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아트인가 아닌가,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 안인가 바깥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반향을 일으키는 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전시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궁금하다면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

모바일 세대의 광장
유어마인드, 언리미티드 에디션 | 이로
시작은 미약했으나 창대해져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독립출판물 전시이자 아트북 페어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2009년 출발했을 때 지금의 규모까지 성장하리라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난 11월 이틀 동안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7회 행사의 경우 180여 개 참여 팀, 관람객 13천여 명을 기록했으며, 아티스트 40여 팀이 포스터만 판매하는 부대 행사 <포스터 온리> 전을 독립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행사의 기획자 이로는 아직 자신의 활동이 초기일 뿐이라 말하며, 운영 중인 독립 서점 유어마인드가 ‘1세대 독립책방’으로 어른 대접 받는 데 대해서도 어색해한다. 유어마인드를 여느 독립 책방들과 다르게 바라보는 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인데, 그건 시대나 세대로 자르는 구분법보다는 하는 일의 종류나 범위 때문이다. 유어마인드가 서점일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출판물을 기획하고 펴내는 출판사, 또 문화 예술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청년들이 교류하는 구심점이기도 하듯 공동 대표 모모미와 함께 지금의 책방을 키워낸 이로는 서점 운영 주체이자 기획 편집자, 스스로 글을 쓰는 작가, <언리미티드 에 디션>의 행사를 총괄 진행하는 이다. “굳이 요약하면 복합 문화 공간이지만 그렇게 표기했을 때 설명이 비껴나가는 공간이기도 하죠. 기존 기업들의 운영 방식과는 아주 다르니까요. 마찬가지로 누군가 제 일을 물어보면 자영업자 또는 개인사업자라고 답해요. 문화 기획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거나 가치있는 일이니 불완전한 결과물을 양해해달라는 태도가 정서적으로 맞지 않아요.”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가 SNS 타임라인을 통 해 결집한 행사’로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바라보는 분석에 대해 이로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특히 <포스터 온리>의 경우 명확한 취향을 가졌으나 구매력은 소유하지 못한 20대들의 딜레마를 넘어 자신의 공간과 미감을 연결하는 경험을 제공했으며, 나아가 창작과 소비가 합리적으로 만나는 장을 제공했다. 아트 피스 한 점을 1백만원에 내놓는 대신, 1만원짜리 포스터를 100장의 에디션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방식은 아티스트에게나 구매자에게 소셜 펀딩처럼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행사 이후 인증샷들이 대개 임대한 벽면의 꽃무늬 벽지를 가리며 부착된 사진이었다는 사실은 서글픈 흥행의 증거였다.
제목과는 다르게 제약과 한계를 두는 점이 역설적으로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매력이며 성장 동기이기 도 하다. 1년에 단 한 번, 현장에 방문해야 구할 수 있는 간행물과 포스터는 좁은 공간에 어깨를 비비며 기꺼이 줄을 서게 만든다. “이상하고 쓸데없는 것, 무의미하게 아름다운 것에 관심을 가진 몽상가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취향이나 감각이 존중받기 위해서 는 무엇이 논의되고 어디에 목소리를 높여야 할지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곧 우리이고 우리가 전시를 구상하며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바일 세대가 현실의 광장에 모여든다면 아마 이런 장면일 것이다.

취향의 공동체
TWL | 길우경, 김희선
TWL
은 이름이 이야기를 건네오는 곳이다. 창덕궁과 대학로 사이, 연건동의 오래된 벽돌 건물에 있는 이 라이프스타일 셀렉트 숍은 판매하는 제품의 종류를 한정해서 스스로를 규정하거나, 대단해 보이는 타이틀을 달아 편집매장의 위상을 과대 포장하지 않는다. 사선으로 깊이 들어오는 햇볕과 함께 공간을 채우는 물건, 그리고 거기에 어린 어떤 태도는 ‘우리 가 사랑하는 것들(Things We Love)’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담백하다. 여기서의 ‘우리’는 1차적으로 그래픽 디자이너 길우경과 김희선 두 사람이 다. 현대백화점, 서울 레코드페어 등의 BI 작업을 해 온 스튜디오 fnt 의 멤버이기도 한 그들이 함께 만든 TWL에서는 마음에 드는 제품을 제작해서 팔거나 서로의 취향이 교집합을 이루는 물건을 소개한다. 상품의 셀렉션을 이루는 기준은 디자인의 스타일이 나 브랜드의 콘셉트가 아니라 바로 ‘내가 쓰고 싶은 물건’이라는 직관이며, 그 직관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서보다는 일상을 어떻게 영위할지에 관심이 많은 생 활인으로서의 감수성에 의해 움직인다. “디자이너가 너무 의식해서 접근한 제품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더라고요. 하지만 널리 사용해온 물건은 형태가 그렇게 결정되기까지 오랜 시간 누적된 값이라는 게 있을 거예요. 그 보편적인 가치를 존중하면서 만들어진 물건이 좋은 일용품이죠.” 그렇게 잘 만들어진 물건 하나가 누군가의 집에 놓일 때 삶이 바뀌거나 어떤 스토리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것이 김희선 대표의 말이다.
작은 전시나 주변의 소상공인을 모은 마켓 또한 느슨하게 열린 TWL의 활동 영역 안에 있다. “각 잡고 하는 전시보다는 제품을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보여 주면서 이야기나 활동을 곁들일 때 우리 스스로도 재미를 느껴요.” 길우경 대표는 계절이 바뀌면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 달라지는 데서 ‘춘우장’이나 ‘만추장’ 같은 동네 장터 같은 행사를 착안했다고 말한다. 올해 초에는 가드닝 작업실 ‘보타 라보’, 그리고 금속에 법랑과 칠보를 입히는 공예 브랜드 ‘함’과 협업한 <땅의 소산> 전시를 열었다. 겨울에는 밤을 주제로 해 잠과 관련된 제품을 모은 것처럼 4월에는 아침을 주제로 식사에 관한 여러 가지를 묶어볼 계획이다. 섬세하게 손으로 만들어내는 국내 장인 제품의 제작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도 구상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확장하고 변화하면서 TWL의 정체성을 유연하게 구성한다. 그릇이나 테이블웨어, 주방용품과 패브릭, 초와 지류, 문구와 음반까지 아우르지만 아이들 제품을 나중으로 미뤄둔 것도 두 공동 대표 모두 자녀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곳 을 움직이는 동력은 매출보다는 관심사다. “최근에 넓은 공간으로 옮기면서 이제야 사용하는 물건 외에 장식을 위한 물건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나이가 들어가고 하는 일이나 생활의 모습이 계속 바뀌면, 고르는 물건이나 시각도 바뀔 거 같아요.” 사랑도, 우리도 움직이는 거다.

아티스트 근접 조우
디스위켄드룸 | 김나형, 송호준
아티스트는 익숙하고도 낯선 존재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좀 더 알고 싶지만, 쉽게 파악되지 않는 외계인에 가깝다. 디스위켄드룸은 예술가와 관람객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려는 시도다.
청담동의 아담한 공간은 딱히 전시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김나형 디렉터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곳은 “대면하고 교감하기 위한 장”이다. 작품이라는 결과보다 그걸 만들어내는 사람과 과정에 초점을 맞추자는 게 이들의 제안이다.
아티스트 라이브 쇼케이스는 이러한 의도를 실현할 하나의 방법론이다. 첫 테이프는 개인 인공위성 프로젝트로 알려진 송호준이 331일부터 42일까지 끊게 됐다. 그는 전부터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아직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한 주제를 여러 사람과 터놓고 고민하고자 한다. “신을 형상화한 LED 전자 장치를 만들어서 팔아보려고 합니다. 가상 기업의 개업식 형식을 취할 거예요. 스케치나 프로토타입을 보여드리면서 방문자의 의견을 듣고, 투자 의향도 물어볼 텐데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깝겠죠.” 물론 쇼케이스의 형식과 내용은 아티스트에 따라 달라질 거다. 4월 중순에는 다큐멘터리 <청계천 메들리>와 <철의 꿈>으로 호평받은 박경근 감독이 바통을 건네받는다. 묵직한 메시지의 작품과는 상관없이, 그는 직접 만든 브런치 레시피를 소개하며 대화를 하고 음식을 나눌 계획이다. 송호준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자신에게 꼭 필요했다고 말한다.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걸 스스로는 알지 못하더라고요. 오히려 남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깨닫는 경우가 많아요.”
디스위켄드룸은 왜 작품보다 작가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전시장에 설치되는 결과만으로 이야기를 하는 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고민을 하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이야 말로 예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들이 얼마나 창의적인 사람들인지 가까이에서 확인하셨으면 했어요.” 김나형의 답변에 송호준이 한마디를 부연했다. “한편으로 저는 아티스트들도 얼마나 평범한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미술관들은 결과를 포장하기 위해 작가를 신격화해요. 계시처럼 한순간에 영감을 받아 뭔가를 완성하는 것처럼요. 그런 미신에 거부감을 느껴요.”
공학도 출신인 송호준은 ‘왜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가 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고 한다. “초점을 좀 더 자신에게 맞출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어떤 범주에 갇히지 않고 가장 자유롭게 고민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는 자유로운 고민만 많고 ‘명확함’은 부족한 것 같다고 스스로를 평했다. 그러자 김나형이 슬그머니 나섰다. “제가 보기에는 누구보다 명확한 분이에요. 결과보다는 방향성이 뚜렷한 거죠.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디스위켄드룸은 송호준처럼 뚜렷하고 진지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만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은 작가들을 찾는 중이다. 목표로 삼는 그림은 아티스트와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축제다. “딴짓을 해야 창의적인 게 나오는데 자꾸 효율만 따지려고 하니까 작가들도 점점 전시가 재미없어진다고들 해 요. 이곳에서 그 재미를 찾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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