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 염혜란, 장윤주 그리고 안은진 ‘시민덕희’의 그녀들

전여울, 김신

배우 라미란, 염혜란, 장윤주, 안은진은 영화 <시민덕희>에서 줄곧 달린다

배우 라미란, 염혜란, 장윤주, 안은진은 영화 <시민덕희>에서 줄곧 달린다. 보이스피싱을 당한 평범한 시민 ‘덕희’와 그녀 곁의 든든한 세 친구가 벌이는 추적극에서 넷은 한시도 멈춰 서 있는 법이 없다. 그녀들은 떼인 돈을 되찾기 위해 한국에서 칭다오로 종횡무진 달리지만, 캐릭터의 옷을 벗은 스크린 밖에서도 나아간다. <시민덕희>로 뜨거운 한때를 보낸 그녀들이 다시 <더블유>의 카메라 앞으로 달려와 뭉쳤다.

안은진이 입은 레더 트렌치코트는 포츠 1961, 검정 롱부츠는 코치, 장윤주가 입은 라운드 숄더 맥시 트렌치코트는 발렌시아가, 염혜란이 입은 검정 가죽 트렌치코트는 시렌, 라미란이 입은 레더 퍼넬 넥 드레스는 뮌 제품.
장윤주가 입은 라운드 숄더 맥시 트렌치코트는 발렌시아가, 염혜란이 입은 검정 가죽 트렌치코트는 시렌, 라미란이 입은 레더 퍼넬 넥 드레스는 뮌 제품.
브이 로고 시그너처 디테일 터틀넥 톱과 락스터드 펌프스는 발렌티노 제품. 레깅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염 혜 란

요즘 잘 되는 작품에는 늘 염혜란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휴, 잘 안 된 작품도 많아요(웃음). 그런 것 떠나서, 그저 제 이름으로 어딘가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죠.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어쩌면 이 대사 한 줄의 힘이 컸죠.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 로리>에서 가장폭력에 시달리는 주부 ‘현남’으로서 뱉은 대사였어요.
대본을 받자마자 그 대사에 밑줄부터 그었어요. “어떡해, 이게 현남의 모토야. 캐릭터의 중심이야, 키워드야” 싶었어요. 그 말을 너무 잘 뱉고 싶었죠. 지금 생각하면 배우로서 어떤 지표가 되어준 대사예요. 어떤 캐릭터를 만나든 일관성, 정당성만 생각하지 말고 그 인물의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변칙성에 대해 생각하자란 방향성을 주었달까요. 또 다른 의미로 저에게 의미가 컸던 게, 이 한마디에 위로를 얻은 사람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런 ‘현남’을 보고 ‘왜 우리가 슬픔에 침잠해야만 해’라며 용기를 얻은 분들이 많았대요. 저는 <더 글로리〉에서 이 대사 한 줄을 만난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어요.

<시민덕희>로 만난 ‘봉림’은 어땠나요?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라는 점에서 ‘현남’과 포개지기도 합니다.
주인공 ‘덕희’(라미란)와 같이 세탁 공장에 다니면서 물심양면으로 ‘덕희’를 돕는 캐릭터예요. 조선족이라 연변 사투리를 쓰고 중국어에 능통하죠. 좀 도전 의식이 생기는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그간 스크린에서 조선족을 묘사하는 정형화된 톤이 있었잖아요. 드세다든가 어떤 욕망도 없이 생계에만 전념한다든가. 전부 선입견이죠. 그래서 ‘봉림’은 좀 더 사랑스럽고 욕망이 풍부한 사람으로 그려보고 싶었어요. 다행히 감독님도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는 다른 모습으로 가보자는 의견이었고요.

<시민덕희>로 첫 상업영화에 데뷔하는 박명주 감독이 연출을 맡았죠. 젊은 세대의 연출자와 호흡하는 경험은 어땠나요?
뭐랄까, 껍데기가 없다는 인상이었어요. 어떤 사람으로 보여야겠다는 의식이 없었죠. ‘내가 견고하게 벽을 세워놓고 당신들을 대하겠다’가 아니라 정말 열려있었어요. 사소한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지만 그렇다고 중심이 흔들리는 분도 아니거든요. 사실 ‘봉림’은 네 인물 중 가장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캐릭터예요. 주인공 ‘덕희’는 떼인 돈을 어떻게든 되찾아야 하는 인물이고, ‘숙자’(장윤주)나 ‘애림’(안은진)은 거침이 없는 만화적인 면이 있는데 ‘봉림’만이 현실적인 편에 서 있으니까요. 어쩌면 관객이 가장 자신을 대입해서 바라볼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그 정당성이나 현실성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감독님을 찾아가 번번이 말했어요. “이거 괜찮을까요…(웃음).” 그런데 이런 것조차 전부 받아주는 스타일이셨어요.

이번 작품으로 새로이 일깨우게 된 게 있나요?
다른 배우들을 보면서 느꼈는데, 의욕이 텐션으로 오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저는 의욕이 넘치면 텐션이 올라가요. 그런데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의욕은 의욕대로 놔두고 되레 말랑말랑할수록 더 뻗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떤 아쉬움에서 나오는 얘기인데요. 그런 걸 미란 언니를 통해서 본 거예요. 미란 언니는 정말 말랑말랑한 배우거든요. 그리고 그러려면 실은 큰 용기가 필요하단 것도 알아요. 저한테는 되게 어려운 작업이거든요. 미란 언니는 쉬울 수 있지만(웃음). 그 말랑말랑함이 배우로서 지닐 수 있는 대단한 강점이고 미덕이자 제가 가지지 못한 아쉬움인 듯해요. 그래서 ‘내가 조금만 더 말랑말랑해져도 되지 않을까?’를 이번 작품을 하면서 배운 것 같아요.

자기 확신과 자기 의심. 배우 염혜란의 동력은 무엇에 더 가까운가요?
연기에 의심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또 확신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끊임없이 ‘내가 맞나?’란 생각을 해요. 계속해서 돌아봐요. 지금 고민하는 지점과도 맞닿은 부분이긴 한데, 최근 들어선 ‘과연 연기에 정답은 없을 텐데 나를 믿고 날뛰어봐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요.

지난 작품을 돌이켜 ‘더 날뛰어도 좋다’를 알려준 작품이 있었나요?
작년에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을 하면서 좀 신선한 경험을 하긴 했어요. 빌런 ‘김경자’를 연기했는데 그때 목표가 명확하게 있는 사람의 시원함, 직진성을 가진 자의 통쾌함을 느낀 적이 있어요. 그 사람에겐 어떤 어려움이나 고민도 걸림돌이 되지 않아요. 모든 것이 본인의 단일한 목표로 귀결되거든요. 이건 제가 가지지 못하는 판타지예요. 성격상 저는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정반대의 인물을 만나고 나니까 생각이 드는 거죠. ‘아, 내 인생도 하나의 목표로 무언가가 쭉 이어진다면 되게 시원하겠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나요?
좀 전 말과도 이어지는데요. 저는 워낙 우유부단하고 고민이 긴 사람이에요.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꾸 뭔가에 휩쓸리고 영향을 받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해요. 그냥 내버려두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래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가는 사람의 깨끗함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연기라는 본질만 생각하고 가지치기를 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 나에겐 연기가 중요하지’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스트레스들을 즐겁게 넘기는 방식에 대해 요즘 고민하는 것 같아요.

연기는 염혜란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나요?
연기가 아니면 전 일상만 살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일상을 사는 나에게 판타지를 주는 곳이에요, 연기는. 일 빼고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해보면 사실 없거든요. 순수한 즐거움으로 하는 일이 없어요. ‘연기가 없었다면 내 일상에 판타지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안은진이 입은 레더 트렌치코트는 포츠 1961, 검정 롱부츠는 코치, 장윤주가 입은 라운드 숄더 맥시 트렌치코트는 발렌시아가 제품.
레오퍼드 트렌치코트는 코치 제품.

안 은 진

“넌 3034년에 태어났어. 거리에서. 게다가 외계인이야. 자, 포즈 해봐!” 옆에서 당신의 촬영을 지켜보던 장윤주가 이런 디렉션을 했죠.
순간 제가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참가자인 줄 알았습니다(웃음).

하하. 오늘 보니까 현장에서 어떤 막내였을지 그려지던데요?
집에선 장녀인데 촬영장에선 막내로 예쁨 듬뿍 받았죠. 참 감사해요. <시민덕희>는 ‘덕희’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이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잖아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그 케미스트리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이 팀에 있으면 참 많이 배우고 재미있겠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그렇게 촬영 현장에서 언니들을 만났는데 순식간에 친해졌어요. 지방 촬영도 많았지만 쉬는 기간에도 계속 만났거든요. 아직도 단체 채팅방이 활성화되어 있어요.

이번 작품에선 칭다오의 택시기사 ‘애림’을 연기하죠. 어쩌면 ‘애림’이 등장한 이후 극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예상해요.
맞아요.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기 위해 한국에서 칭다오로 넘어온 인물들이 ‘애림’을 만나면서 추적에 힘차게 시동을 거니까요. 우스갯소리로 이번 작품에서 무엇을 담당했냐 물으면 ‘저는 운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사실 주인공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캐릭터예요. 그리고 ‘애림’ 캐릭터는 현장에서 완성되기도 했어요. 촬영 기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친해지고 관계가 무르익으면서 캐릭터와 신이 만들어진 부분도 컸거든요. ‘애림’을 파고들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옆에서 감독님이나 언니들이 ‘은진아, 이렇게 한번 해봐, 도와줄게’라면서 조언을 많이 해주셨어요. 늘 고민, 걱정이 많은데 그런 존재들이 곁에 있으니 저 자신을 믿고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마다 작품과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요?
연기과 동기들이나 들어가는 작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과 같이 대본을 리딩해본 후 의견을 받는 과정을 꼭 거쳐요. 어쩌면 그들이 첫 관객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잖아요. 가장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보려고 하죠. 또 혼자보다는 여러 의견을 들어보고 거기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되니까요. 이런 방식은 제 성격과도 좀 맞닿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도 힘든 일이 있으면 주변에 얘기해서 널리널리 알리고 관계를 맺으면서 해결하는 편이거든요.

배우 안은진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이야기들 사이엔 어떤 교집합이 있나요?
저는 어쨌든 성장 이야기가 좋아요. 지금까지 서사가 전개되며 성장하는 인물을 자주 연기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직 뭔가를 더 배우고 싶고 성장에 목마름이 있는 나이인가 봐요.

최근 종영한 MBC <연인>도 ‘길채’의 성장기나 다름없었죠.
그렇죠.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민하’도 극이 전개되면서 점차 진정한 의사로 거듭났고요. 저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캐릭터가 좋은 것 같아요. 돌이키면 한 해 한 해 참 많이 배우고 많은 캐릭터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차근차근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었어요. 특히 작년 <연인>에서 ‘길채’로 살아가면서 그랬던 것 같고요. ‘길채’는 그 누구보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캐릭터였고, 그 덕에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배울 수 있었거든요.

“불안감을 떨치는 계기를 만들어준 작품이다.” 작년 출연한 JTBC <나쁜엄마>에 대해선 이런 말을 했어요.
<나쁜엄마>에서는 ‘영순’(라미란)과 ‘강호’(이도현)의 모자 관계가 가장 중요한 큰 플롯이에요. 제가 연기한 ‘미주’는 늘 ‘강호’ 곁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와의 10대부터 30대까지를 채워가는 인물이었죠. 반면 <연인>에서 ‘길채’는 서사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어요. 언젠가 연기를 야구에 빗대 한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들은 기억이 있어요. 주인공이 투수라면 그 곁의 인물은 타자라는 말. 어쩌면 ‘길채’를 연기할 땐 투수의 심정으로, 늘 방어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한 번도 흔들리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임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치밀해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면 <나쁜엄마>에서 ‘미주’로 살아갈 땐 타자로서 어떻게 이 신을 더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몰두했죠.

타자의 경험은 안은진을 어떻게 성장시켰나요?
맡은 캐릭터에 더 내 색깔을 입혀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요. 조금은 개운해진 마음으로 연기를 통해 놀 수 있었고, 그렇게 늘 따라다니던 불안감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 같아요.

장윤주가 입은 검정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브라운 가죽 팬츠는 아크네 스튜디오, 안은진이 입은 레더 보머 재킷과 쇼츠는 YCH 제품.
레드 가죽 원피스는 에르메스, 검정 플랫슈즈는 생 로랑 제품.

장 윤 주

기자간담회에서 박명주 감독이 이런 말을 했어요. “꾸밈없이 자신을 보여주는 연기가 캐릭터와 굉장히 잘 어우러졌다.” <시민덕희>에서 맡은 ‘숙자’는 장윤주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요?
‘숙자’는 일단 취미가 재미있는 친구예요.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홈마’를 취미로 하는 캐릭터인데 좀 무모해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화끈한게 특징이에요. 다른 주인공들이 칭다오행 결정을 망설일 때도 일단 가보자고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스타일이죠. 그런 ‘숙자’가 저랑 막 그렇게 크게 다르진 않았던 것 같아요(웃음). ‘숙자’의 성격은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카드이기도 했고, 그걸 좀 잘 꺼내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접근한 것 같아요.

소문으로 전해지는 ‘가정 방문’의 실체도 궁금합니다. 촬영 중 배우 안은진을 집으로 초대해 같이 연습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하하. ‘숙자’처럼 말했죠. ‘같이 한번 해보자!(웃음)’ 은진이랑 둘이서 시나리오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를 맞춰봤어요. 서로 맡지 않은 역할까지 해가면서. 사실 은진이가 현장에서 막내고 저도 배우로선 아직 배워가는 입장이다 보니 서로 많이 의지한 것 같아요. 그리고 <시민덕희> 팀이 좀 그런 구석이 있었어요. 서로 정말 즐겁게 으쌰으쌰 하면서 작업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정말 그 어떤 현장보다 많이 웃었던 것 같아요.

2021년 영화 <세자매>로 호평받은 후 <시민 덕희>로 돌아온 셈이에요. 배우로서 그사이 여러 경우의 수가 있었을 듯한데 <시민덕희>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영화 <베테랑>을 2013년에 찍고 2015년 극장 개봉하면서 모델에서 배우로 첫 연기 데뷔를 했잖아요. 사실 그 이후로 감사하게도 출연 제안을 여러 번 받았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어요. 연기에 확신이 없는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의외네요. <베테랑>은 첫 스크린 데뷔작이었음에도 천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잖아요. 때론 이런 숫자들이 ‘나’에게 확신을 주기도 하는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제가 18세에 모델로 데뷔했는데 그와 동시에 영화 제의가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패션에 거의 미쳐 있던 시기여서 큰 뜻이 없었어요. 정말 좋은 기회로 <베테랑>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실은 그 후에도 연기의 메커니즘에 대해 패션만큼 파악하진 못하고 있다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계속해서 남더라고요. 그래서 이후 제안해주시는 역할에 죄송하지만 번번이 고사 의사를 전했고, 그러다 <베테랑> 이후 거의 6년 만에 <세자매>에 출연한 거예요.

<베테랑>의 ‘미스 봉’과 <세자매>의 ‘미옥’ 사이엔 엄청난 이미지 낙차가 있죠. 몸에 착 달라붙는 핫핑크 트레이닝복을 입고 첫 등장했던 ‘미스 봉’과 달리 ‘미옥’은 만년 슬럼프에 시달리는 극작가였어요. 차기작에서 완전히 새로운 얼굴을 꺼냈음에도 그게 자연스레 작품에 묻어나면서 연기자로서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는 평을 받았고요.
그렇죠. 그런데 처음 <세자 매〉 제의를 받았을 때도 실은 엄청나게 고민했어 요. 그러다 결론을 내렸죠. ‘이렇게 거절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한번 해볼까?’ 그렇게 <세자 매〉를 찍었는데 확실히 저에게 어떤 전환점이 되 어준 작품이었어요. 그간 지고 있던 연기에 대한 무게감을 좀 덜고 ‘연기를 다시 한번 해보자’는 계기를 만들어줬으니까요. 사실 <시민덕희>도 <세자매>가 아니었다면 도전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세자매> 때 ‘한번 해볼까’ 했던 마음이 <시민덕희〉 때 ‘재미있게 한번 해볼까’로 바뀔 수 있었어요.

배우로서 당신의 어떤 얼굴이 더 발견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나요?
음, 글쎄요. 사실 작년에 영화 한 편을 찍으며 만난 캐릭터가 있어요. 제가 느끼기엔 옷으로 따지면 유니클로 같은 느낌의 인물이에요. 미니멀하고 표정도 많지 않고 깨끗한. 영화를 연출한 감독님이 매번 제가 즐겁고 재미있는 캐릭터를 하는 것 같아서 제 안에서 의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작년 그 작품을 찍으면서는 저 스스로도 무척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식의 발견이라면 어떤 인물이든 늘 반가울 것 같아요.

요즘 자신에게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면요?
사실 오래전부터 유튜브 채널을 해볼까 생각해왔는데 작품을 연이어 하다 보니 엄두가 안나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정말 해볼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평소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단편영화처럼 인트로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콘티 작업까지 직접 하고. 유튜브에선 제가 만난 세계들에 대해 말할 것 같아요. 거기엔 몸의 세계도 있고요. 그냥 ‘나다운’ 걸 해보고 싶어요. 대중적으로 가진 않고요. 제가 대중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컬러를 잘 녹이고 싶은 마음인 것 같아요.

라미란이 입은 벨티드 레더 코트는 YCH, 염혜란이 입은 프린트 톱은 로에베 by 육스, 버뮤다 쇼츠는 레호 제품.
후드 드레스와 슈즈는 아크네 스튜디오 제품.

라 미 란

“라미란은 연출자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다.” 이번 〈시민덕희〉를 연출한 박영주 감독이 한 말입니다. 이 정도면 거의 극찬이죠?
아, 그 이상을 했어야 했는데 그대로 했네(웃음). 더 잘했다는 말 들었어야 하는데!

하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덕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요.
뭐랄까, 벅차오름이 있었어요. ‘덕희’는 엄청난 생활력을 가진 엄마이자 열심히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던 소시민이거든요. 그런데 보이스피싱 범죄를 당하며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고 거리에 나앉게 돼요. 보통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자신이 피해를 당했음에도 본인 잘못이라며 자책감을 갖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 ‘덕희’는 말해요. “내 잘못이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거야.”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덕희’란 인물이 굉장히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게다가 떼인 돈을 찾으러 멀리 칭다오까지 떠나고. 용기를 내서 실행에까지 옮기고 마는 인물인 거죠. 그래서 덕희가 한번 되어보자고 생각한 것 같아요.

tvN <응답하라 1988>, JTBC <나쁜엄마>에 이어 이번 작품으로 또 한 번 엄마 캐릭터를 소화합니다. 화끈한 여장부 면모를 지닌 ‘미란’, 어려운 상황 속 악착같이 아들을 키워낸 ‘영순’에 이어 ‘덕희’는 어떤 모습의 엄마일까요?
글쎄요, 물론 ‘덕희’가 엄마이긴 하지만 저는 초점이 너무 모성에 집중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엄마란 ‘덕희’라는 인물이 인간으로서 성장해가는 어떤 상황적 조건일 뿐이지 이번 작품이 모성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시민덕희>는 명확하게 한 인간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너진 한 사람이 ‘나’ 스스로를, ‘나’의 존엄성을 찾아가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연출한 박명주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우선 감독님이 2019년 연출한 중편 <선희와 슬기>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어요. 보는 내내 ‘참 독특하다’ 생각한 작품이에요. 그런 궁금증을 안고 촬영장에서 만났는데 첫인상은 영락없이 맑은 아이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들어가니 본인이 고집하는 것에 있어서는 끝까지 밀어붙이시더라고요. 거기서 강단을 봤달까요. 그런데 감독님이 팀을 잘 만난 것도 있어요(웃음). 진짜 배우들 누구 하나 까탈스러운 사람이 없었거든요.

하하. 비단 이번 <시민덕희>뿐 아니라 작품을 만나면 어떤 입구로 접근을 시작하는 편인가요? 과거 인터뷰에선 ‘주어진 텍스트대로 연기할 뿐이다’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어요.
왜냐하면 텍스트가 배우들에겐 성경과도 같은 거니까요. 대본이 말도 안 되게 이상한들 우리에겐 <수학 의 정석>과도 같은 거예요.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배우가 찾아가는 거죠. 또 시놉시스를 처음 받으면 무엇보다 어디서 어떻게 ‘뺄’지를 생각해요. 전 항상 보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거든요. 누군가의 연기를 봤을 때 감정이나 말, 모션으로 뭔가를 설명하려 드는 순간 약간 뒷걸음질 치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빈 공간을 내줄 때 관객이 다가갈 수 있는 자리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빈틈없이 꽉 차 있으면 그저 방관자처럼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늘 여백을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어느 작품에서든 ‘0’에 수렴하는 연기를 펼친다는 인상이 있었어요. 달리 말하자면 부족하지도, 과잉되지도 않은 자연스러움을 제시한달까요.
가끔 배우들이 연기력을 뽐낼 때가 있잖아요. 그럼 ‘아, 나도 좀 더 뭘 해야 하나?’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왜냐하면 어떨 땐 그게 잘 맞는 작품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정직한 후보>는 코미디 영화니까 ‘대놓고 웃겨보자’란 생각으로 있는 거 없는 거다 끌어모아서 연기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 외의 경우에는 ‘공간’을 보죠. 어디서 힘을 줘야 할지 흘려보내야 할지 보는 거죠. 그리고 사실 어떤 작품을 보고 배우들이 해석하는 건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거기서 하나만 바꾸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보이는 대로만 하면 재미가 없더라고요.

언젠가 ‘10년마다 좋은 작품이 날 찾아오는 것 같다’는 말을 했죠. 실제 1995년 연극으로 데뷔했고, 10년 뒤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첫 스크린 데뷔를 했어요. 그 10년 뒤인 2015년엔 화제작 <응답하라 1988>에 주연으로 출연했고요. 그렇다면 내년인 2025년에 어떤 기대를 품고 있나요?
지금 당장 올해도 문제예요(웃음).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올해를 잘 넘겨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요즘엔 홍수처럼 볼 것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너무 빨리 지나가고 너무 빨리 잊히니까요. 조바심이 드는 것 같아요.

의외입니다. 작품 수만 해도 50개가 거뜬히 넘는 배우의 입에서 ‘잊힘’이란 단어가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아직 전 국민이 절 알진 못하잖아요. 난 아직 배고프다!(웃음)

연기를 하며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점점 없어지죠. 연기를 하면 할수록. 한 인물로 몇 달을 살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렇게 몇 달을 살다 보면 내가 마치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작품이 끝나면 이제 나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게 나 자신을 보면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 거예요. 어떤 괴리감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그럼 관객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인간 라미란의 비밀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나도 날 모르는데 어떻게 알려줘요(웃음). 사실 아직도 몸 어딘가에 몽고반점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하하, 장난이고요. 사실 인간 라미란은 비밀이랄 게 없는 사람 같아요. 저란 사람에 대해서 많이 오픈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예능을 통해서든 뭐든. 가끔 그런 모습에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게 난데. 그런 사람들에겐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죠. ‘이게 나예요. 미안해요.’

포토그래퍼
김희준
스타일리스트
김신(라미란), 조아라(염혜란), 최자영(장윤주), 김현경(안은진
헤어
동우(라미란), 가희(염혜란), 조소희(장윤주), 이혜영(안은진)
메이크업
이명선(라미란), 이승윤(염혜란), 김윤정(장윤주), 조은정(안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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