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광주 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권은경

흔히 미술 전시라 여긴 것들과는 좀 다른 풍경이 펼쳐진 광주 비엔날레

회화, 조각, 영상과 같은 미술의 분류를 처음 제안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 우리가 막연히 ‘미술 작품’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은 사실 몇백 년 전 유럽인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부합한 것을 뜻하지는 않을까? 제14회 광주 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서는 흔히 미술 전시라 여긴 것들과는 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카자 흐스탄 가정들에서 흔한 응접실의 모습. 내부에 카자흐스탄 작가 바킷 부비카노바의 회화들이 설치되어 있다.
BAKHYT BUBIKANOVA, INSTALLATION VIEW, COURTESY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PHOTO: JAEYONG PARK

마타아호 콜렉티브의 ‘투아키리키리’(2023)와 앙헬리카 세레의 ‘내 두 번째 피부에 말의 씨앗을 뿌리다’(2023) 설치 전경. 각각 마오리 여성 작가들과 과테말라 출신 작가가 조상들의 전통 직조 기법을 이용해 ‘미술’로 여겨지지 못한 미학을 보여주었다.
MATAAHO COLLECTIVE, TUAKIRIKIRI (2023). POLYESTER WEBBING. 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 COURTESY MATAAHO COLLECTIVE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영상 작업인 타우스 마카체바의 ‘독수리 평원’(2023). 소련의 시인이었던 작가의 할아버지에 대한 서로 다른 목소리들.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어디까지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다룬다.
TAUS MAKHACHEVA, AT THE EAGLES (TSUMIKH) (2023) (FILM STILL). SINGLE-CHANNEL VIDEO, COLOUR, SOUND. 58 MINS, 39 SECS. COURTESY THE ARTIST. SUPPORTED BY SHARJAH ART FOUNDATION PRODUCTION GRANT

유약어수(柔弱於水)’. 수천 년 전 쓰인 것으로 알려진 동양 철학서, 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하는 말이다. <도덕경> 78장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세상에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다. 그러나 단단하고 굳센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물보다 더 나은 것도 없다. 물은 결코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가볍게 다룰 수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치 물이 단단한 것을 이기듯,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이치를 알지만, 안다고 해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올해 광주 비엔날레의 제목은 ‘유약어수’를 우리말로 풀어쓴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다. 1995년 시작해 올해 14회를 맞는 광주 비엔날레가 4월 9일부터 7월 9일까지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 및 광주 시내 일원에서 열린다. 이 비엔날레는 중요한 현대미술 전시이기도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기리고 민주주의를 문화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독특한 행사이기도 하다.

출발점이 남다른 광주 비엔날레에서는 첨예한 지적, 정치적, 예술적 작업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오프닝으로 향하는 길에 그래서 기대와 걱정이 엇갈렸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피드에서는 주인공이자 편집자, 큐레이터가 되는 요즘 세상에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것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물로 굳센 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진리에 가깝지만 실천하긴 어려울 것 같은 이 문장은 특히나 첨예한 예술을 선보이는 것 으로 알려진 비엔날레 전시와는 동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영상 작업인 불레베즈웨 시와니의 ‘영혼강림’(2022) 속에서, 작가는 영혼을 부르는 의식을 진행한다. 비엔날레 관람의 포문을 여는 작품으로, 이번 비엔날레를 통해 만나게 될 미술의 종류를 예고한다.
 BUHLEBEZWE SIWANI, THE SPIRITS DESCENDED (YEHLA MOYA) (2022) (FILM STILL). VIDEO INSTALLATION AND POOL WITH WATER. 10 MINS, 5 SECS.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A MADRAGOA

마타아호 콜렉티브의 ‘투아키리키리’(2023)와 앙헬리카 세레의 ‘내 두 번째 피부에 말의 씨앗을 뿌리다’(2023) 설치 전경. 각각 마오리 여성 작가들과 과테말라 출신 작가가 조상들의 전통 직조 기법을 이용해 ‘미술’로 여겨지지 못한 미학을 보여주었다.
ANGÉLICA SERECH, SOWING WORDS ON MY SECOND SKIN (SEMBRANDO PALABRAS EN MI SEGUNDA PIEL) (2023). PEDAL LOOM, VERTICAL LOOM AND WOODEN NEEDLE EMBROIDERY. 250 × 700 CM. COURTESY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미술계의 패션위크를 기대한다면

팬데믹 기간 동안 급성장한 미술 시장을 통해 현대미술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이번 비엔날레를 마치 패션위크를 대하듯 기다렸을 법도 하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라는 뜻의 단어인 ‘비엔날레’는 대개 큐레이터 혹은 큐레토리얼 팀이 선명한 주제를 제시하고, 국제 미술계의 흐름을 반영하는 작가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새 작업’을 선보이는 장이기 때문이다. 패션위크에서는 패션 하우스가 저마다 ‘신상’을 공개하고 패션 피플이 모여 멋을 겨룬다면, 비엔날레에서는 전시 주제와 방향에 공감한 큐레이터와 작가가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선보인다(오프닝에 맞춰 전 세계에서 한국을 찾은 언론과 미술계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하루쯤은 비엔날레가 정말 패션위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미술계의 꽃처럼 여겨지는 아트페어와 달리 비엔날레 출품작은 살 수 도, 당장 집에 가져갈 수도 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마주친 아름다운 작품 중 몇몇을 언젠가 아트페어나 옥션하우스에서 보게 될지 모르지만, 그건 비엔날레 전시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요컨대 ‘레디투웨어’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는 곳이라기보다, 디자이너의 철학과 실험적 시도를 소개하는 자리에 더 가까운 곳이 바로 비엔날레다. 달리 말하면 전 세계의 석학을 모은 학술대회에 가까운 행사라고 할 수 있겠다.

알리자 니센바움의 회화 설치 전경. 작가는 광주 놀이패 ‘신명’의 마당극 <어느날 봄날에>를 보고,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역사를 시적으로 풀어냈다.
ALIZA NISENBAUM, INSTALLATION VIEW. COURTESY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3-2023(2023) 설치 전경. 관객이 손을 최대한 뻗어 벽에 원을 그리는 참여형 작품. 몸을 측정 도구 삼아 작품이 완성되는 셈이다.
LEE KUN-YONG, BODYSCAPE 76-3-2023 (2023). INSTALLATION VIEW. COURTESY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PHOTO: JAEYONG PARK

‘무엇’ 대신 ‘어떻게’

아트페어나 패션위크와 달리 좀 더 진지한 ‘연구’를 선보이는 자리가 바로 비엔날레라지만,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제목은 여전히 아리송하다. ‘무엇’이라는 대상을 명확히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3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올해 광주 비엔날레에서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걸까?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한 번쯤본 적 있는 작가의 포토제닉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걸까? 물이나 흐름에 관한 작품으로 전시를 기획한 걸까? 아니면 <도덕경>의 한 구절을 빌려 주제를 정했으니, 현대미술 사이에 유물을 놓은 전시를 보게 되는 걸까?

사실, 이번 비엔날레가 이 질문들에 던지는 답은 대체로 ‘아니오’에 가깝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무엇’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어떻게’에 관한, 대상보다는 태도를 설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에서 일하는 한국인 큐레이터 이숙경이 예술감독을 맡은 제 14회 광주 비엔날레는 우리에게 잠시 21세기의 지구에서 국경을 초월해 살아가는 인류 중 한 명으로 세상과 미술을 바라보길 권한다. 이를 위해 명확하게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주제를 던지는 대신,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하나의 태도를 제안한다.

에드가 칼렐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2023)는 과테말라 선주민인 작가가 조상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제사상 차림이다. 작가는 비엔날레 오프닝 전 향을 피우고 작품에 기운을 불어넣는 의식을 치렀다.
EDGAR CALEL, INSTALLATION VIEW. COURTESY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비엔날레의 ‘박서보 예술상’ 수상작인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2023). 작가가 시각 장애 아동들과 코끼리 모양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완성한 이 작품은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이다.
OUM JEONGSOON, ELEPHANT WITHOUT TRUNK (2023). IRON SHEET, WOOL AND FABRIC. 300 × 274 × 307 CM. COURTESY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부드럽고 여린 현대미술

‘태도’를 주제 삼은 현대미술 전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 권의 책을 쓰듯 다섯 개 장으로 나뉜 전시의 첫 번째 섹션에는 ‘들어서며’라는 이름이 붙었다. 비엔날레 전시관 1층을 가득 채운 이 챕터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출신의 작가 불레베즈 웨 시와니의 <영혼 강림>(2022) 한 점으로만 구성된다. 자연 환경을 가득 채운 영혼을 상상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과 살아 있는 식물이 놓인 흙무더기, 천장에서 아래로 영상을 투사하는 거대한 수조 등으로 이뤄진 이 작품에서, 우리는 남아프리카의 전통 무속 ‘상고마’ 전수자이기도 한 작가가 펼치는 치유 의식에 동참하게 된다. 이숙경 예술감독은 컴컴하고 축축한 이 공간이 “새로운 미술의 언어 세계로 진입하는” 길목이라고 말한다.

예술감독이자 큐레이터가 말하는 ‘새로운 미술의 언어’가 마냥 편하고 익숙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불레베즈웨 시와니의 공간을 통과하면 ‘은은한 광륜’, ‘조상의 목소리’, ‘일시적 주권’, ‘행성의 시간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네 개 섹션이 비엔날레 전시관 건물 각 층에서 차례로 펼쳐진다. 제목만으로도 낯선 이 장들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한국인이나 아시안을 벗어나 지구인의 시선을 장착하도록 권한다. 널찍한 전시장에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져가는 지구가 과연 인간만의 소유물인지, 우리가 당연히 여겨온 국가의 경계에 대해 이제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건 아닌지, 막연히 미술 작품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이 그저 몇백 년 전 유럽인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부합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작품이 여유롭게 놓여 있다.

팡록 술랍의 ‘광주 꽃피우다’(2023). 말레이어로 ‘펑크록 오두막’을 뜻하는 작가 집단이 걸개그림으로 표현한 ‘5월 광주’의 이미지들. 광주의 아카이브를 연구하던 중 자신들의 목판화와 닮은꼴 이미지를 보고 이를 되살렸다 한다.
PANGROK SULAP. INSTALLATION VIEW. COURTESY THE ARTIST AND GWANGJU BIENNALE FOUNDATION, PHOTO: JAEYONG PARK

본격적으로 전시가 시작되는 ‘은은한 광륜’의 공간에 들어서서 처음 마주한 팡록 술랍의 거대한 걸개그림들이 그 한 예다. 말레이시아에서 예술을 매개로 커뮤니티 활동을 펼치는 이 예술 집단은 5·18 운동과 관련된 과거의 미술 작품을 살펴본 뒤 목판화 기법으로 강렬한 걸개그림을 제작했다. 시위 현장에서 볼 법한 걸 개그림이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에 걸려 있는 모습이 의아한가? 그렇다면 그런 의아함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한번 의심해보도록 하자. 회화, 조각, 영상과 같은 미술의 분류를 처음 만든 건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이와 같은 점에서, 이번 비엔날레의 작품 설명에서는 ‘선주민(식민지 이주민의 억압 대상을 말하는 원주민을 좀더 순화한 말)’이라는 단어도 자주 눈에 띈다. 아름다운 데도 유럽인이 만든 ‘미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작품’으로 인정 받지 못한 선주민 작가들의 작품. 그 작품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현대미술 비엔날레인 광주 비엔날레에서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전시의 나머지 섹션인 ‘조상의 목소리’와 ‘일시적 주권’, ‘행성의 시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79명의 작가 대부분은 그동안 한국에서는 소개된 적이 없고, 한국뿐 아니라 국제 미술계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당연히 이들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백인 남성과는 거리가 먼, 무척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작가들이다. 이들은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비엔날레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경계가 흐릿하고 흐물거리는 미술을, 때로는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미술의 형태를 조금 벗어난 작품을 보여준다. 신체와 정신의 분리, 서구적 진보와 비서구의 퇴보, 우월한 남성(백인)과 열등한 여성(비백인) 같은 낡고 뻣뻣한 세계관, 그러나 여전히, 혹은 은연중에 건재한 그 세계관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설 자리를 잃은 듯했다.

하지만 ‘부드럽고 여린’ 이 미술 작품들을 본다고 해서 마냥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감각을 깨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 또한 명심해야 한다. 전시장에 놓여 있다면 무엇이든 미술이라는 생각으로 이번 비엔날레를 감상한다면,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그저 제목을 넘어서지 못한 밋밋한 전시로만 남을 것이다. 전시장에는 ‘한때 미술로 취급받지 않았던 것들’이 함께 놓여 있고, ‘미술’을 발명한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과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미술이 있다. 그러니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반대로 의아함과 당혹감을 느낀다면, 자신의 그런 시선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가만,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겠다. 조금 귀찮을 수도 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류적 관점을 요청하는 비엔날레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일이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박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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