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와 티노 세갈, 두 사람이 미술관에서 만났다

권은경

사람 옆에 또 사람

엄숙한 미술관을 살아 있는 사건의 장소로 전환시키는 작가, 티노 세갈. ‘몸’이 곧 텍스트이자 도구인 배우로서, 춤과 말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렉처 퍼포먼스를 하는 중인 문소리. 각자의 사건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이 미술관에서 만났다.

미술관이라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지금 <티노 세갈>전이 열리는 리움미술관에 가면, 진입로에서부터 조금 당황하거나 놀랄지 모른다. 미술관 직원으로 보인 이들이 돌연 내 주변을 돌며 발랄한 표정으로 노래하고 춤을 춘다(‘This Is So Contemporary’, 2004). 전시장 한 공간에는 서로 껴안은 채 바닥에 누워 아주 천천히 뒹굴거나 일어서는 동작을 취하는 남녀가 있다(‘Kiss’, 2002). 그 주변으로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로댕의 작은 조각들이 여러 점 놓였는데, 입을 맞추기 위해 팔을 뻗거나 구르는 남녀의 형태가 그 조각상을 닮았다. 바깥 공기에 지친 내향형 관객은 로비에 앉아 쉬는 동안 희한한 순간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 나처럼 쉬는 줄 알았던 이들이 로비 이곳저곳에서 서서히 피어나듯이 움직이는 모습. 티노 세갈(Tino Sehgal)은 리움미술관의 로비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그 분위기에 스며들거나 때로는 분위기를 더 짙게 만드는 작업(‘Untitled’, 2026)을 시도했다. “로비에 여유 있게 머무른다면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서 잠깐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라질 수도 있어요. 물론 어떤 관객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죠. 우리 인생이 그렇잖아요.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는 건 아니에요(웃음).”

티노 세갈은 ‘행위’를 작품으로 내놓는다. 다만 여느 행위 예술가들과 달리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해석자’라고 하는 댄서나 배우 등등이 행위를 수행한다. 인간의 몸과 움직임, 말, 그곳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만으로 구성된 그 작품 혹은 행위를 그는 ‘구성된 상황’이라고 일컫는다. 티노 세갈의 역할은 심플하게 말하면 안무가이지만, 그의 대표작 중엔 해석자와 관객의 대화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작품마다 규칙과 구조를 만들고, 적합한 해석자들을 찾고자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이며,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어떤 상황을 구축하는 사람. 그에겐 설계자, 극작가, 연출가에 해당하는 모든 성격이 있다. 리움미술관에서 3월 3일부터 6월 28일까지 열리는 <티노 세갈>전은 그의 ‘구성된 상황’ 여덟 점을 펼쳐놓는다. 여기에 그가 엄선한 미술관 소장품이 어우러진다. 텍스트로 쓰인 보도자료 외에 일체의 공식적 기록(작품 사진, 영상, 계약서 같은 문서 등)을 남기지 않는다는 특성은 이 인터뷰가 세상에 나올 때쯤엔 한바탕 뉴스로 쏟아진 후일 것이다. 시각 예술의 자장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모든 물질적 생산을 거부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술사를 이어가고 있는 아티스트. 그는 유별나긴 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이상주의자 내지 낙관주의자에 가까운 느낌이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시대 변화에 따른 기술이나 매체를 도입하는 형식의 현대미술이 등장했다.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때, 티노 세갈은 미술의 조건 자체를 다시 설정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이 공연장이나 길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다면 그 장면은 특별한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하는 작업은 미술관과 만났을 때 힘을 얻는다. 그가 고수하는 모든 것이 동시대 미술의 관행에서 멀찍이 벗어난 모습인데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비엔날레는 그를 기꺼이 제도 안으로 받아들였다. 마음껏 인증샷도 못 찍게 하는 관람 조건에서, 때로는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해석자’를 감상할 끈기가 모자란 관객이라면 티노 세갈 전시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티노 세갈이 마련한 그 모든 일이 ‘미술관’에서 벌어진다는 광경을 볼 때, 나도 그 전체 안에 있을 때의 놀라움이나 쾌감이란 분명 있다.

티노 세갈과 한국 배우 문소리의 교집합이 무엇인지, 문소리의 요즘 행보가 아니었다면 전혀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소리는 올해 1월부터 리아킴과 함께 부지런히 무대에 서고 있다. 안애순 단장이 연출과 안무를 맡은 <춤이 말하다>는 신체에 숨겨진 이야기를 춤과 말로 풀어내는 ‘렉처 퍼포먼스’다. 영화 <오아시스>의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를 연기하기 위해 8개월 이상 온몸을 비틀며 지낸 문소리에겐 배우의 소임을 다한 대가로 상흔 같은 후유증이 남았다. 그녀의 신체가 조금씩 회복되기까지, 현대의학뿐 아니라 현대무용이 거들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몸을 재정렬해준 그 현대무용마저 새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육체파 배우’ 쪽인 문소리는 새 인물을 받아들면 그 캐릭터만의 몸짓을 연구한다. 배우에게 몸을 쓴다는 것은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처럼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도 적용되는, 캐릭터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몸이 곧 텍스트이자 살아 있는 도구이므로. 문소리와 리아킴 각자의 1인극이라고 할 수 있는 <춤이 말하다>에서 문소리는 자기 신체에 축적된 기억과 감정을 이야기로 꺼내놓고, 언어 대신 우아한 춤으로 말하기도 한다. 현대무용에 이어 새롭게 즐기게 된 춤이라는 탱고도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연기와 춤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문소리, 그리고 현대무용가 출신으로 ‘구성된 상황’이라는 라이브 공연을 연출하는 티노 세갈이 만난다면 재미난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렇게, 지금 한국에서 각자의 ‘사건’을 벌이는 중인 두 사람을 함께 만났다. 이것은 몸과 연기, 공연이라는 공통 화두를 가진 아티스트들의 만남이자 경험과 경험의 만남이기도 하다.

<W Korea> 전시를 보고 문소리 씨와 이런 이야길 나눴어요. ‘Kiss’ 같은 작품에서는 두 사람이 굉장히 느린 속도로 움직이잖아요. 그렇게 서서히 움직이는 동작을 긴 시간 지속하려면, 겉보기와 달리 상당한 근력이 필요할 거라고요. 그들이 얼마나 힘을 주며 움직일지 상상하니까 제 몸도 덩달아 힘이 드는 것 같았어요.
티노 세갈 거울 뉴런 때문이에요. 눈앞에서 타인의 행동을 보면 신경학적으로 당신도 그와 비슷한 상태가 되거든요. 우리가 춤을 보는 걸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죠. 제가 이렇게 손을 움직이면, 그걸 보는 당신의 뇌에서도 같은 동작을 하는 것처럼 느껴요. 발레 댄서가 피루에트 동작을 하는 걸 본다면, 당신의 뇌 안에서는 당신도 그 동작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 ‘Kiss’에서는 힘을 아주 많이 주면서 움직이는 자세와 릴랙스된 자세가 섞여 있어요. 두 경우 모두 진행 속도는 비슷하지만요. 문소리 씨는 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소리 제 주위에도 이번 전시를 위해 오디션을 본 배우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조금 전해들은 이야기는 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자리일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어요. 작가님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았고요. 조금은 놀랄 준비를 하고 왔죠. 그런데 저에겐 생각보다 친숙했어요. 공연 형태여서인지,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데도 느낌만큼은 낯설지가 않았어요. 왜, 미술관에서 한 작품을 아주 오랫동안 보는 관객도 있잖아요. 그럼 ‘이 정도면 나는 얼추 다 본 것 같은데 저 사람은 하나를 뭘 저렇게 오래 볼까’ 싶기도 하고요. 이번에 저는 ‘몇 시간이고 계속 볼 수 있겠는데?’ 싶었어요. 우리가 만드는 오브젝트 기반의 예술은 어디서 온 거지? 우리는 어떤 형태에 더 길들여져 있는 거지? 상대적으로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중 무엇이 더 파워풀한 걸까? 그것들은 어떻게 다를까? 이런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티노 세갈 당신이 그런 질문들을 떠올렸다니 정말 반갑네요. 제가 많이 생각하고 다루는 점이거든요. 인간이 지닌 힘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량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연기와도 연결됩니다. 연기는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복합적인 기술 중 하나니까요. 문소리 씨도 그런 기술을 구사하고 있는 거죠.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요. 지난 40~50년간 미술계에는 하나의 갈래가 있었어요. 동시대 기술로 동시대 미술을 만드는 식의 예술. 다행히 미술계가 그런 것들로만 가득한 건 아니었어요. 제 작업은 늘 그 지점을 다뤄요. 보세요, 바로 여기, 인간이라는 기술이 존재합니다. 지금의 트렌드가 인터넷이든, AI든, 영상이든, 혹은 1970년대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인간의 몸이 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이 행성에서 가장 복합적인 거예요. 인간은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기술 그 자체입니다. 저는 바로 그 점이 우리를 연결해준다고 생각해요.
문소리 전시장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무언가를 계속 발생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어요. 예를 들면 미술관 로비에서 해석자들이 관객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네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잖아요. 저한테 질문한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가며 말을 하더라고요. 한 사람이 혼자 쭉 말을 할 때와는 좀 다른 경우죠.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그들 각각과 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르니까요. ‘Kiss’라는 작품을 보면서도 그 둘 사이의 기류, 그들과 관객 사이에 일어나는 기류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그런 에너지랄까,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를 자꾸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 있었어요. ‘아, 지금 내가 느끼는 바로 이런 걸 느끼라는 전시인가’ 싶었죠. 원자 하나하나는 사실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것들이 서로 관계하면서 에너지를 일으키고 기능하는 것처럼, 이번 전시가 그랬어요.
티노 세갈 문소리 씨의 말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말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 같은데요?(웃음). 인간 자체가 하나의 기술이라는 건 달리 말하면 인간을 ‘무언가를 하기 위한 일종의 매체(Medium)’로 볼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기술’이라는 말 대신 ‘매체’라는 말을 써도 되는 거죠. 그 매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성하는 것. 배우가 자기 존재를 가지고 하는 일도, 연출가가 배우의 존재를 가지고 하는 일도 그런 종류예요. 화가는 캔버스와 물감만 있으면 그걸로 무언가를 구성하기 시작하잖아요. 하지만 캔버스와 물감은, 이를테면 문소리라는 하나의 매체보다는 훨씬 덜 복합적입니다. 회화가 위대한 작품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창작의 출발점이 되는 매체가 얼마나 복합적인가, 그 차이죠.
문소리 그러니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복합적인 매체를 사용하는 아티스트인 거죠. 저도 작품 관련해서 인터뷰를 많이 하잖아요. 그때마다 썩 재미없는 질문이, 특정 대목을 두고 ‘그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거예요(웃음). 저는 작가님에게 ‘이런 작업의 의미를 당신 언어로 다시 설명해주세요’같은 요청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전시를 펼친 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하다고 봐요. 그보다 작가님이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무용을 하신 분인데,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작가가 되었다는 건 흔치 않은 경우잖아요.
티노 세갈 제 커리어에 별다른 전환점이 있지는 않아요. 겉으로는 전환점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꽤 직선적으로 왔어요. 모두 다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일이거든요. 저는 이런 질문에 몰두했어요. ‘대체 우리는 사물 외에 무엇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건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심리적으로도 그다지 충족감을 주지 않는다고 느꼈죠.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던 시절에는 ‘왜 경제가 성장해야 하지? 왜 이 모든 것들을 생산해야 하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이해하려 했어요. 제가 자란 독일 지역이 온갖 생산 시설로 가득한 곳이었어요. 그 지역 주민들은 대개 공장 노동자거나 관리직이었죠. 사물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몰두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회의 일부인 것.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용수에 흥미가 생겼어요. 춤은 사물에 기대지 않으면서 여전히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이잖아요. 행위의 변환 같은 거예요. 한마디로 제가 무용수가 된 것은 거의 정치적인 동기에서, 또 지속 가능성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선택이죠. 그리고 ‘미술관’은 한국이든 독일이든 한 국가에 존재하는 생산주의 문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요. 사물의 생산을 기념하는 곳이니까요. 어떤 사물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켜서 보여주는 장소가 미술관이에요.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의 의례(Ritual)가 있고, 의례는 사회 구조를 반영합니다. 만약 어떤 사회가 ‘좋은 삶이란 천연자원을 땅에서 채굴하고 산업 공정을 거쳐 소비재로 바꾸는 데서 온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런 관념을 격상시켜줄 의례가 필요해져요. 저는 바로 그 의례 속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우리 이제 다른 것도 기념해보자.”

안무가로 일하시던 무용단을 떠나 미술관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경험이 있었나요? ‘에피파니’ 같은 순간이요.
티노 세갈 제가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 저드슨 무용 극단, 이본 레이너, 시몬 포티, 트리샤 브라운 같은 무용가와 안무가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들은 이미 1960~70년대에 현대미술을 하고 있었어요. 이본 레이너는 미술가였죠. 당시 미니멀 아트를 하던 다른 남성 작가들처럼요. 그런데 의문이 있었어요. ‘로버트 모리스의 미니멀 아트 작품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데, 왜 이본 레이너의 <트리오 A>는 미술관에서 볼 수 없을까?’ 그 무렵 제가 20대 중반이었는데, 벨기에의 무용단에서 일하면서 극장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데 벨기에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우리 무용단에게 뭔가 해보지 않겠느냐고 묻더라고요. 동료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었죠. 저는 미술사와 관련한 질문들에 몰두할 때라 ‘내가 하겠다’고 나섰어요. 그렇게 미술관에서 처음 공연을 선보였는데…. 당시 반응에서 제가 뭔가 깨달은 거죠. 관객들은 미술관에 있는 무용수를 인간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꼭두각시나 로봇 같은, 사물의 일종이라고 받아들이더라고요. 그게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에요. 미술관이란 원래 오브젝트들을 품은 곳이니까요. 저는 드디어 뭔가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에피파니의 순간이었죠. 사물과 인간, 무엇이 더 복합적인가? 무엇이 더 흥미로운가? 무엇이 더 깊이가 있나? 우리는 사물에 얼마나 집중해야 하는가? 불현듯 미술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런 질문의 미장센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때부터 미술관을 위한 작업에 집중했고, 비교적 빠르게 미술계로 진입했어요.
문소리 저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작업도 하고, 무대 작업도 합니다. 무대 작업은 그 순간 이루어진 후에 사라지잖아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무대는 그 현장에 관객이 와야만 보고 경험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순간이 더 특별해지기도 하고, 저는 그 점을 좋아해요. 어떻게 보면 작가님의 작업과도 맞닿는 부분 같아요.
티노 세갈 연극이라는 포맷은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일시적 성격이 강하죠. 덧없다(Ephemeral)고 할까요. 동일한 형태로 반복 공연되는 작품은 세계적으로 극히 드물어요. 물론 셰익스피어의 클래식은 꾸준히 무대에 오르지만, 나라마다 특정한 미장센까지 매번 똑같이 재현될 수는 없거든요. 반면 제 작업은 극장 같은 공연장이 아닌 미술관과, 또 아카이브와 함께하죠. 정확히 이 형태 그대로 계속해서 보여질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연극보다 일시적 성격이 덜한 셈이에요. 저도 문소리 씨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요. 배우로서 무대에서 연기할 때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 서로 다른 기술을 구사하는 게 중요하게 작용하나요? 그 두 작업의 차이는 뭔가요?
문소리 저는… 이제 그냥 몸이 자연스럽게 그 상황에 맞춰지는 것 같아요. 상황에 따라 배우는 그저 퍼포밍, 액팅, 혹은 비잉(Being)을 때때로 하는 거죠. 대극장이라면 더 넓은 공간의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전달해야 하니까 그에 맞게 제 목소리도 움직임도 달라지고요.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는 관객도 없고 무대도 없어요. 대신 상대 배우가 가까이에 있으니 그 상황에 맞게 제 몸이 반응하죠. 이 과정들은 제 몸 안에서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요. 저에게는 이번 전시의 여러 부분이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같기도 해요. 그런데 공연과 큰 차이가 있어요. 일반적인 공연에서는 관객과 무대 사이에 거리가 있고, 작가님의 전시에서는 관객과 공연자 사이에 거리가 없다는 거죠. 로비에서는 공연자, 그러니까 ‘해석자’와 관객이 구별되지 않게 섞여 있기도 하고요. 내가 만약 티노 세갈의 작품 안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관객들과 거리가 없는 상태에서 하는 나의 연기는 또 달라지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티노 세갈 ‘거리’야말로 저에게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극장이라는 포맷의 장점은 많은 사람이 같은 순간에 공연자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래서 관객과 공연자 사이의 관계성이 강하지 않아요. 반면 영화처럼 카메라를 이용하는 매체에서는 우리가 공연자의 얼굴 앞까지 다가갈 수 있어요. 사람과 사람이 실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 좀 더 가깝죠. 여러분이 무대 위에 서있고, 제가 객석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일상에선 절대로 그 정도 거리에서 대화하지 않아요. 관계라는 건 바로 이 거리에 따라 이루어져요. 저의 정치적 배경과는 별개로, 안무가인 제가 미술관으로 향한 또 다른 이유는 ‘미술관이라면 2m에서 5m 정도의 거리 안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그런 환경이 문소리 씨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와 비슷한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눈길 한 번 보내거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정도의 행위가 그 이상의 특별한 무언가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최근 몇 년간 손가락을 이용하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미술관에서 댄서들이 이렇게 손가락을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어떤 동작을 하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모습을 볼 수 있죠.

2월 25일 기자 간담회에서 ‘좌대’를 언급하셨죠. 재밌게 보신 몇몇 책을 언급하면서 ‘백화점과 전시라는 개념은 거의 동시대에 등장했다’고 하신 대목이 흥미로웠어요. 개별적인 상품을 진열해 보여주는 백화점처럼, 예술품을 기존의 종교적인 제단이나 교회 벽화 같은 것에서 떼내어 좌대 위에 올려두고 개별성을 부여하는 식으로 미술관 전시가 발전해왔다고 설명해주셨죠. 연극배우나 가수가 서는 무대 역시 비유하자면 좌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대 위의 그들은 특별한 존재이기도 하고, 무대와 나 사이에 엄연한 거리감이 있죠.
티노 세갈 맞아요. 좌대 위에 올려놓는다는 건 지위나 권위를 만드는 행위거든요. 이게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너지라는 차원에서 볼 때 그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최선의 방식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같은 눈높이에서, 그러니까 대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져요. “모두 조용히 하고 나를 보라. 내가 무대 혹은 좌대 위에 있으니까,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나를 보고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중요하다.” 이런 방식이 꼭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극장 같은 공간은 거리감을 만드는 동시에 정면성도 만들죠. 보통 조명을 꺼버리고 무대에만 빛을 비추잖아요. 그렇게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이제 정면의 무대만을 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하나의 상황 안에 함께 머물 수 있어요. 좀 더 수평적인 존재 방식이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행성의 모든 사람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요. 우리에겐 힘이 있고, 우리가 어떤 의례를 행할 때는 그 사실이 어떻게든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작업을 선보일 때도 무언가를 준비한 댄서와 싱어가 있고, 관객은 그걸 바라보는 상황이죠. 하지만 관객에게는 관심을 어떻게 얼마나 줄지 정할 힘이 있어요. 그 자리에 머물면서 함께 존재하거나, 그냥 그 사이를 걸어 이동하거나. 관객이 어둠 속에 묻히지 않고, 서로가 눈에 잘 보이는 상황이죠.
문소리 그런 작업을 지금껏 수많은 도시에서 선보이셨을텐데, 혹시 지역에 따라 반응이 다르진 않나요? 말씀하신대로 댄서나 관객이 대등한 위치에서 섞이는 상황상 시행착오가 있다거나요.
티노 세갈 우리 모두 다 인간이기에 기본적으로는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요. 사실 저도 처음엔 한국에서 ‘This Is So Contemporary’ 같은 작업을 선보이면 사람들이 별로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어요. 한국을 잘 모르고 서양에서 자란 사람으로서요. 그런데 실제로 와서 보니… 한국 관객들은 처음에는 좀 낯설어하며 잠깐 거리를 두는데, 이내 긴장하지 않고 꽤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아주 조용하지만, 긴장하진 않는달까. 작업을 구성할 때 저는 대부분 머릿속으로 해요. 규칙과 구조를 만들려고 하고, 상황을 구축하면서 모든 측면을 고려하죠. 결과를 보면, 대부분은 잘 맞아 떨어져요. 하지만 세부적인 점에 있어선 결국 많은 부분이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죠. 인터뷰 전에 문소리 씨와 사진 촬영을 하면서, 저 너머 미술관 입구에서 진행 중인 ‘This Is So Contemporary’를 지켜봤어요. 문득 제가 그 상황으로 직접 들어가서 뭔가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이 작업을 선보일 때는 그 부근을 지나던 사람들이 멈춰 서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위치가 건물 입구 쪽 외부여서인지, 미술관 입구가 경사로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인의 성향이 그러한지, 사람들이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걸어서 바로 미술관으로 들어오더라고요. 디테일을 보자면 이런 점도 저에겐 시행착오예요. 누군가 ‘This Is So Contemporary’를 통과해 미술관으로 들어올 때마다 저로선 여러 버전의 실험을 보는 셈입니다. 이건 관객이 작품 가운데 서게 되는 구조예요. 관객인 당신이 중심이고, 당신이 나타나야 비로소 시작되죠. 이번 전시 기간 동안 살짝 조정할 아이디어가 몇 가지 있긴 해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머무르게끔. 하지만 작품의 기본 구조인 알고리즘 자체를 바꾸지는 않아요. 이 알고리즘은 세 사람이 당신 주변에서 춤을 추며 “This Is So Contemporary, Contemporary, Contemporary”라고 말하는 거예요.
문소리 ‘This Entry’라는 작품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 공을 다루는 사람,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등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잘 어우러지더라고요. 속도감도 그렇고요. 한국에서 2월에 오디션을 거친 후 리허설하는 기간이 짧았다고 들었거든요. 서로 너무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끼리 그 정도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니까, 다른 전시 때 이미 호흡을 맞춰본 팀인가 궁금했어요.
티노 세갈 프리스타일 축구선수 한 명, 댄서 한 명, 사이클 리스트 한 명과는 제가 이전에 작업한 적이 있어요. 이들과는 이제 2년 정도 작업을 함께해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이해도가 생겼어요. 사람이 같은 작업을 오래 꾸준히 하면, 그것도 수십 년간 지속한다면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그 일의 핵심은 뭔지 잘 알게 되죠. 자기만의 방식과 도구가 생기고요. 자연스럽게 그게 바로 그 사람의 테크닉이 되기도 합니다. 문소리 씨도 경력이 오래 되셨으니 작업 때마다 나름의 방식이 있을 거예요. 제 작업의 핵심 중 하나는 ‘느린 변환’이에요. 저는 늘 변환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려고 합니다. 일상에서는 눈앞의 컵을 잡을 때 손을 빠르게 내밀죠. 움직임의 시작과 끝에 악센트가 있는 식이에요. 그런데 제 작업에 그 동작을 넣는다면, 저는 이렇게 합니다. 뻗은 손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느리게 움직였다가… 조금 가속했다가… 다시 멈추기 전에는 또 속도를 줄여요. 이게 저의 기본 문법이에요. 정지 상태에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듯한 움직임. 이걸 댄서들에게 가르치려면 물론 시간이 좀 걸려요. ‘This Entry’ 작업을 전에 같이 해본 프리스타일 축구선수가 일본에서 온 한나라는 인물인데, 한나는 이제 거의 댄서 같아요. 손가락 쓰는 법을 알고, 시간을 늘리듯이 움직이는 법을 알죠. 연습 기간 동안 매일 전문 댄서들의 동작을 봤거든요. 한나의 거울 뉴런이 자연스럽게 댄서들의 속도와 리듬을 흡수하면서 몸에 익힌 거죠. 거기에 어느 순간 한나라는 퍼스낼리티 안에 있는 무언가가 딱 맞물리면서 지금의 동작들을 완성하게 됐을 거예요. 저는 한국 댄서들이 좋더라고요. 교육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바이브도 좋고, 스타일도 좋고. 뭐랄까, 교육에서 나오는 좋은 스타일이랄까요. 오디션 때 한국무용을 전공했다는 댄서가 있으면 동작을 좀 보여달라고 했거든요. 대체 어떤 교육을 받은 건지 이해하고 싶었는데, 잠깐 보여주는 동작 가지고는 잘 모르겠더라고요(웃음).

리움미술관 M2관 지하층의 메인 공간에서는 전시 기간 동안 시기별로 서로 다른 세 작품을 보여줍니다. 현재는 ‘This Entry’가 진행 중이고, 마지막 작품인 ‘This youiiyou’ 때는 아이가 등장한다고 들었어요. 2010년 구겐하임에서 개인전을 하실 때도 그랬고, 해석자 중 미성년자도 포함된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경우 통제 불가능한 리스크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나요? 나라별 관람 문화와도 관련이 있겠고요. 어린아이와 작업할 때의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티노 세갈 잠깐만요, 저는 아까 문소리 씨가 사용한 표현이 괜찮은 것 같거든요. ‘퍼포밍’, ‘액팅’, ‘비잉’. 그럼 이제 ‘해석자’보다 ‘비어(Be-er)’라고 할까요?(웃음). 그들은 그냥 비잉 하는 존재거든요. 아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게 전부예요.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런 셈이죠. 아기들에겐 제가 연출을 지시할 수도 없고요. ‘This youiiyou’를 네덜란드에서 반년 동안 선보인 적이 있어요. 몇 주 동안 진행하고 나면 아기들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더라고요. 놀라운 일이죠. 5월 말에 여러분 모두 꼭 보시면 좋겠네요.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해요. 메인 공간에서 지금 진행 중인 ‘This Entry’ 이후, 4월 들어 선보일 ‘This Joy’에서는 베토벤 음악에 맞춰 댄서들이 노래하면서 한 가지 신체 부위만 이용해 춤을 춰요. 5월 중순부터 선보일 ‘This youiiyou’에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보다 더 강한, 부모와 아이 사이의 그 압도적 관계에 대한 거죠. ‘관계’는 늘 제가 관심 갖는 주제예요.

작가님은 어떤 예술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각성에 가까운 경험을 하신 적 있나요? 문소리 씨는 요즘 공연 중인 <춤이 말하다>에서 배우가 되기까지, 그리고 배우가 된 이후의 스토리에 대해 자기 고백처럼 들려주시거든요. 원래 극도로 내향적이고 정적인 아이였는데, 고등학생 때 연극 <에쿠스>를 보고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게 지금의 문소리를 만든 시작점이었죠. 문소리 배우의 <에쿠스>와 같은 경험이 작가님에겐 무엇이었을까요?
티노 세갈 저는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집에서 자라진 않았거든요. 가족 중에 문화 쪽과 관련된 사람도 전혀 없었고요. 그러다 열여섯인가 열일곱 살 때, 파리에 있는 테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에서 무용 공연을 봤어요. 제가 혼자 살기 시작한 후였죠. 그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에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댄서가 되고 싶다.’ 오래전 일이라 공연명도, 누구 작품이었는지도 통 기억이 안 나요. 마침 2024년 파리 올림픽 기간에 그 극장에서 ‘This Entry’를 선보였거든요. 그때 좀 알아내려고 했는데 못 알아냈어요. 제가 기억하는 건 무대에 소파가 있었다는 정도인데…. 그러니까 ‘극장’이 저의 시작이었던 셈이에요. 물론 그보다 먼저 ‘교회’가 있긴 했어요. 어릴 적엔 교회와 거기서 치르는 의식이 좋았는데, 열세 살 때부터는 더 이상 좋지 않았어요. 교회에 대해 알수록 환멸을 느꼈죠. 그런데 나중에 극장에 가서보니 ‘아, 이건 또 다른 종류의 세속적 의례구나’ 싶었어요. 결국 인간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행하는 다양한 의례에 관심이 생겼죠. 참 매혹적이에요.

미술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미술관이 가진 함의나 결핍 등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요.
티노 세갈
인류 역사의 어떤 의례를 떠올려봐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에너지를 교환하고 나누는 식이었어요. 에너지가 함께 모이도록 만들었죠. 그런데 전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개인을 위한 의례예요. 혼자 걸어 다니며 경험하는 일이잖아요. 토니 베넷이라는 학자는 ‘차가운 의례(Cold Ritual)’라는 표현을 씁니다. 대부분의 의례가 사람을 따뜻하게 달궈주려 하는 반면에, 미술관의 의례는 더 통제되고, 이성적이고, 판단하는 양식으로 이끌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미술관에는 공동체적인 요소나 공유된 에너지가 없어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천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때 아테네 극장은 대략 1만 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숫자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아테네의 가구 수와 맞먹는 규모예요. 어떻게 보면 도시 전체가 극장 안에서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었던 셈이에요. 그런데 프랑스 같은 국민국가를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 때쯤에는 인구수가 1,000만 명, 2,000만 명 정도였겠죠. 그 정도 인구를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나 경기장은 없어요. 다만 몇 년에 걸쳐서라면 모든 시민이 루브르를 걸어 다닐 수는 있을 거예요. 루브르는 그렇게 국가라는 개념을 구현할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도시국가든, 국민국가든, 마을이든, 규모와 상관없이 인간이 만든 사회 구조는 그 공동체를 드러내고 확인할 물질적 장치를 필요로 해요. 그래서 미술관의 탄생이 천재적인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같은 장소로 불러들이는 방식이니까요. 그리고 국민국가라는 건 민주주의의 시작이기도 하니, 그 즈음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개인주의적이고 개별화된 방식으로 발전해온 점도 있죠.

전시를 위한 오디션 때부터 몇 주간 한국에 머무르면서 여러 질문을 받으셨을 겁니다. 혹시 이제 작가님이 질문을 남긴다면요?
티노 세갈
제가 질문을 한다면… 글쎄요, 질문한다는 행위 자체에 관한 질문이 될 거예요. 작품과 이 장소가 곧 질문이죠. 당신이 권력의 장소인 미술관에 왔는데, 이곳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 자체로 관객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요. 당신이 힘을 가진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하는 걸 좋아해요. 다만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의 건축적 성격상 질문하는 순간이 별로 없긴 합니다.
문소리 저는 이번 전시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라는 생각이 충분히 듭니다. 컨템퍼러리 아트에 대한, 혹은 미술관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는 거죠.

포토그래퍼
니콜라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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