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인은 유독 ‘평범’과 ‘아이러니’라는 말을 자주 썼다. 평범하지만 섬세한 인간이 스타로 부상할 때 겪는 시차에는 한 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따른다. 드라마 속의 말갛던 표정과는 또 다른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정해인이 평범하다면, 그는 비범하게 평범할 것이다.
<W Korea>요즘 기분이 어떤가? 얼떨떨하진 않나?
정해인 꿈 같기도 하고, 제대로 실감이 안 난다. 작품을 마치면 고독에 잠길 시간이 좀 필요한데 최근 너무 바쁘다 보니 생각이란 걸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작품이 끝났다고 해서 다 끝난 게 아니다. 나에겐 역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라 복기해야 한다. 지금까지 매번 해온 그 일을 못해서 불안한 마음도 있다. 이제 팬미팅과 광고 행사 등등의 일정이 웬만큼 끝나서, 곧 되짚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해외 팬미팅은 어디에서 했나?
대만, 태국, 홍콩, 필리핀. 요즘엔 해외 방송도 거의 바로 확인하는 세상이니 반응이 금방 온다. 동남아 쪽에서는 넷플릭스를 통해 많이 접했다고 들었다. 아, 프랑스에서는 패션쇼에 참석하고 화보 촬영을 했다. 촉박한 일정으로 휘몰아치듯 다니니까 비행기가 KTX 같은 느낌이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5월에 종영했다. 드라마의 호흡이 느린 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현장 분위기도 여느 드라마와 달리 빠듯하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만 같다. 어땠나?
맞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루 12시간 이내 촬영을 준수한 건 안판석 감독님의 능력 덕이 클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받는 현장이었다.
드라마에서는 누나의 오랜 친구와 커플이 됐다. 오래 보고 지낸 편안한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것, 정해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물론이다.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만 아니라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웃음). 그게 훗날 연기 태도를 더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삶과 연기는 분리할 수 없는 일이다. 살면서 연기를 배우기도 하고, 작품에 임하면서 삶을 더 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평상시 삶이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면 난 규칙적인 생활을 잘 안 하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이 규칙적인 성격이 아니니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주부들이 ‘우리 아들이 정해인 처럼 크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 반듯하고 깔끔한 이미지가 외모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가정 환경 영향도 있겠다는 짐작이 든다. 어릴 적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고?
부모님이 모두 일하셔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 같이 살았다. 아기 때부터 초등학생 때까지 그렇게 지냈으니까 어른들이 내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도 사랑을 많이 받았고. 사랑받은 어린 시절이 아직도 기억 난다.
배우로서 자신의 얼굴은 어떻다고 생각하나?
화려하고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는 걸 객관적으로 잘 알고 있다. 어떤 때는 못생기고 이상하게 보일 때도 있고. 그냥 인정하고 내려놨다. 별 특징 없이 생긴 얼굴이다. 이 점은 다들 인정하실 거고, 인정하셔야 한다(웃음). 그 평범함을 좋게 생각한다.
고3 때 길거리 캐스팅됐는데, 누가 명함을 들고 접근 할 때 의심하진 않았나?
연예인 생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의심할 것도 없었다. 나를 캐스팅한 사람은 기획사 직원도 아니고, 어느 에이전시 직원이었다. 그저 ‘내가? 나를?’ 싶어 신기했다. 신기하니까 호기심이 생겼고.
그럼 당시 그렸던 미래가 있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다. 평범하게 살던 학생이라, 수험생이라면 다들 받는 스트레스가 물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로 연기를 시작했다.
많은 셀렙들이 자신은 10대 때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말한다. 그분들은 적어도 외모가 평범하진 않았 을 거 아닌가?
이미 졸업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녀서 보신 분은 알겠지만, 나는 외모도 그렇고 정말 평범했다. 남자 중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꾸밀 일도 없었다.
당신 나이 또래 연예인은 사춘기가 오기도 전에 엔터테인먼트 업계 입성을 꿈꾼 경우가 많다. ‘내가 과연 재능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나 주저함은 없었나?
내가 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왜냐면 그때가 대학교 지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어서 아무래도 진로 문제가 걸려 있었다. 딱 한 군데만 연기 전공으로 지원했고, 합격하면서부터 내 길을 이쪽으로 확 돌린 셈이다.
4년 동안 꽤 여러 작품을 했다. 드라마는 <슬기로운 감빵생활> <당신이 잠든 사이에> <불야성>, 영화는 올해 초 개봉한 <흥부>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재작년에 방송한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그래, 그런 거야>로 정해인을 알았다.
쉬지 않고 작품을 이어갔다. 김수현 선생님의 작품을 할 때는 아시다시피 리딩 현장에서 잘 못하면 잘릴 수도 있다. 그때의 중압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분의 작품에 임하면서 한글이 위대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시 내 어머니로 나오신 김해숙 선생님이 나를 과외 선생님처럼 전담 마크해주셨다. 댁으로 불러 밥을 차려주면서 대여섯 시간 동안 대본 연습을 하고… 여전히 김해숙 선생님과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청춘 스타는 늘 부재하는 느낌이라 당신의 팬뿐 아니 라 업계 관계자들도 정해인의 부상을 반가워할 것이다. 90년대에 데뷔한 남자 배우가 여전히 최고의 스타와 아이콘이라는 수식을 받지 않나? 젊은 스타가 계속 등장하고 시간이 쌓여야…
새로운 청춘 스타. 이미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누구? 정해인?
박정민.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인데 내공과 여유가 장난이 아니다. 인터뷰를 찾아 보면 여유 있는 연기를 선보이기까지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변산> 봤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작품에서도 현장 사람들의 훈훈한 분위기가 느껴지듯이 그 영화도 그렇다. 배우고 느낀 게 많다. 박정민 배우를 시사회에서 만났는데 먼저 내 번호를 물어봐주셨다. 행복했다.
뭐든 배우고 흡수하는 스타일인가?
누군가의 뛰어난 부분을 인정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이와 상관없이 배울 점은 늘 있는 법이니까. 빨리 받아들이되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난 별다른 취미가 없다. 취미 생활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진짜 어렵다. 대본 보고, 영화와 드라마 보고, 남는 시간에는 쉬는 정도다. 여행을 하더라도 그 또한 좋은 연기를 향한 과정일 수 있다고 여긴다.
당신의 매니저 말로는, 정해인은 너무 겸손해서 문제일 때가 있다더라. 스타가 됐으면 가끔 편의를 누릴 만한데 그런 생각 없이 보통 사람과 똑같이 굴어서 오히려 매니저가 피곤할 때가 있다고.
사실 나에게 관심이 확 쏠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나를 덜 보이는 게 좋고, 과하게 관심 받으면 부끄럽고 당황할 때가 있다. 천생 연예인은 아니다. 무대 공포증이 있으니 말 다했지 뭐.
마음에 드는 자신의 기질과 마음에 들지 않는 기질은 뭔가?
내가 고집이 있다. 그게 마음에 들면서 또 마음에 안 들기도 한다(웃음).
고집은 있는데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흡수하길 즐긴 다니, 아이러니하다.
내가 하는 일 자체가 아이러니한일이다. 요즘 특히 그 점을 느낀다. 많은 사랑을 받고 싶은데, 막상 사랑을 받으면 두렵고 숨고 싶다든가. 이상하지 않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평가도 받는 직업에는 딜레마와 아이러니가 뒤따르는 것 같다. 드라마 끝나고 나서 ‘이제 다음 작품 선택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게 누구를 위한 중요함인지 잘 모르겠다. 이번 작품이 잘 됐고, 선택이란 걸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가 앞으로 좀 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건 맞다. 하지만 만의 하나 다음 작품이 잘 안 돼서 ‘정해인 이제 끝났어’ 소리를 듣는다 해도 나는 연기를 계속할 것이고 내 인생을 살 것이다.
그래서,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내가 구상한 계획에 가까운 작품을 만났다. <은교> <4등>, 예전 <해피엔드>를 연출하신 정지우 감독님의 <음악 앨범>이라는 영화다. 1994년경부터 2000년대 초반이 배경인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이야기다. 도전하고 싶었던 연기를 하게 될 듯하다.
스위트한 로맨스물을 마쳤으니까 다음 선택으로는 센 장르물이나 조금 다른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있을 줄 알았다.
현재는 서른한 살에 할 수 있는 것을 더 즐기고 싶다. 사랑, 우정, 사회생활 같은 이야기. 내 이미지에 대해 주로 선하다거나 말갛다는 말을 듣다가 최근 업계 사람에게 ‘무섭다’는 표현을 들었는데 기분이 좋았다. 나는 배역에 제한을 두지 않으니까 언젠가는 다양하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야심이 있나? 아니면 가늘어도 길게 가고 싶은가?
음, 굵게 가기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데뷔가 늦었으 니까. 스물여섯에 데뷔하는 경우가 요즘 흔치는 않지.
100세 시대에 인생 길게 보라는 소리는 못 들어봤나? 스물여섯에 사회생활 시작한 게 어째서 늦다고 생각하나?
바로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남들보다 데뷔가 늦었는데 조급하진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듣다 보니 조금씩 회의가 들었다. 어떤 기준을 정해두고 모든 사람에게 꼭 똑같이 적용해야 할까? 내가 보통의 경우와 달리 데뷔가 늦었지만, 대신 대학 생활을 온전히 누리는 경험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 건 아니어도 옷가게에서 일하면서 짧게나마 용돈 벌이도 해봤고. 다음 작품 선택이 중요하다는 말 역시 하도 많이 들으니까 어느 순간 강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나한텐 안 중요할 수도 있는데.
주변 세계를 잘 흡수하는 사람이라 그런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질 못하는 편인가?
아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말했지 않나, 나 고집 있다고.
만약 그 고집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생겨도 계속 자기 줏대를 유지하고 싶나?
아… 내가 자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어려운 문제다. 지금으로선 내 고집을 피울 때는 피우고, 때에 따라 양보도 하면서 완급 조절을 해야 할 거라는 생각 정도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니지먼트가 존재할 테고. 다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어쨌든 작품 속의 정해인, 정해인의 연기를 보고 좋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갈수록 연기를 향한 책임감이 생기는 건 분명하다.
- 패션 에디터
- 박연경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최진우
- 포토그래퍼
- 김희준
- 스타일리스트
- 윤슬기
- 헤어
- Mike Desir
- 메이크업
- Lili Choi
- 프로듀서
- GuilBe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