니스에 자금을 지원해 주는) 향수 업계가 이렇게 변화해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밀러 해리스 소속 조향사였다가 현재는 자기 브랜드인 퍼퓨머 H를 운영하는 린 해리스도 패션과 뷰티 업계 속 여성의 역할 변화가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조향사 업계의 여성화는 진행 중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이 필요하죠. 이러한 현상이 당연하게 여겨지기까지 아마 수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거예요.” 나이젤이 한마디 덧붙인다. “제 명함엔 여전히 ‘Parfumeur(조향사를 뜻하는 남성 명사)’라고 적혀 있지, ‘Parfumeuse(조향사를 의미하는 여성 명사)’로 쓰여 있지 않아요. 제 직업이 아직도 남성 중심으로 묘사된다는 거죠. 이 점은 많은 바를 시사해요.”

이제 더 이상 향수를 만들고 구매에 이르기까지, 향수 제조와 관련한 모든 과정은 남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여성 조향사가 만든 향수를 만나게 될 거라 기대하는 이유다.

뷰티 에디터
김선영
SALI HUGHES
아트워크
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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