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F/W 컬렉션이 열린 뉴욕에서 파리까지, 장장 28일간의 미행(美行).
MILAN
2026.2.24 ~ 3.2
복슬복슬
촉각을 자극하는 복슬복슬한 소재의 향연. 에트로의 퍼 코트와 깃털 트리밍 장식 맥시스커트, 블루마린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퍼 소재 톱, 보테가 베네타의 재활용 유리섬유 소재의 퍼 재킷. 그중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리씨(Re-see)에서 직접 착용해본 보테가 베네타의 헤드피스다.
모델이 돼
대기 줄이 길었던 아바바브(AVAVAV)의 프레젠테이션 현장. 가벽으로 가려진 현장은 반복되는 음향만으로 짐작하고 상상하게 했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고, 주최측의 Go! 사인과 함께 무작정 들어가야 했던 현장. 그곳에는 상상 이상의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델이 관객이 되고, 내가 런웨이를 걷는 뒤바뀐 역할놀이의 순간!! 대기 중인 모델의 시선을 받으며 걷는 경험은 민망하고 쑥스럽지만 기묘한 흥분감도 안겨 여운이 짙은 추억으로 남았다.
시작해! 피날레
끝이 아니라 시작! 누메로 벤투노(N°21)의 이번 시즌 런웨이는 피날레로 쇼의 시작을 알려 시선을 모았다. 모델이 한 명씩 등장하는 일반 쇼와 다르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는 영화 < 8½>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퍼레이드가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대사에서 영감 받았다고.
도너츠 아이!
글로 메이크업이 뷰티 트렌드의 정점에 서 있다는 건 이번 시즌 모스키노 백스테이지에서 다시 증명됐다. 톤온톤 무드를 살려 음영을 더한 뒤 투명한 글로스를 눈가에 얹어, 마치 잘 구운 매끈한 도너츠를 연상시키는 메이크업이 등장한 것!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판타스틱한 메이크업을 선보이던 모스키노 런웨이와 다르게, 일상에서 누구나 따라 하고 싶은 메이크업 말이다! 차분한 듯 텍스처가 돋보이는 이 메이크업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의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오프닝 액트
Gucci 밀란 패션위크 데뷔 쇼의 양대 산맥, 구찌와 펜디가 베일을 벗었다. 슬림한 가죽 재킷과 팬츠, 시어 드레스, 로라이즈 팬츠, 트랙 슈트와 팬츠, 새로운 가먼트 등등 1990년대의 도발적인 매력과 팜프파탈적 관능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T 스트링 브리프를 드러낸 케이트 모스의 피날레는 이번 컬렉션의 서사를 단 하나의 룩으로 응축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Fendi 고향으로 돌아온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의 펜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우스로의 귀환을 크게 환영하듯 쇼 공간 바닥에 새긴 ‘Less I, more us’ 문구가 그녀를 맞이했다. 블랙 레이스나 샤 스커트, 레이저 커팅 가죽, 화이트 셔츠 등 그녀의 아이코닉한 코드 위에 이탈리아적 요소를 겹겹이 쌓아 올린 쇼에선 이 강력한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되새기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장의 숨결이 읽혔다.
힘내라 힘
돌체앤가바나의 쇼와 애프터 쇼에 참석해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끈 마돈나, 뎀나의 첫 구찌 쇼에 참석한 구찌의 전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도나텔라 베르사체. 디자이너에게 힘이 되어주는 거장 선배의, 대스타의 응원 장면들은 런웨이를 더욱 활기차게 만든다.
위시리스트
이번 시즌 칼라를 활용한 흥미로운 코트들이 유독 눈에 띈다. 페라가모의 벌룬 핏 코트, 스포트막스의 숄칼라 코트, 토즈의 클래식한 피코트, 질 샌더의 래글런 코트 등등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각기 다른 핏과 실루엣이지만 모두 볼드한 칼라가 특징.
어른동화
밀란 패션위크의 서막을 여는 디젤의 쇼. 첫 쇼에 대한 기대를 안고 들어선 에디터들은 런웨이 세팅을 보는 순간, 일제히 휴대폰을 들었다. 인형 탈, 거대한 풍선 피규어, 알록달록한 소품 숍까지, 디젤이 진행한 과거 프로젝트의 오브제와 기념물, 소품들이 뒤섞인 거대한 만물 시장 같은 장관을 연출했으니! 한편, 올해 10주년을 맞은 하이엔드 스트리트 브랜드 GCDS는 ‘What’s in My Bag’이라는 스토리로 10주년을 자축하며 흥미로운 쇼를 펼쳤다. 쇼핑백 속에서 모델이 걸어 나오는 연출은 현실을 넘어선 스케일을 만들어내며, 환상 동화 속 기이한 캐릭터를 연상케 했다.
4X15=60
15명의 모델로만 진행한 60착장의 런웨이. 프라다 런웨이는 익숙한 얼굴들이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형식으로 전개됐다. 피날레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짐작이 가는 이번 쇼의 서사. 테일러드 룩, 스포츠웨어, 자수 장식의 이브닝 룩을 겹쳐 입는 방식의 정교한 레이어링은 ‘옷을 입는 행위’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 모델들은 첫 번째 룩부터 마지막까지 한 겹씩 덜어내며 등장하고, 이를 통해 하나의 룩이 다채롭게 변모하는 서사를 보여주었다. 런웨이 당시 현장도 황홀했지만, 이후 의미를 알고 다시 보니 ‘역시 프라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뒤돌아봐
뒤를 돌아보는 순간, 또 다른 패션쇼가 시작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 블랙으로 이뤄진 돌체앤가바나의 이번 쇼.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컬러 선택에 그들은 ‘후면’ 돌파를 선택했다. 앞뒤를 반전한 듯한 테일러드 룩을 입은 모델의 모습. 그들이 입은 룩에는 두 가지 룩이 담겨 있었다. 이미 지나간 모델과 등장하는 모델 사이 분주하게 시선이 오갔고, 눈동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이다 보니 쇼는 끝나 있었다.
체육시간
피트니스, 웰니스 등 자기 관리가 화두인 시대. 그런 시대적 배경을 타고 애슬레저 룩은 런웨이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오니츠카타이거와 휠라 같은 유명 스포츠 브랜드들이 적극적으로 런웨이를 전개하는 상황에서, 유서 깊은 하우스 브랜드들 역시 개성을 담은 애슬레저 룩을 선보이고 있다. MM6는 밀라노 중앙역을 런웨이 공간으로 택해 트랙 톱과 러플 스커트를 매치한 실용적인 애슬레저 룩을 선보였고, 마르니는 프리알프스 산맥에서 출발한 마운티니어 룩을 선보였다. ‘스포티함’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 룩을 보는 건 여러모로 신선했다.
시작이 좋아
밀라노 패션위크 첫째 날, 오전 일정이 빈 틈을 타 예술가 모나 하툼(Mona Hatoum)의 전시 <위, 아래 그리고 그 사이(Over, under and in between)>를 보기 위해 폰다치오네 프라다로 향했다. 과거 알코올 증류소의 사일로와 탱크가 있던 밀라노 프라다 재단 내 치스테르나를 활용한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이다. 작가의 핵심적 시각 어휘인 거미줄(Web), 지도(Map), 격자(All of Quiver)라는 세 요소를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 우리 시대 사회의 혼란과 존재의 불안정성, 위험, 취약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높은 층고의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운 작품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생각에 잠겼고, 일정을 시작하기 전 감각을 깨우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