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하는 습관

이채민

늘 메모를 하지만, 정말 메모다운 메모를 하고 있는 걸까? 사유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선 먼저 메모 잘하는 인간부터 되는 게 순서일지도 모른다.

10월메모
‘다 기억할 자신이 없으면, 적어라.’ 사회 초년생 시절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이다. 나에 게 떨어진 ‘오더’를 기록으로 남겨놓는 건 이후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의 뒤탈을 뒤집어쓰는 상황에서 증거로 작용하기도 했다. 요즘 기억이 깜박한다는 선배가 딴소리를 하는 것 같을 때, 나의 억울함을 풀고 자위하는 사적이고 소극적인 용도였지만. 얼마 전 인터뷰로 만난 한 아이돌 가수는 집 안 곳곳에 포스트잇을 붙여 둔다고 했다. 사소하든 중요하든 ‘해야 할 것’을 적어놓은 포스트잇은 미션을 완료할 때마다 떼서 버리면 된다. 하지만 업무나 자기 계발과 관련해 이뤄지는 복잡다단한 기록이 제 의미를 가지려면 그건 어떤 모양새여야 할까? 성공한 CEO나 세기의 천재들이 설파한 메모 습관은 대한민국 입시에서 국영수 위주로 학습해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강력한 비결인 것 같은데 말이다. 새삼 메모의 효용에 대해 떠올려보는 이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양방향으로 메모를 일상화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듯해서다. 뇌의 짐을 덜기 위한 메모가 또 다른 짐이나 쓰레기로 전락하고, 반대로 어딘가에 해놓은 그것이 나의 의식을 벗어나 안드로메다에서 떠 도는 일이 다반사다.

메모의 달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접근법은 있다. 그건 ‘메모를 한다’가 아니라 ‘메모를 사용한다’는 마인드다. <메모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전직 카피라이터, 고니시 도시유키는 메모를 고기나 생선에 비유한다. 신선할 때는 날것으로도 쓸 수 있지만, 그대로 두면 썩어서 쓸모가 없다는 거다. ‘응, 당신들이 지금 아무리 열심히 적어봤자 그거 별 소용 없잖아?’를 전제로 깔고 있는 그는 시간이 지나서도 유효한 미래적 메모에 포인트를 둔다. 그의 제안 중에서 귀엽고 쉬운 것 세 가지만 꼽자면, ‘동그라미, 화살표, 그리고 물음표 등의 기타 기호’를 적극 활용하는 방법이다. 회의와 대화 중 메모 시 그 자리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나 나중에 조사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은 부분에 동그라미를 쳐두면, 추후 그 동그라미들이 메모 당시 내 판단을 복기하는 발자취가 돼줄 것이다. 화살표는 ‘따라서’ ‘거기에서부터’ ‘더 나아가’와 같은 접속사다. 그저 서술형이 아니라 인과관계와 연관성에 따라 화살표를 잘 사용하면 무작위로 써진 정보에 질서가 부여되는 셈이다. ‘?’ ‘VS’ 등등의 기호가 있는 메모를 들여다보면 내가 해야 할 과제가 문득 발견되기도 한다. 상대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만 의문 이 생길 때, 그냥 받아 적거나 안 적은 채 넘어가지 말고 질문 거리를 남겨두라는 뜻.

기호를 곁들이는 게 좋은 메모 습관을 들이기 위한 작은 장치라면, 훈련에 가까운 메모법도 있다. 영국의 심리학자 토니 부잔이 개발한 ‘마인드맵’은 오랫동안 많은 기업들에서 업무 능률과 창의력 향상을 위해 교육 자료로 쓰는 노하우다. 예를 들면, 노트 한가운데 ‘행복’이라는 단어를 쓰고서 연상되는 갖가지 키워드를 파생시킨다. ‘휴식, 고기, 쇼핑, 마감 쫑’ 등 여러 가지가 있겠다. 각 단어마다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연상의 가지를 쳐가는 이 때 포인트는 각각을 방사 형태로 적는 것. 한 점에서 시작된 작업이 거미줄처럼 확장하다 보면 서로 동떨어져 있다고 여겼던 연상이 어느 순간 연결되기도 하고, 결국 나무뿌리나 신경 조직을 그려놓은 듯 복잡하고 풍성해진다. 이런 메모는 양이 많고 무질서해 보여도 의의가 생긴다. 최소한 내가 이해하고 사고한 것들을 풀어놓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기술에서 강조하는 건 단어뿐 아니라 숫자, 목록, 조합, 그림과 같은 시각적 리듬 등을 활용해 뇌를 종합적으로 쓰는 일이다. 그러려면 손으로 쓰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마인드맵 방식의 메모가 가능한 앱과 웹 프로그램도 여럿 있다.

어떤 사람에겐 메모라고 해도 활자보다 이미지가 더 자연스럽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인 <나 혼자 산다>에서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의 신발장이 비쳤을 때도 그런 순간을 봤다. 워낙 빽빽하게 쌓인 구두 상자 틈에서 매번 원하는 것을 찾아 상자를 들추긴 무리일 터. 비주얼리스트가 택한 방법은 상자의 한 면마다 해당 구두의 모양을 간략히 그려놓는 것이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면 차라리 ‘쥬세페 자노티, 검정 스웨이드, 뒷굽에 크리스털 박혔음’이라 고 썼을 것이다. 메모를 좀 더 시각화하여 구성하는 건 누군가의 말을 그냥 받아 적지 않고 그에 대한 내 생각도 곁들이는 것과 더불어 메모의 효과를 간증하는 이들이 많이 쓰는 노하 우다. 직관적인 ‘시각화’는 앞서 말한 기호나 도식을 활용하는 메모법, 뇌를 풀 가동하는 마인드맵의 원리와 겹치는 지점이 있다.

의미 있는 메모를 위한 각종 시도가 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그 메모와 내가 다시 만나야 한다. 여기저기 뒹구는 프린트 속에서 저마다 썩어갈 메모를 생각하면 하나의 노트라는 플랫폼으로 일원화시키기만 해도 선방하는 셈이다. 메모와 쉽게 재회한다는 측면에서는 아날로그보다 디지털에 유리한 점이 있다. 앱과 웹 프로그램으로 사용 가능한 에버노트, 원노트, 포켓 등을 비롯해 스마트폰의 가장 단순한 메모장에서도 가능한 기능은 바로 검색. 키워드나 태그로 검색할 의지마저 솟아나지 않을 정도로 쟁여두는 디지털 정보가 많다는 게 장벽이라면 장벽이랄까? 적어도 메모를 위한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계 간의 장벽은 꽤 허물어졌다. 몰스킨의 ‘스마트 라이팅 노트’처럼 두 세계를 하나로 합쳐버리는 아이템도 존재한다. 이것은 태블릿 PC가 아닌 종이 노트다. 그런데 전용 펜으로 노트에 필기하면 실시간으로 앱과 동기화되고, 노트 페이지마다 자리한 작은 편지봉투 그림을 펜으로 누르면 메모 내용이 메일로 전송된다. 코딩이 입혀진 종이라서 손글씨가 담긴 그대로 마치 스캔한 것처럼 구현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최근 국내 업체에서 출시한 ‘네모닉’은 손바닥에 들어오는 크기의 소형 프린터다. 잉크도 필요 없는 이 프린터는 스마트폰이나 웹상의 메모를 포스트잇과 같은 형태로 손쉽게 출력해준다.

쓰기보다 ‘내 머릿속에 저장’을 선호하는 사람에게조차 메모란 특별한 이벤트가 될 수 없는 행위다. 그러나 가끔 유명인의 서재보다 더 훔쳐보고 싶은 건 너무 사소해서, 혹은 사적이어서 무의식이 묻어나기도 하는 기록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휘갈긴 노트는 종이 쪼가리 한 장 일지언정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고이 모셔진다. 물론 스스로를 위한 메모가 다른 차원의 효용을 발휘할 때도 있다. 상급자의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누군가 충실히 작성한 노트는 말보다 강력한 증거가 되어 법정으로 간다. 과거의 기억으로서, 그를 넘어 생각의 실마리가 되는 도구로서의 메모. 어쩌면 사유하는 인간 이전에 메모 잘하는 인간이 먼저일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써놓고도 무슨 글자일까 알아볼 수 없이 긴박함만 느껴지는 암호 앞에선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든다.

에디터
권은경
사진
GETTY IMAGE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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