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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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혹은 리조트 컬렉션은 본래 ‘연말연시 연휴 기간에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행이라는 코드와 밀접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장소 선정 자체가 시작이자 전부인 셈이다. 현대 트렌드를 논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패션 하우스인 구찌는 2017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일 장소로 영국 런던을 택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 복도를 따라 런웨이가 펼쳐졌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 복도를 따라 런웨이가 펼쳐졌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 복도를 따라 런웨이가 펼쳐졌다.

서유럽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섬나라, 영국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수식어 중 하나는 ‘변덕스러운 날씨로 유명한’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히드로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고 지루한 대기 시간을 거쳐 이민국을 통과하자마자 심상찮은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공항 대합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큼직한 겨울 점퍼 차림이었고, 더러 모피 아우터나 양털 부츠를 신은 사람도 눈에 띄었 다. 이때가 6월 초였다. ‘변덕에도 정도가 있지, 초여름에 모피를 꺼내게 만들 정도의 날씨는 좀 심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면서 공항을 빠져나와 런던 시내로 향했다. 급격하게 낮아진 온도만큼 사람들의 표정도 담담하게 굳어 있는 눈치다. 화려한 패션 컬렉션을 앞둔 도시의 예의 그 들뜬 분위기와는 사뭇거리가 느껴졌다. 12시간을 비행해 지구 반대편에 출장을 온 에디터도 당황스러웠지만, 아마 가장 당황한 건 런던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이겠다고 호기롭게 발표한 유서 깊은 두 패션 하우스, 구찌와 디올이었을 것이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크루즈 컬렉션의 규모가 성장하고 있으며, 단지 룩북이나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으로 그치지 않고 어떤 지역을 선정해 거대한 규모의 메가 패션쇼를 열어 전 세계의 VIP들과 영향력 있는 인사, 미디어 등을 초대하는 형식이 굳어지면서, 각 패션 하우스들이 크루즈 컬렉션으로 낙점하는 장소 자체가 그대로 해당 시즌의 패션 트렌드가 되는 현상이 눈에 띄고 있다(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서울에서 공방 쇼를 연 이후에 세계적으로 ‘서울’이 얼마나 뜨거운 도시가 되었던가!). 이번 시즌의 가장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공룡 패션 하우스들의 목적지가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는 점이다. 쿠바를 선택한 샤넬과 브라질을 선택한 루이 비통은 남미파, 런던을 선택한 구찌와 디올은 서유럽파! 구찌의 장소 선택이 패션계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도시가 런던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쇼가 열릴 실제 공간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었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 어떤 곳인 지 짚고 넘어가야 크루즈 컬렉션 장소 선정에 얽힌 복잡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터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13세기, 영국 국왕이던 헨리 3세의 명으로 완공된 웨스트민스터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한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성공회 교회당으로, 현재는 대다수 영국 왕가의 사람들과 각 분야 위인들이 묻힌 무덤으로도 유명하다. 1066년 잉글랜드 정복자인 윌리엄 왕을 비롯 해 현재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 40여 명의 역대 왕들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며, 1997 년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을 치른 곳이자, 가장 최근에는 윌리엄 왕세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비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튜더 왕조의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면서 영국 내의 거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교회, 수도원이 몰수되거나 파괴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웨스트 민스터만큼은 무사할 수 있었다. 현재는 절반이 국가 교회로, 절반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박물관에는 왕실 유물을 비롯해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가, 예술가, 과학자 등의 기념비가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국민에게 ‘영국의 넋이 잠들어 있으며 영국의 얼이 살아 있는 엄숙한 성역’인 셈이다. 하루 평균 수천, 많은 경우 수 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경의와 예를 표하는 본산으로 묵묵히 그 의의를 다하고 있다.

괴짜 룩, 혹은 할머니 시크라고 불리는 알레산드로 미켈레 특유의 미학은 이번 컬렉션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괴짜 룩, 혹은 할머니 시크라고 불리는 알레산드로 미켈레 특유의 미학은 이번 컬렉션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괴짜 룩, 혹은 할머니 시크라고 불리는 알레산드로 미켈레 특유의 미학은 이번 컬렉션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구찌 크루즈 컬렉션에 선보인 액세서리들은 영국의 서브컬처를 흥미롭게 반영했다.

구찌 크루즈 컬렉션에 선보인 액세서리들은 영국의 서브컬처를 흥미롭게 반영했다.

블라인드 포 러브, 호랑이 패치워크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블라인드 포 러브, 호랑이 패치워크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국 브랜드도 아닌 이탈리아 출신의 패션 브랜드 구찌에게 웨스트민스터가 문호를 개방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행사가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사상 처음으로 개방한 상업적인 이벤트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고, 심지어 영국 내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찬반 논란까지 일어났을 정도로 화제를 낳았다. 장소 선정에 이르기까지 구찌 하우스가 얼마나 깊은 고심과 노력을 기울였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화제에 오른 만큼, 논란을 잠식시킬 만한 컬렉션을 완성시키기 위한 고군분투 역시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6월 2일 오후 3시, 서늘하다 못해 입김까지 뿜어져 나올 정도의 차가운 야외 교회당 복도를 따라 구찌의 크루즈 컬렉션이 베일을 벗었다. 악기 반주 없이 아카펠라로 부르는 성가대의 목소리가 장엄한 교회당의 비석 하나하나를 따라 울려 퍼졌고, 곧이어 기괴한 고양이 무늬 짜임의 무지개 스트라이프 니트와 불꽃 배경의 강아지가 패치워크된 타탄체크 스커트 차림의 오프닝 룩을 필두로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혼신을 다해 그려낸 영국식 패션 판타지가 서늘한 교회를 점점 달구기 시작했다. 총 94벌의 룩으로 구성된 구찌의 2017년 크루즈 컬렉션은 남성과 여성을 모두 아우르는 방대한 규모로 패션 스타일과 세부 디테일, 장식, 예술 사조, 인테리어와 아트 작품 등은 전부 영국적인 배경에서 모티프를 얻었으며, 영국의 유스 컬처와 현대 패션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스트리트 웨어에 대한 강조를 고루 버무린 컬렉션이었다.

과거와 현재, 귀족과 괴짜, 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 파인 아트와 서브 컬처, 디지털과 아날로그. 이 모든 것을 한데 뒤섞어 못 말리게 아름답고도 동시대적인 결과물을 도출하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마법은 영국적인 요소를 구찌라는 ‘이탈리아 브랜드’의 DNA와 섞는 과정에서도 제대로 효과를 냈다. 무엇보다도 특정 시대, 특정 사조의 영국 문화-예를 들면 펑크, 빅토리언과 같은-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혼재된 요소들을 폭넓게 가져와 참조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요즘 아이들의 엄마들이 처녀였을 무렵 파티 복장으로 유행한 1970년대의 볼 가운, 스킨헤드족이 탐닉했던 스톤워시 데님 팬츠,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에 켄싱턴에 거주하던 할머니들이 주로 입었을 법한 1980년대식 실크 프린트 드레스, 1990년대에 스파이스 걸스, 테이크 댓 같은 브리티시 아이돌이 유행시킨 몬스터 부츠와 유니언잭 프린트 스웨터, 시골 귀족들이 주로 입는 패딩 재킷과 경기병들의 밀리터리 유니폼 등 다양한 시대와 스타일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늘 그러하듯 ‘원형 그대로’ 쓰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켈레의 구찌 하면 떠오르는 동물 심벌 엠브로이더리와 엄청난 자수와 글리터가 들어간 보머 점퍼, 진주 스터드와 타조털이 장식된 로퍼, 색색의 장식이 들어간 각진 가죽 가방처럼 현재 구찌의 스탠더드라고 일컬어지는 요소들은 시대가 모호한 영국 스타일과 어우러져 정확하게 자리를 잡았고, 덕분에 마냥 어지럽게만 느껴질 수 있는 방대한 컬렉션은 ‘구찌’라는 이름하에 하나의 정렬을 이룰 수 있었다.

접어 올리는 스타일의 안경이 새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액세서리 디자이너 출신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슈즈와 가방, 주얼리 등 액세서리에도 옷만큼이나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액세서리 디자이너 출신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슈즈와 가방, 주얼리 등 액세서리에도 옷만큼이나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액세서리 디자이너 출신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슈즈와 가방, 주얼리 등 액세서리에도 옷만큼이나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액세서리 디자이너 출신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슈즈와 가방, 주얼리 등 액세서리에도 옷만큼이나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양한 레퍼런스를 통해 컬렉션을 완성하는 디자이너는 많지만,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가 유독 현대 패션 트렌드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한 룩 안에 사용 된,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가지의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맥락 없이 사용한 레퍼런스는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 아닐까. 웨지우드 도자기 프린트와 개-영국 견종인 킹 찰스 스패니얼이다- 아플리케, 여기에 펑크 스타일의 가죽 스트랩 슈즈를 한데 섞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정교한 터치가 들어간 꽃 일러스트 프린트를 덮는 미켈레의 믹스 스타일은 처음에는 ‘기괴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지금은 그 방식이 현대의 표준이며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톰 포드가 구찌의 디렉터이던 시절 영국의 구찌 스튜디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으며, 그 당시 영국 문화에 푹 빠져 언젠가 이에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영국의 심미성을 매우 사랑한다. 영국적인 미학에는 내가 추구하는 감성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 점과 연관된 부분이 많다. 이번 컬렉션은 말하자면 내가 런던에 바치는 서정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런던 하면 떠 오르는 몇 가지 운율을 패션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 시대, 영국 스쿨보이, 열정 넘치는 신사와 로맨틱하고 자유로운 펑크 문화.” 미켈레의 말이다.

컬렉션 외적인 요소로도 수많은 화제를 낳는 브랜드답게, 이번 웨스트민스터 크루즈 쇼를 앞두고 SNS로 중계되는 쇼 안팎의 이야기 또한 꽤 흥미로웠다. 먼저 쇼 전날에는 전형적인 종이 프린트 초대장이 아니라 VR(가 상현실) 헤드셋을 형상화한 입체 초대장이 공개되면서 이번 쇼가 VR로 스트리밍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돌기도 했으며(결론은 아니었던 것으로!), 쇼 2시간 전에는 프랑스계 미국인 배우로 최근 스타일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소코가 쇼 당일 백스테이지의 모습, 그리고 미켈레와 함께 촬영한 셀피를 구찌 스냅챗을 이용해 릴리스하며 관심을 모았고, 쇼장 좌석에 구찌 엠브로이더리 자수 방석이 놓여 있었으며, 이것이 쇼 기프트로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SNS로 알려지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최근 구찌는 인테리어 브랜드 카바나와의 협업으로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90년대 패션계를 호령한 영국계 모델 쌍두마 차, 자퀘타 휠러와 에린 오코너가 런웨이에 오른 것 역시 구찌가 준비한 또 하나의 깜짝 선물이었다. 다음 시즌 스 트리트를 점령할 아이템도 눈에 띄었다. 영어 버전인 ‘Blind for Love’로 바뀌어 등장한 구찌의 인기 높은 시리 즈인 ‘사랑에 눈멀다(L’aveugle par Amou)’ 티셔츠나, 유니언잭 모티프의 큼직한 니트 풀오버, ‘짝퉁’으로 몸살을 앓은 구찌 로고 티셔츠를 정식으로 만든 라운드 티셔츠, 그리고 멀티 스트랩의 메리제인 슈즈나 무지개 컬러의 굽이 돋보이는 엄청나게 높은 클리퍼 등은 구찌 고스트 그라피티의 뒤를 이어 스트리트 사진가들의 플래시 수혜를 입을 아이템으로 손색이 없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주임 사제인 존 홀(John Hall) 박사는 구찌 크루즈 쇼 장소가 선정, 발표된 지난 2월,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기본적으로 신을 숭배하기 위한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얽힌 이야기나 미스터리, 놀라움을 많은 사람들이 발견하길 바란다”고 말하며 영국의 심장과도 같은 이곳이 점차 개방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영국과 유럽의 분위기를 발전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구찌의 ‘런던 찬가’는 그 첫 단추로는 매우 성공적인 선택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모델들의 모습을 보면 영국식 귀족주의와 카나비 스트리트 젊은이들의 자유로움이 물씬 묻어난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모델들의 모습을 보면 영국식 귀족주의와 카나비 스트리트 젊은이들의 자유로움이 물씬 묻어난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모델들의 모습을 보면 영국식 귀족주의와 카나비 스트리트 젊은이들의 자유로움이 물씬 묻어난다.

크루즈 컬렉션의 피날레 장면. 이번 쇼에는 남성과 여성을 망라해 총 94벌에 달하는 룩을 선보였다.

에디터
최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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