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전설적인 사진가 데이비드 암스트롱을 기억하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과거에 사랑했고, 지금과 미래에도 사랑할 고인의 사진 속에는 동시대 작가들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데이비드 암스트롱(David Armstrong)이 사진가가 되지 않았다면, 분명 천재 예술가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아름다운 말과 재치 가득한 농담, 매력적인 이야기를 사랑했던 그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지만, 암스트롱의 친구들은 여전히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인 그의 철학을 기억하고, 세기말 소설이나 1950년대 영화에서 그가 건져 올린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대화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는 소설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쓴 문장 또는 성경 구절을 낭독하거나 이스트빌리지에 사는 친구가 화재 대피구에서 뛰어내린 어느 1980년대 후반의 일화를 들려주기에 완벽한, 우아하면서도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가진 인물이었다. 50년간 그가 남긴 작품들을 살펴보면 특정 인물과 분위기를 문학적으로 그려냈다는 인상을 받다. ‘완벽한 순수’에 가까운 그의 인물 사진에서는 모델의 복잡한 페르소나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환경까지 포착되어 있다.
암스트롱은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매사추세츠주 알링턴에서 건축업에 종사한 아버지와 보험 회사에 다닌 어머니 사이에서 네 형제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보스턴 터프츠 대학교 내에 있는 예술학교 (School of the Museum of Fine Arts)에 다니며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는 당시 펑크 문화에 주목한 시각 및 행위 예술가이자 1989년에 후천면역결핍증(AIDS)으로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마크 모리스로 (Mark Morrisroe), 미국 하위문화와 그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을 낱낱이 기록한 작업물과 최근 마약성 진통제 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현존하는 미국 예술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떠오른 낸 골딘(Nan Goldin)과 어울렸다(‘낸시’였던 그녀의 이름을 줄여 ‘낸’이라 부른 최초의 인물이 암스트롱이었다). 신기하게도 무리 중에서 가장 옛사람처럼 보이는 인물은 암스트롱이었지만, 그는 그 시절을 대표하는 급진적 보헤미안 무리의 중심축이었다. “데이비드는 소설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어요.” 1981년,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 예술&디자인 학교에 다닐 당시 암스트롱을 처음 만난 예술가 잭 피어슨 (Jack Pierson)의 말이다. 이후 피어슨과 암스트롱, 모리스로, 골딘은 아름다움과 관능적인 분위기, 반문화적 혼란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포착한 사진술 덕분에 ‘보스턴 학파’로 불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스트롱은 여전히 크게 조명받지 못한 20세기 후반의 사진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시선에도 곧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올해 6월 8일 터 9월 15일까지 스위스가 자랑하는 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취리히에서 암스트롱의 초기 인물 사진을 선보이는 압도적 규모의 컬렉션이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 회고전 은 2014년 고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최대 규모이며, 암스트롱의 친구인 뉴욕의 예술가 웨이드 가이튼 (Wade Guyton)과 쿤스트할레 관장 다니엘 바우만(Daniel Baumann)이 큐레이팅을 맡았다. 전시에서는 암스트롱이 소장했던 빈티지 프린트 100점을 선보이는 데 더해 그가 인물 사진을 바라보는 태도와 최종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밀착 인화지 여러 점도 공개될 예정이다. 큐레이터인 바우만이 1970~90년대 암스트롱의 작품에 특별히 끌린 이유도 인화지 속에 암호처럼 스며들어 있는 강력하고도 유약한 특성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작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셜미디어로 인해 사진을 찍는 일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현재 우리는 진정성을 숨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친밀함을 본인을 홍보하거나 나의 입장을 나타내는 데 이용하는 추세니까요.” 바우만이 말했다.
대학 시절, 암스트롱은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곤 했다. 그의 사진은 그때 그 시절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묘한 그리움과 반가움을 끌어내는 매력적인 구성을 자랑한다. “1981년 여름에 마크 모리스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스티븐 타시안(Stephen Tashjian)과 프로빈스타운에 있는 아파트를 빌렸어요. 나중에는 데이비드도 나와서 말수가 적은 한 친구와 지냈는데, 그 친구는 영화감독 존 워터스(John Waters) 무리와도 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데이비드가 존 워터스나 배우 쿠키 뮬러(Cookie Mueller) 같은 사람들을 알고 지낼 뿐 아니라 그들의 사진을 찍곤 했다는 사실에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때의 저희는 워터스의 1981년 회고록 <Shock Value>를 성경처럼 붙잡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이름을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암스트롱은 서툴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자신의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부터 수영과 태닝을 즐기는 모습, 부드러운 굴곡을 지닌 그들의 신체를 렌즈에 그대로 기록했다. 자연광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남다른 능력으로 유명한 암스트롱의 인물 사진을 보면, 유려하고 감각적으로 표현된 빛이 사진 속 풍경에 독특한 분위기를 더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하 세계에서 나와 자연을 온몸으로 즐기는 그의 아름다운 사람들. 암스트롱이 기록한 친구들의 사진은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사랑받는 이미지로 자리하게 되었다.
프로빈스타운은 비좁은 아파트에 모여 지내던 세련된 예술가들에게 해안가의 정취와 여유로움을 선물했지만, 뉴욕을 향한 그들의 애정 어린 시선까지 돌리기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1980년대 중반, 암스트롱은 이스트빌리지의 친구들과 연인, 화가, 배우, 작가, 음악가, 이방인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가 찍은 사진 속 젊은 예술가들은 전설적인 인물들로 성장했는데, 그중에는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빈센트 갈로(Vincent Gallo), 존 루리(John Lurie), 테리 토이(Teri Toye), 르네 리카드(Rene Ricard), 크리스토퍼 울(Christopher Wool)이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이름은 시간의 흔적을 따라 희미해졌지만, 유명한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암스트롱의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들, 즉 그의 성년 시절을 함께했거나 그저 그가 사랑했던 인물들은 정돈되지 않은 침대에 앉아 있거나 벽에 기대고, 쿠션에 엎드리는 등 대개 자연스럽고 편안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렇게 암스트롱이 이들과 느꼈던 끈끈한 유대감은 강력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되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그의 친구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암스트롱의 사진은 르포 기사를 연상시키거나 친구 낸 골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롭고 허를 찌르는 듯한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암스트롱은 오로지 대상의 자세와 형태에 집중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것에서 솔직하고 진실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한 인간은 복잡한 모순을 가진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가 사진으로 찍히는 순간 드러내는 독특한 감각과 경험이 셔터 소리와 함께 기록되기 때문이 아닐까. “데이비드의 사진은 카메라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담긴 차분하면서도 음울한 감각을 그대로 포착해냅니다. 멜랑콜리아는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20세기 특유의 무드죠. 따분하고 나른한 분위기도 엿보이고요.
가령 이런 거죠. 수요일 오후에, 딱히 할 것도 없고 뭘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는 상황이에요. 결국 거리로 나가 나와 같이 따분함을 견디고 있는, 같이 놀 만한 누군가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미적지근한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바우만이 설명한다. 암스트롱의 사진에서는 조급함이나 분주함을 찾아볼 수 없다. 출근 시간에 늦었거나 급하게 점심을 해결하는 듯한 젊은 뉴요커의 얼굴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암스트롱이 주목한 대상은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요즘 인플루언서들처럼 자신을 뽐내거나 라이프스타일을 과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청춘을 잃지 말고, 삶을 즐기며, 자유로움을 사랑할 것.’ 그가 전하고자 하는 유일한 메시지다.
암스트롱은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았을 때도 그는 작업 대상을 확대해 패션 캠페인과 화보 촬영뿐 아니라 뉴욕 매춘부들을 대상으로 한 인물 사진 시리즈를 기획했으며, 유럽 회화 작품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는 풍경 사진 작업도 이어갔다. 암스트롱은 이 기간의 대부분을 다채로운 골동품이 가득한 브루클린의 적갈색 벽돌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생의 말기에는 웨스턴 매사추세츠에 있는 버크셔로 돌아와 씩씩하게 홀로 요양 생활을 이어갔다. 그맘때 젊은 세대의 예술가와 사진가들은 암스트롱의 자유로운 정신과 독특한 사진술에 큰 영감을 받고, 그를 자신들의 정신적 또는 미학적 지주로 삼곤 했다. 모델 시절 촬영장에서 그를 직접 만났던 사진가 이든 제임스 그린(Ethan James Green)은 그 후로 몇 년 뒤인 2011년에 암스트롱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멘토와 멘티로서 끈끈한 관계를 형성했다. “데이비드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겠죠. 그는 제게 빛과 조화의 중요함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사진술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데이비드는 제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사람이에요. 그가 제 삶을 바꾸어주었어요.” 그린의 말이다.
암스트롱은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마법 같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의 기품 있고 다정한 마음은 그가 남긴 모든 업적과 사람들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현명하면서도 친절하고 열린 마음과 풍성하고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암스트롱은 가짜들을 싫어했다. 프린트물이 담긴 박스를 팔로 안은 채 뉴욕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암스트롱을 회상하며 피어슨이 말했다. “데이비드는 스타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눈앞의 고인을 바라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에디터
- Christopher Boll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