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느의 새로운 수장이 된 마이클 라이더. 독보적인 프렌치 감성의 디자인을 선보여온 패션 하우스에 이전과는 결이 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 20년간 패션계에서 자신만의 궤적을 성실하게 차곡차곡 그려온 마이클 라이더(Michael Rider)에게 마음을 붙잡아주는 좌우명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는 잠시 생각한 뒤, 여유롭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파티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 거예요.”

지난해 10월, 수개월간 이어진 소문 끝에 라이더가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의 뒤를 이어 셀린느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자 패션업계는 그의 이력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니콜라 제스키에르 아래에서 발렌시아가의 핵심 디자이너로 성장했고, 피비 파일로 시절의 셀린느에서는 스튜디오 디자인 디렉터로 하우스의 전성기를 함께했다. 이후 폴로 랄프 로렌에서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며 잠재적 후계자로까지 거론된 인물이다. 그럼에도 마이클 라이더에 대한 정보는 놀랄 만큼 적다. SNS 계정도 없고, 공식적으로 공개된 사진 역시 인디 매거진에 실린 몇 컷이 전부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이 자리는 결국 그에게 돌아올 운명이었다고. “마이클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시험하는 순간들과 부딪쳤어요. 그럴 때마다 늘 타협보다 진정성을 택했죠. 마이클의 놀라운 점은, 언제 어디서나 ‘나다운 모습을’ 유지한다는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페르소나가 따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이죠.” 배우 댄 레비(Dan Levy)의 설명이다.
2025년 7월 6일 오후, 파리 루 비비엔(Rue Vivienne) 거리에 위치한 셀린느 본사 안뜰의 거대한 실크 스카프 위로 빗물이 쏟아지던 여름날, 라이더의 데뷔 컬렉션이 공개됐다.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와 질문에 화답하듯, 그가 제시한 셀린느는 실용적이고 화사하며, 프레피한 감성과 특유의 유쾌함이 담긴 아이디어로 가득했다. 오프닝 룩으로 등장한 것은 레깅스처럼 몸에 밀착된 팬츠와 비스듬히 잠근 카키 블레이저. 팔에 감아 올린 듯한 체인과 참 장식은 한때 퐁뇌프 다리를 가득 메운 ‘사랑의 자물쇠’를 떠올리게 했다. 라이더는 전임자들에 대한 기지 넘치는 오마주도 잊지 않았다. 피비 파일로가 15년전 선보인 러기지 백에는 스마일 이모티콘을 연상시키는 곡선형 지퍼를 더해, 하드웨어에까지 유쾌한 표정을 입혔다.
쇼가 끝나자 라이더를 향한 업계의 시선은 호기심에서 존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데뷔 쇼를 직접 찾은 디올의 신임 아티스틱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이렇게 말했다.
“라이더는 자신만의 분명한 언어를 보여줬어요. 지금의 패션을 전방위적으로 바라본, 매우 설득력 있는 비전이었습니다.” 싱어송라이터 앨러니스 모리세트 역시 첫 룩에서 확신을 느꼈다고 했다. “오프닝 룩이 나오자마자 ‘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싶었어요. 셀린느 특유의 차분하고 구조적인 미학에 위트 있는 로큰롤 무드까지 살아 있었죠.” 크리스틴 위그는 쇼에서 인상 깊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레이스업 부츠, 셀린느 라벨만으로 완성된 리틀 블랙 드레스, 아가일 스웨터, 화이트 부츠와 매치한 로열블루 팬츠, 반짝이는 블랙 로프 드레스까지. 댄 레비는 라이더의 형제 조던을 끌어안으며 백스테이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라프 시몬스, 루시 & 루크 마이어 등 오랜 동료 디자이너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 라프 시몬스에게 “라이더가 유난히 빛난다”고 하자, 그는 “셀린느 조명 덕분일 것”이라며 웃어넘겼다.


쇼가 끝난 뒤 셀린느 본사는 ‘Michael’ 혹은 ‘Mikey’라고 적힌 네임카드와 함께 도착한 꽃다발로 가득 찼다. 거대한 해바라기와 릴리, 장미와 데이지가 이어졌고, 안에서는 스태프들이 정교하게 완성된 런웨이를 해체하느라 분주했다. 평론가들은 이번 컬렉션을 셀린느의 과거와 현재가 가장 자연스럽게 공존한 순간이라 평했다. 에디 슬리먼의 스키니 팬츠, 피비 파일로의 퀼로트, 마이클 코어스 시절의 아메리칸 스포츠웨어 시크까지, 모든 유산이 무리 없이 흡수되었다는 평가였다. 그럼에도 라이더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제 직관과 본능을 믿고 선택해온 결과였으니까요.”
44세로는 보이지 않는 앳된 인상과 깔끔한 이미지가 특징인 마이클 라이더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흐트러진 헤어스타일 덕분에 때로는 프랑스인으로, 짙은 이목구비와 햇볕에 그을린 피부색으로 인해 때로는 브라질 사람으로 오해 받곤 한다. 라이더는 변호사로 일하던 부모님 아래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 제임스는 중재 분야의 국가적 권위자로 평가받았으며, 어머니 엘리너는 시민권 및 빈곤 관련 법률을 다루는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패션을 비롯해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분야에 높은 관심을 보인 아들의 지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라이더는 처음에는 교육자의 길을 꿈꾸며 브라운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브라질에서 1년간 지내며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의 교육학 이론을 탐구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오클랜드의 아메리칸 인디언 퍼블릭 차터 스쿨(American Indian Public Charter School)에 취직해 2년 동안 8, 9학년 학생 17명에게 무려 7개 과목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을 정말 좋아했어요. 낙태나 폭력처럼, 어른조차 견디기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요. 하지만 문득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과제물을 채점하다가 생각했죠. ‘가르치는 일은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지만, 쉰 살에 패션계에 뛰어드는 건 불가능하잖아’라고요. 그렇게 재빠르게 짐을 싸서 뉴욕으로 향했죠.”
라이더는 뉴욕의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패션계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제프리 빈(Geoffrey Beene)과 아이작 미즈라히(Isaac Mizrahi)와 긴밀히 작업한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 로헬리오 벨라스코(Rogelio Velasco)의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으며, 이후 모델들이 협찬받은 옷들을 내다파는 것으로 잘 알려진 위탁 판매 전문점 ‘이나(INA)’에서 첫 유급 일자리를 얻었다. 2000년대 초반이던 당시는 패션계가 거대하게 재편되던 시기였다. 럭셔리 하우스들이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떠오르는 신진 디자이너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오래된 브랜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그들 자신도 고액을 받는 셀러브리티가 되어갔다. 라이더는 특히 니콜라 제스키에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제스키에르는 1997년부터 발렌시아가를 지휘하며 조용한 라이선스 브랜드에서 런웨이를 장악하는 파워 하우스로 탈바꿈시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라이더는 파리로 건너가 인턴십을 지원했다. 통역사가 배석한 네 차례의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며칠 뒤, 뉴욕으로 돌아온 라이더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인턴십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이틀 안에 파리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게 너무 드라마틱했어요. 정말 빨리 결정해야 했거든요.” 라이더가 회상에 잠겼다. “웹사이트에 아파트를 내놓았어요. 물건들도 전부 그대로 둔 상태였죠. 작은 가방 하나만 꾸린 채, 그해 여름에 잠깐 만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하룻밤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파리에서 아는 사람이 그 사람뿐이었거든요. 그러고는 말했죠. ‘놀라지 말고 들어줘. 혹시… 너네 집에 신세 좀 져도 될까?’라고요. 정말 많은 사람이 제게 친절했고, 도움을 줬어요. 그 덕분에 이렇게 이상하고 위험해 보이는 결정을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 시즌이 지나고 라이더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그는 제스키에르가 직접 지목해 ‘핀 기버(pin giver)’로, 피팅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그의 모든 필요와 다음 움직임을 감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라이더는 수많은 핀과 가위, 리본이 꽂힌 홀스터를 양쪽 허리에 얹고, 디자이너가 필요한 것을 즉시 건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때의 발렌시아가는 완전히 밀폐된 종교 같았어요. 고요하고, 강렬하고… 모든 대화가 프랑스어로만 오갔죠. 덕분에 저도 반드시 프랑스어를 배워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을 느꼈습니다. 마침 그즈음에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마누라는 남자와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그게 도움이 됐죠.”

지금은 라이더의 남편이 된 마누는 당시 발렌시아가 팀에서 니트웨어를 담당하던 디자이너 에마뉘엘 모를레(Emmanuel Morlet)로, 현재 디올의 니트웨어 컬렉션을 총괄하고 있다. 라이더는 발렌시아가에 합류하기 전 여름, 공원에서 빨간 스웨이드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남자를 보고 눈길을 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파리에서는 꽤나 눈에 띄는 차림이었어요.” 롱 헤어의 일부를 드레드 머리로 연출해 자신도 꽤 튀는 스타일이었던 라이더가 설명을 이어간다. “제가 마누를 보고 있었고, 마누도 저를 쳐다보더군요. 마누는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온몸으로 자신이 ‘프렌치’라는 걸 표현하는 것만 같았어요. 어딘가 언짢아 보이는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는데, 아무 말도 없이 성큼성큼 공원을 가로지르더니 절 지나쳐 갔죠. 발렌시아가 면접이 있었던 네 번 모두 파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매번 일찍 도착해 몇 블록 떨어진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마다 공원에서 본 ‘그 남자’를 보게 됐어요. 하지만 발렌시아가와 연결점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첫 출근 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빨간 부츠를 신은 마누가 들어왔죠. 저를 힐끗 보더니 엘리베이터로 급히 올라갔고요. 나중에 들은 건데, 마누가 위층에 올라가자마자 ‘내가 말한 그 브라질 남자애 기억나지? 왜 그 애가 아래층에 있는 거지?’라고 했대요. 사람들이 제가 미국인이고 새 인턴이라고 말해주자, ‘오, 끔찍해!’라고 외쳤대요. 제가 도착했을 땐 얼굴을 붉히며 구석에 숨어 있었고요. 이후로는 거의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어요.


몇 년 뒤인 2008년에 라이더는 피비 파일로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그녀가 라이더에게 수석 디자이너로 합류해달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라이더는 이후 디자인 디렉터로 승진하게 됐다). 귀한 자리인 만큼 매우 고된 나날이 시작됐다. 라이더는 약 9년 동안 유로스타 열차를 타고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파리에서는 디자인팀의 브리핑을 듣고, 런던에 있는 파일로에게 샘플을 보내고, 패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셀린느의 전설적인 순간들에 얼굴을 비췄다. 파일로가 셀린느를 떠난 뒤 라이더는 다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Calais)로 가서 시리아와 남수단 난민 유입으로 과밀 상태가 되었던 판자촌 정글의 이주민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라이더는 자신과 마누가 파리를 떠나 지낸 그 시기에 대해, “패션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마치 제삼자의 일처럼 바라보며 지내던 그 시간도 참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랄프 로렌이 그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폴로를 위해 디자인한다는 건 그에게 ‘굉장히 낯설면서도 동시에 말도 안 되게 멋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와 같은 세대를 산 미국인이라면, 몸에 ‘랄프 로렌의 정신’이 배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랄프 로렌은 대단한 존재고요.” 라이더는 메디슨 애비뉴 본사에서 처음 랄프 로렌을 만난 순간을, 마치 영화의 첫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올린다. “당연히 엄청 떨렸죠. 대기실은 인조 마호가니 벽과 재즈 음악가들의 흑백 사진으로 꾸민 작은 공간이었고, 실제로 로렌을 보자마자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바라보더니 감동한 것처럼 눈가가 살짝 젖더군요.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잡아 끌어주었어요. 제 손을 잡은 채 사무실로 이끄는데, 계속 뒤돌아보면서 저를 보는 거예요. 정말 이상한 상황이었죠. 그때 저는 콧수염도 있었고, 머리는 지금처럼 희지도 않았어요. 약간 짧은 곱슬이었는데, 무려 랄프 로렌을 만나는 자리니까 최대한 단정하게 보이려고 옆 가르마까지 타고 갔거든요. 침묵 끝에 그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은 우리 아버지랑 정말 똑같이 생겼네요. 엘리스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찍은 사진이 하나 있는데, 정말 빼닮았어요’라고요. 그날 저희는 무려 3시간을 이야기했는데, 신기하게도 옷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라이더가 폴로에서 보낸 6년은 여성복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재탄생시킨 시기로 평가된다. 그래서였을까, 셀린느 쇼에서도 관객들은 자연스레 크리미한 터틀넥 스웨터, 오버사이즈 럭비 셔츠, 스탠딩칼라, 카키 코트 같은 룩들을 통해 폴로 시절의 라이더와 랄프 로렌을 향한 그의 존경심을 엿볼 수밖에 없었다. “랄프는 패션을 지나치게 지적으로 설명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라이더가 말한다. “제가 처음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그가 한 말이 바로 이거였어요. 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하느냐고요. 모든 걸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그냥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고요. 그의 말이 옳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라이프스타일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이유도 그 진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현재로 돌아와보자. 셀린느를 총괄하게 된 라이더는 과연 어떤 비전을 펼치고 싶을까. 설립자 셀린느 비피아나(Céline Vipiana)는 1945년 어린이 맞춤 구두를 취급하는 부티크로 브랜드를 시작했지만, 20년 뒤 ‘실용적인 세퍼레이트’, 즉 오늘날 우리가 스포츠웨어라고 부르는 영역으로 디자인을 확장하며 파리 패션계에 거대한 성취를 남겼다. “셀린느는 현실적인 옷에서 강한 패션을 만들어내는 브랜드예요. 도파민을 끌어내기 위해 굳이 과장하거나 추상적인 영역을 들이밀지 않죠.” 라이더의 설명이다. “요즘의 패션계는 ‘타임리스’와 ‘실용적인 워드로브’를 강조하지만, 그걸 진정한 패션으로 만들어내려 노력하는 파리 브랜드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이더는 아직 스토어 디자인을 돌보지도 못했고, 에디 슬리먼이 과감하게 없앤 브랜드 이름의 악센트(Céline의 ‘é’)를 부활시킬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옷이 남녀 모두에게 오래도록 입히며, 다양한 가격대 및 여러 시대의 아이템들과 자유롭게 섞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라이더의 첫 컬렉션이 남성복, 여성복, 오트 쿠튀르를 모두 포함한 것도 그래서다. 패션계 전반에서 딱딱한 위계질서와 케케묵은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는 현재, 라이더의 이런 ‘가식 없는 접근’이 관객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프레피, 부르주아, 사려 깊음, 대담함. 라이더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 불린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랄프 로렌에서는 아무도 제가 미국인이라고 믿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저는 프랑스인이었죠. 유럽에서는 제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미국적인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라벨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특정한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되기보다, 고객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입는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기를 바란다. 원하는 대로 받아들일 것. 수백, 수천 개의 작고 검은 셀린느 태그로 제작한 드레스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저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두려워요. 저는 열려 있는 결말을 좋아하거든요.” 그의 셀린느가 지금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그 열린 태도 때문이 아닐까?
- 포토그래퍼
- ZOË GHERTNER
- 스타일리스트
- BIANCA RAGGI
- 모델
- Alexia Moutou, Fama Cissé, Iona, Rose at Storm Management, Yahne Bâ at 16PARIS Management. Casting Midland Agency.
- 헤어
- Claire Grech for La Bonne Brosse at Streeters.
- 메이크업
- Satoko Watanabe for MAC at Artlist.
- 세트 디자인
- Félix Gesnouin at Total Worl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