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오르네 (김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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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불을 붙이길 기다리는, 기대감이 있는 배우 김강우

날이 무뎌진 배우 김강우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예나 지금이나 김강우의 눈빛은 여전히 붉게 빛난다. 앞으로도 그는 지금처럼 타오를 것이다, 뜨겁게.

톱은 우영미 제품.

MBC 드라마 <아이템>이 잡지가 나오기 전에 방영을 시작한다. 덕망 높은 젊은 기업인이지만, 실은 살인을 즐기는 소시오패스 역을 맡았다. 배우에겐 연기적 카타르시스가 있을 수도, 혹은 부담스러운 과제일 수도 있겠다. 판타지 요소를 위해서 많은 장면에 CG를 사용할 예정이다. 그렇다 보니 어떻게 완성될지, 시청자에게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나도 굉장히 궁금한 작품이다. 연기하기에는 평범한 역보다 훨씬 재밌다. 소시오패스가 이제는 너무 흔한 단어다 보니 기존의 캐릭터들과 차별화된 느낌을 주고 싶어 고민을 많이 한다.

고민의 실마리는 어디서 풀었나? 소시오패스의 고정된 이미지와 다르게만 가려 하면 오히려 과부하가 걸려 이상해지기 쉽다. 저런 사람이 진짜 있을까 싶은데, 또 사회 어디인가에는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다. 이 친구는 스스로 현실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여긴다. 그러려면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지. 대중 앞에선 발톱을 숨긴 채, 지배해서 조정하려 드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데 그것 말고는 더 느낄 재미가 없는 자다. 서늘한 얼굴과 해맑은 모습이 공존했으면 했다. 그래서 캐릭터에 국적이 불분명한 ‘버터 냄새’도 넣고, 시각적으로 날이 바싹 서 있는 느낌을 상상하면서 과한 의상을 골랐다. 이렇게 인상부터 말투나 행동, 비주얼 등 모든 걸 캐릭터에 맞춰 바꾸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비현실적인 인물에 리얼리티를 주려면 프리 프로덕션의 과정이 중요한데, 캐릭터에 접근하는 당신만의 방법이 있나? 배우라면 누구든 자기만의 방법이 있겠지만, 내겐 끝없는 상상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평소 안 입는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보는 사람은 그 어색함을 금방 눈치채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마인드컨트롤이 중요하다. 오늘처럼 화려한 슈트를 입을 땐, 같은 무드를 내게 씌우는 거지. 그렇게 캐릭터를 만들다 보면 점차 평소 말투나 행동도 달라진다.

살인자 역할을 맡은 어느 배우가 실제로 자신이 포악해지는 걸 느끼고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영화 <간신>의 연산군처럼 내면의 폭력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숙제를 받았을 땐 집에 잘 안 들어갔다. 한껏 상상하면서 키워낸 내면의 악한 감정이 가족을 보면 풀어져서 희석될 수밖에 없으니까.

드라마 <아이템>은 웹툰이 원작인데, 웹툰 보는 김강우는 왠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사실 <아이템> 웹툰을 보진 않았다. 재미있다고 들었는데 설정이 다른 부분이 많아서 굳이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직도 휴대폰이나 모니터로 무언가를 본다는 데 익숙하지 않다. 원래 잘 앉아 있질 못한다. 아까도 왔다 갔다 한 것 봤나? 책도 서서 본다. 밥 먹을 때만 그나마 앉아 있는 정도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 있나? 푹 퍼져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답답하기도 하고, 은연중에 나태하고 게으르면 안 된다는 생각과 그런 내가 싫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 깔려 있다.

매년 꼬박꼬박 작품을 두세 편씩 하면서 촘촘히 살아온 것도 그 때문일까? 커리어를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누군가는 배우가 하는 일을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배우가 직업이라 생각한다. 또래보다 일찍 직업을 정해 영위한 것 뿐. 회사원이 일상처럼 매일 회사에 가는 개념이지.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지금까지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작품, 혹은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거나 아픈 손가락인 캐릭터를 묻는 질문을 많이 받지 않았나? 맞다. 그 질문이 제일 답하기 어렵다. 한 작품에 의미를 두고 평가하기 보다 배우의 나이나 분기별로 달라진 연기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포인트가 많이 나온다. 난 그저 흘러갈 뿐이고 평가는 타인이 해주는 거지. 누군가 날 그렇게 봐준다면 좋겠다.

2016년이었나, 중간에 맞닥뜨린 슬럼프를 연극 <햄릿>으로 풀었노라 고백했다. 인생을 직구로 내던지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온몸으로 내던지면 피로하지 않을까 싶고. 글쎄,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기준을 잡고 산 건 아니지만, 지금 난 대한민국에 사는 사십 대 남자다. 요즘 세상에 평생 한 직업을 갖고 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도 다른 직업을 갖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 당시가 그랬다. 처음부터 이 일이 재밌진 않았으니까. ‘배우 아니면 죽겠다’는 결연한 뜻을 품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 그게 내 운명이고, 직업인가 보다 하고 살았고.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타이밍이 왔다. 내 시작점이자 첫발을 들인 세계로 들어가서 답을 찾아보고, 그래도 싫으면 끝내자는 마음으로 한 작품이 연극 <햄릿-더 플레이>였다. 다행히도 연기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답이 나왔다. 그때가 연기한 지 15년 차였을 거다. 어떻게 보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젠 배우로 끝까지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목표점이 생긴 느낌이 든다.

직장인에게 찾아오는 번아웃증후군이었을까? 맞다. 똑같다. ‘작품이 없을 때 무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내 답은 두 가지다. 여행과 운동. 축구선수인 동서(기성용)의 삶을 봐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운동은 작품이 들어갔을 때, 체력이 떨어져서 연기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몸을 비축해놓는 개념이다. 여행에 굳이 목적을 부여하자면, 정신을 맑게 한다는 정도. 솔직히 말하면 할 줄 알고, 또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하는 거지.

예전에 여행 에세이를 낸 적이 있는데, 글을 쓰는 취미는 지금도 여전한가? 그땐 여행을 많이 갔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게 아쉬워서 어설프게나마 써봤다. 책 내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더라(웃음). 한 2, 3년 전이었나… 문득 글 쓰는 게 싫어졌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전에는 예순 살 이후부터 글만 쓰면서 살고 싶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책 읽고, 일기나 수필, 시나리오를 쓰는 게 나와 잘 맞을 것 같아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은 연기가 재밌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대상이 있어서 다른 일에 쓸 에너지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사람마다 쓸 수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한계의 기준치는 누구나 다르겠지만. 난 말을 많이 하거나, 여러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훅 떨어진다. 나이를 먹고 나서 깨달았다. 나 같은 사람은 사업을 하거나, 정치해선 절대 안 되겠구나. 투잡도 어렵고, 오직 연기뿐이구나(웃음)!

실크 로브와 셔츠, 통 넓은 벨벳 팬츠는 모두 김서룡 옴므, 톱은 살바토레 페라가모, 링은 베루툼 제품.

어느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예민하게 군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기억하나? 지금도 현장에선 똑같다. 프로는 어쩔 수 없다. 그래야만 살아남으니까. 일할 땐 내 안의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 쓰니, 에너지가 미치지 못한 영역이 생긴다. 글을 쓰느라 집중한 작가 옆에서 누가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런 당신도 이제 여유가 생겼다는 걸 실감할 때가 있나? 아무래도 나이에서 오는 여유가 있겠고, 음. 인생을 길게 봐야 한다, 배우를 평생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한 뒤로 이전보다 여유롭게 변했을 수도 있다.

그럼 주변에서 당신이 좀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하나? 좀 둥글둥글, 능글능글 해졌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건 배우로서 어떤 작품을 한 뒤부터 변한 게 아니라 살 만큼 살았기 때문일 거다. 남자 나이 마흔이 그렇지, 뭐. 결혼하고, 애도 낳았고, 이런저런 사람도 만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좀 더 생겼으니까. 세상 사는 게 별일이 아니더라 눈치챈 거지. 20, 30대에는 목표점을 보고 뛰어가려고만 한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뛰어가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걸 알게 됐달까.

이상하게도 김강우에겐 타협과 거리가 먼 이미지가 있다. 한번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닐 것 같은 느낌. 그런 당신도 최근 타협한 순간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는 것 자체가 타협이다. 매일 타협한다. 내 욕심대로 살았으면 삶이 지옥이었을 거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 모른 체 욕심만 부리면 안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타협도 할 수 있다. 내 한계를 정확하게 인정하고 포기하되, 욕심부릴 때는 그만큼 잘해야지. 그 선을 알아가는 시간이 철드는 과정이라 본다.

요즘 꼰대라는 단어가 역병처럼 번졌다. 당신도 기성세대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편이다. 꼰대라는 단어로 나를 포함해 특정 나잇대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열린 사고를 갖고 타협과 배려를 하자는 마인드를 되뇐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길게 살아왔다는 이유로 점점 편협해지면 위험하다. 20대인 스태프들과 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배울 점이 많다. 그 친구들이 권유한 SNS도 토 달지 않고 시작했다! 시대에 뒤처지면 안된다는 압박에 열심히 하고 있다(웃음).

청춘에는 유통 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없다고 말하고 싶다(웃음). 그 시절만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분명히 있다. 특히 예술 분야는 젊은 날것이 주는 힘이 세다. 그걸 가진 사람들이 이젠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런 냄새를 이젠 내가 못 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대신 나만의 무기를 만들어야지.

이를테면? 그건 비밀이다(웃음). 주름이 없다고 해서 청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청춘을 연장하겠다는 건 아니고,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톱과 통 넓은 팬츠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실버 링은 베루툼 제품.

작년에는 첫 예능 <현지에서 먹힐까?: 중국 편>에 도전했다. 그간 시도하지 않았던 리얼리티 예능에 대한 부담이 있었을 텐데. 내가 해서 욕먹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요리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아니고, 말로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포맷도 아니고. 누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은 있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 김강우가 엿보였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든든한 모습과 더불어 집에서 만들기 위해 레시피를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출연 전과 출연 후 달라진 점은? 진짜 요리를 잘하냐, 진짜 맛있었냐 자꾸 물어보는 게 달라진 점이랄까(웃음)? 진짜 다들 그걸 물어본다. 집에서도 많이 만들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젊은 여자들의 결혼 이상형으로 당신의 이름이 꼽히는 걸 알고 있나? 배우 차태현, 유준상도 비슷한 카테고리로 언급된다. 아, 그런가? 그렇다면 환상을 깨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물론 결혼에 대한 환상도. 인터뷰에서 너무 솔직해도 나쁜 거겠지(웃음)? 결혼은 현실이지만 미디어를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미화될 수밖에 없다. 좋은 점만 있다면 그건 기적이지. 가끔 그런 말을 들을 때 되게 민망하고 부끄럽다. 나도 화를 낼 건 다 내고, 마음대로 하는 것도 많다. 배려하긴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당신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어떤 점을 닮길 바라고, 또 어떤 부분을 물려 받지 않길 원하나? 여기에 관해선 지금도 매일 생각해 본다. 난 작은 부분이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주의다. 열심히 살아서 타인을 돕는다면 더 좋겠지만, 폐만 끼치지 않아도 나쁘진 않다. 닮지 말았으면 하는 부분은 삶을 추구하는 방식이나 말투, 행동거지 등에서 드러나는 강한 남성적인 면. 난 여자들과 말도 잘 못 한다.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도 모르고, 잘 들어주지도 못 한다. 그래서 반대로 아이들 이름을 중성적으로 지었다. 부드럽게 포용하고, 융화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여자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지냈으면 싶다.

오래전, 어느 인터뷰에서 기자가 당신을 ‘성냥이 그어지길 바라는 휘발유통 같다’고 표현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자신을 정의한다면? 휘발유가 이젠 말랐겠다(웃음). 그래도 연기하지 않는 순간까지 그 말을 듣고 싶다. 어차피 타버리면 끝이다. 그을음과 재만 남겠지. 언제든 불을 붙이길 기다리는, 기대감이 있는 배우. 난 지금의 템포가 좋다.

프리랜스 에디터
박소현
포토그래퍼
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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