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봐도 섹시한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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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물었다. 요즘 당신이 꼽는 단 하나의 섹시한 남자는? 섹시함을 둘러싼 각자의 관점은 선망하거나 인정하는 대상의 육체로, 스타일로, 태도로, 분위기로 향했다.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말솜씨 마크 저커버그

섹시한 사람은 검색 대상이다. 우리는 섹시한 사람의 영상이나 사진을 검색하고, 반복해서 본다. 그런데 이성애자 남자가 이 행동을 여자가 아닌 남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그게 바로 남자가 봐도 섹시한 남자 아닐까? 내가 제일 검색을 많이 하는 남자는 바로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다. 많은 이들의 경우처럼 나 역시 영화 <소셜 네트워크>로 그를 만났다가, 각색된 영화가 아닌 실제도 궁금해졌다. 그 후 그의 매력에 빠지다 못해 첫 미국 여행지를 실리콘밸리로 선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가 좋아한다는 필즈 커피도 마시고 싶었고, 페이스북 본사에 가 그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어서.

마크 저커버그의 가장 큰 매력은 ‘스타일’이다. 그는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식석상에도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당당함에서 오히려 묘한 섹시함을 느낀다. 다부진 체격에 회색 티셔츠가 꽤 잘 어울리기도 하고. 최근 미국 청문회장에 정장을 입고 나온 모습을 보면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 ‘남자는 정장핏’이라는 명제가 편견임을 말해주는 남자다.

그 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고 나면 섹시함은 배가된다. 저커버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선택을 최소화한다고 한다. 즉, 옷 고르는 시간도 아깝다는 뜻이다. 그게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선택과 집중의 효용에 관해 심리학적 근거를 덧붙여 얘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저커버그가 가진 섹시함의 원천은 그의 ‘언어’가 아닐까 한다. 당당하면서도 미끈한 언변을 듣자면 영어를 못 알아듣더라도 멋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버드 졸업 연설 영상은 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가 말하는 방식과 연설문을 통해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글|장용민(방송 PD)

시공을 관통하는 아방가르드 클라우스 노미

‘그 사람 섹시하다’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성적 매력만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지금이야 너무도 흔한 말인 ‘섹시’가 한국에 상륙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 단어가 국내 공중파 TV나 대중 매체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내가 체감하기로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다. 그 이전에 ‘섹시’는 성적 의미로만 사용되어 공공연한 언급에 제약이 있었지만, 봉인이 해제되면서 강둑이 터지듯 남발에 가까울 정도로 각종 매체가 섹시로 물들었다. ‘섹시’라는 단어를 보다 많은 대중이 사용하게 되면서 그 말이 포함하는 의미장이 점점 넓어졌고, 제품 광고에서처럼 그 대상이 생물이 아닌 사물에까지 확장됐다. 언어가 재밌는 이유는 그런 데 있다. 사람들의 생각이 언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언어로 인해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점. 그렇게 ‘섹시하다’라는 말에도 새로운 관점과 의미가 부여됐다.

내가 생각하는 ‘섹시함’이란 수평에 가까운 완만한 선이 쭉 이어지다가 순간적이고도 강한 균열로 인해 ‘뿌지직’ 튀어나오는 뾰족한 선의 감각이다, 라고 적어보다가 구구절절 어설프게 말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독일 출신 뮤지션 클라우스 노미(Klaus Nomi)를 소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선 클라우스 노미를 모른다면, 지금 인터넷에 접속하여 이 음악가의 동영상을 먼저 시청해보길 권한다. 그가 다루는 장르며 연출한 무대며, 기타 등등의 그 엄청난 시청각적 타격감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그를 설명할 때는 음악과 패션, 퍼포먼스를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는 중세 바로크풍 패션에 1980년대 당시 흐름 중 하나인, 마치 인조인간 같은 기계적 움직임을 결합해 이질감을 내고, 일본의 가부키 분장이 연상되는 화장을 했다. 오페라와 록을 결합한 듯한 음악과 퍼포먼스가 유기적으로 뭉친 것을 보고 있자면 단순히 기괴하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그에게선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보인다. 긍정과 부정, 기쁨과 슬픔처럼 함께 존재하지 못할 것만 같은 것들이 같이 있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그의 패션과 화장이나 몸짓은 인위적으로 과도하게 활달하고 밝은 것을 지향하는데, 긍정이 극에 달하면 부정을 향한달까? 예를 들어 사람이 웃는 장면을 10초 정도 보고 있으면 밝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 웃는 장면이 1시간 동안 논스톱으로 지속된다고 생각해보라. 무섭고 기괴하며 슬퍼 보이기까지 할 것이다. 너무나도 입체적인 감정과 감각이 아닐 수 없다.

클라우스 노미는 198339세의 나이에 에이즈로 요절하면서, 사람들에게 무대 아래에서의 퇴장은 보여주지 않고 사라진다. 어떤 새로운 문화를 소수의 힙스터만 향유하다가 그것이 퍼지고 엷어지면서 대중에게 소비되는 패턴은 시대를 불문하고 비슷하다. 그런데 간혹 어떤 것은 융해를 덜 마친 채 남아, 인터넷이라는 바닷속으로 이주해 있다. 클라우스 노미는 2019년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대로, 뾰족함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미래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경쟁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글|김시훈(화가)

겸손한 자의 섹시함 마크 러펄로

마크 러펄로(Mark Ruffalo)의 팬이 된 계기는 <어벤져스> 시리즈가 아니었다. 2000년 개봉 당시 영화를 본 다른 관객들처럼 나도 <유 캔 카운트 온 미>를 통해 처음으로 그를 눈여겨보게 됐다. 로라 리니의 문제 많은 동생 역할을 맡은 이 배우를, 그때는 젊은 시절의 말런 브랜도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함께 묶어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두 명이다. 왕년의 말런 브랜도가 발산했던 동물적인 섹시함은 마크 러펄로의 이미지와 다소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굳이 비슷한 동물을 떠올리자면… 덩치 크고 온순한 골든 리트리버 정도? 사생활과 관련된 잡음은 아예 없다시피 하고, 대신 움직일 때마다 각종 미담이 털갈이 시즌의 골든 리트리버 털처럼 흩날린다. 그에게는 홍보 인터뷰 중 <어벤져스>의 스포일링을 한 게 연기 경력 최대의 스캔들일 거다.

내게는 그의 나이답지 않게 순진한 미소, 수줍음과 어색함이 문장 끝에 묻어 있는 목소리, 사려 깊고 예의 바른 태도 같은 것이 무척 섹시하게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섹시한 건 자신이 얼마나 섹시한지를 잘 모르는 사람 특유의 겸손함이다. 자신만만한 나쁜 남자의 매력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과대 평가되어왔다. 겸손함이 나약함은 아니듯 무례함도 강인함과는 별 상관이 없다. 주변 사람을 닥치는 대로 모욕하면서 스티브 매퀸이라도 되는 양 구는 위기의 중년들과 말을 섞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다. 배 나온 사이비 스티브 매퀸들을 목격할 때마다 나이 듦과 섹시함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20~30대까지는 타고난 외모만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가 있겠지만, 40~50대부터는 게임의 룰이 달라진다. 존중과 배려를 배우지 못한 채 전립선만큼이나 비대해진 허영심만 끌어안고 사는 사람의 매력은 빠르게 시들기 시작한다.

마크 러펄로가 늘 수줍게만 구는 건 아니다. 사회적 발언에 특히 적극적인 그는 2010년에 설립한 비영리 단체인 워터디펜스를 통해 환경 운동을 전개 중이며, LGBT 커뮤니티에 연대의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어느덧 50대에 접어든 이 남자는 스크린 밖에서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계속한다. 내게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는 자유로운 영혼보다 세상의 일부로서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이웃이 훨씬 섹시하게 느껴진다. 글 | 정준화(디지털 기획자)

드래그의 선구자 루 폴

“빤스랑 난닝구만 입고 나가라.”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3~4학년 즈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항은 소용이 없었다. 끝내 아버지는 나를 빤스와 난닝구만 입힌 채 바깥으로 쫓아냈다. 이유? 나의 남성성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속옷만 입고도 당당하게 바깥에서 놀 수 있는 아들을 원해서였다. 어떤 아버지들은 나약한 아들을 다그치기 위해 그런 일을 끝내 해내고야 만다. 나는 꽤 (일반적인 용법으로 말하자면) 여성적인 아이였다. 아이들이 모여서 야구를 할 때 나는 줄넘기를 하고 공기놀이를 했다. 아버지는 그게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경상도 뱃사람으로 자란 남자는 자신의 아들이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디서 머시마가 가시나나 하는 짓을 하고 있나 싶으셨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만큼 강인한 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나무에 몸을 가리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의 ‘남성성’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화장대를 보며 어떤 화장을 하면 나도 예뻐질까를 꿈꿨다. 어머니의 치마를 볼 때마다 왜 나는 저걸 입지 못하는 걸까 고민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는 속옷만 입고 쫓겨났던 기억의 트라우마에 종종 시달리곤 한다. 어쩌겠는가.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에도 나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지니지는 않은 남자로 자라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섹시한 남자에 대한 글을 쓰면서 드래그퀸 루 폴(Rupaul)을 소환하고 있다. 지금 나에게 진정으로 섹시한 남자를 꼽으라면 절로 툭 튀어나오고야 마는 이름. 루 폴은 넷플릭스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루 폴의 드래그 레이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80년대에 데뷔한 그는 드래그의 오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해왔고, 드래그라는 마이너 문화를 메인스트림으로 밀어올리는 데 성공한 남자다. 이건 놀라운 일이다. 드래그는 다소 과장된 여성성을 보여주는 동성애자들의 놀이 문화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에서 벌이는 유희다. 메인스트림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던 문화다. 그러나 루 폴은 남성과 여성의 젠더 규범이 무너지는 2010년대의 어떤 상징으로서 드래그를 끌어올렸다. 그는 남성이 여성들의 화장과 옷차림을 하고도 충분히 섹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당연하게도 <루 폴의 드래그 레이스>는 내면에 당당한 인간들의 섹시함으로 가득하다. 나도 언젠가는 드래그를 한번 해볼 생각이다. 어릴적 남성성 강화 훈련을 받은 기억을 뒤집어엎으면서, 화려한 화장을 하고 ‘끼’를 떨어보고 싶다. 그건 어쩌면 내 유년기에 대한 가장 극적인 배반이자 오랜 살풀이에 가까운 행위일 것이다. 글 |김도훈(<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아이콘 이드리스 엘바&제이슨 모모아

남자는 매사에 게으르다. 예외가 있다면 이성을 유혹하는 상황 정도? 일단 유망한 상대가 나타나면 그녀의 마음(몸)을 얻기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 지치면 남자는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강렬한 매력의 소유자를 상상한다. 남자들이 가진 섹시함에 대한 이상은 이런 나태에 대한 판타지에서 출발한다. 뿌리기만 하면 꼬이는 페로몬 향수 같은 부질 없는 짓에 매달리는 이유다.

여자의 몸과 마음을 세차게 열어젖히는 진한 수컷의 내음. 돈 자랑, 차 자랑을 하지 않아도, 선물 공세를 하지 않아도, 이벤트를 챙기지 않아도, 뭔가를 뿌리거나 바르지 않아도, 지난한 설득 작업 없이도 ‘성공’하는 남자. HBO 드라마 <와이어>의 스트링어 벨은 그런 남자다. 부동산 업자의 가면을 쓴 마약상, 그 이중생활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수완가. 이 카리스마 만점의 캐릭터를 연기한 이드리스 엘바(Idris Elba)는 런던 출신의 배우다. 이 역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토르>의 하임달이나 넬슨 만델라 등 아이코닉한 배역을 연기했다. 개인적으로는 엘바 특유의 섹스어필을 느끼기 가장 좋은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지질하게 나온 넷플릭스 시리즈 <턴업 찰리>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잊힌 퇴물 DJ. 생활고에 찌들어 자존심도 멋도 다 버린 캐릭터임에도 그의 본질적인 섹시함은 퇴색되지 않은 채 오히려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친구의 아내이자 잘나가는 DJ인 새라와 단둘이 있는 장면마다 뭔가 사고 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저지르면 안 되는데 저지르게 만드는 바로 그게 이드리스 엘바의 매력이다.

제이슨 모모아(Jason Momoa)는 이런 엘바의 매력과는 상반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로맨틱한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거친 폭력성이 지배하는 매력은 다른 의미로 위험하게 다가온다. 엘바의 섹시함이 에로스라면 모모아의 섹시함은 타나토스. 폭력과 섹스를 본능적으로 가까운 곳에 놓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는 이런 위험함도 섹시함이다. 에로스적 섹시함이 ‘여자들은 이런 걸 원할 거야’라고 남자가 추측하는 모델이라면, 타나토스적인 섹시함은 ‘여자들이 이런 걸 원했으면 좋겠어’라고 남자들이 바라는 모델이다. 폭력은 남성성의 가장 순수한 형태, 생식 행위만큼이나 삶과 죽음에 닿아 있는 것.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칼드로고 역을 통해 제이슨 모모아는 이런 폭력적임을 기막히게 연기한다. 무패를 상징하는 잘린 적 없는 긴 머리카락, 싸움에 방해되지 않도록 정리된 수염. 큰 소리로 경고하는 듯한 문신. 연인의 얼굴이 아닌 정복자의 얼굴. 악명 높은 도트라키 기마 부족의 대족장, 싫어하는 건 부숴버리고 좋아하는 것은 약탈하는 남자, 경외를 부르는 폭력성의 현현. 제이슨 모모아에게는 문명을 벗어버린 이국적인 야성미가 있다. 전통적으로 팝 컬처에서는 비웃음 대상이었던 ‘아쿠아맨’이 카리스마 넘치는 바다의 왕족으로 거듭나게 된 것 역시 8할이 이 야성미 때문 아니겠는가? 글|정성욱(프리랜스 카피라이터)

어른이 된 스타 정우성

1983년생인 나는 1997년 작 <비트>의 정우성 씨를 기억하는 세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우성 씨의 이미지는 비슷했다. 키 크고, 잘생기고, 굉장히 잘생기고, 엄청나게 잘생기고다만 그냥 그런 사람. 잘생겼지만 매력이 보이지는 않는 사람. 그러던 정우성 씨를 섹시하다고 느낀 계기는 20191월에 실린 <시사인>과의 인터뷰였다. “제가 제도권 안에 있던 애가 아니잖아요”로 시작되는 정우성 씨의 말에서부터 이 사람을 다시 보게 됐다. “불우한 어린 시절도 있고 빨리 학교에서 뛰쳐나왔고.” 정우성 씨는 자신의 힘든 과거에서 교훈을 끌어내 더 나은 사람이 됐다. 매력은 입체감에서 오고 입체감은 반대 요소에서 온다. 예를 들어 성공한 자의 불우한 과거나 미남의 세계관 같은 것들. 정우성에게는 둘 다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 앞에 놓인 제도권 밖의 삶을 살며 인간성의 정글 같은 한국 연예계에서 프로 연예인으로 20여 년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난민기구 친선대사가 되고 시사 잡지와 인터뷰를 하며 본인의 영향력을 이용해 멋있는 말을 전하는 어른이 됐다.

나는 개인 정우성 씨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명인이 멋진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인의 삶과 홍보대사의 경험 속에서 인권이란 개념을 깨닫고 예멘 난민 사건에서 본인의 소신을 밝혔다. 화내지 않고 조리 있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어른 남자가 굉장히 드물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된다. 자기 경험을 통해 고유한 세계관을 만든 남자, 그걸 상냥하고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남자, 어릴 때의 고통을 극복한 남자, 게다가 잘생긴 남자, 이런 남자가 어디 있나. 그래서 <시사인> 인터뷰를 읽고 굉장히 기뻤다. 한국에도 이제 조지 클루니나 벤 에플렉처럼 멋진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연예인이 나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 더해 정우성 씨는 유쾌할 때는 참 유쾌하다. 자기 얼굴을 두고 “잘생긴 게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같은 말을 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남자 역시 정우성 씨 말고 누가 있을까 싶다. 멋진 외모에 유쾌하기까지 하다면 남녀 공히 섹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내가 생각한 정우성 씨의 섹시 라이벌은 백종원 씨였다. 백종원 씨 역시 본인의 세계관이 있고 친절하고 명석하고 유쾌하다. 다만 외모가 백종원 씨라 아쉽게도 탈락됐다. 본인도 상대가 정우성이라면 이해하실 거라 믿는다. 글 | 박찬용(칼럼니스트)

개 같은 남자 마티아스 스후나르츠

어떤 생물학적 남성이 섹시한가. 꽤 오래 생각하지 않은 문제다. 우선 요즘 시대의 생물학적 남성은 멋있거나 섹시하려고 하는 순간 한심해진다. 눈에 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스젠더 헤테로인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닥치고 있을 때 제일 매력 있더라. 물론 입 다물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매력적일 수는 없다. 게다가 입이 근질근질한데 잘 보이고 싶어 말을 안 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또한 과묵한 것이 매력인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마초인 경우가 많다. 이를 토대로 따져보면 대충 이런 윤곽이 나온다. 과묵하지만 마초적이지 않고 아첨 떨지 않으면서 배려심이 있는 남자.

내게 딱 맞는 답안이 있다. 벨기에 태생의 마티아스 스후나르츠(Matthias Schoenaerts). 스후나르츠의 매력은 실로 간단하다. 격투기 선수 출신의 육중한 몸과 섬세하고 복잡한 표정이 깃든 얼굴. 악역을 자주 맡지만 그의 매력은 눈에 띄는 여성 곁에 있을 때 드러난다(돋보이는 여성 캐릭터가 없을 때 그는 아주 평범하고 상투적인 캐릭터가 된다). 최근작 <레이서 앤 제일버드>는 마티아스 스후나르츠와 아델 에그자르코폴로스, 두 주인공의 매력을 빼면 별 볼 일 없는 영화다. 내용은 뻔하고 영상은 겉멋 든 티가 역력하다. 고로 우리는 오로지 주인공들의 매력에만 집중할 수 있다. 영화에서 스후나르츠는 범죄자지만 순종적이고, 능력 있지만 나서지 않는 남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래서 영화 속의 그는 가끔 개 같다. 속어로서의 개가 아니라 충실하고 날렵하고 희생적인 독일산 셰퍼드?

여담이지만 엄마가 신혼 때 잠시 산 시골의 과수원에 셰퍼드가 있었다고 한다. 도꾸라고 불리던(도그의 경상도 사투리 버전?) 그 개만 있으면 만 평이 넘는 과수원에 밤늦게까지 혼자 있어도 무서울 일이 없다고 했다. 혼자? 아빠는 어디 가고? 몰라, 그 인간 어디 갔는지. 아빠는 집에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어디 읍내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었겠지. 이로써 답은 더 분명해진 거 같다. 남자보다는 개가 낫다. 그다음은 개 같은 남자고.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 하나. 스후나르츠가 보호를 해줄 수 있어서 그가 섹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레이서 앤 제일버드>에서 정작 그를 보호해주는 건 연인인 아델이다. 개가 나를 지켜주지만 동시에 내가 개를 키우는 것처럼. 서로에게 가장 충실할 때 둘 모두 섹시해진다. 글|정지돈(소설가)

피처 에디터
권은경
아트워크
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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