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는 패션의 도시이자 이탈리아 가구 산업의 중심지다. 매년 4월이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가구 박람회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열리고, 이 도시는 디자인에 흠뻑 취한다.
규격화된 부스의 무한 변주, 살로네 델 모빌레
올해로 57회를 맞이한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 즉 밀라노 가구 박람회의 단골 참관객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모든 전시장을 섭렵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참관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은 밀라노 시내에서 실내 전시장인 로 피에라(Rho Fiera)까지 지하철로 30분 거리라는 점, 그 시간 동안 ‘지옥철’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 코엑스 한 홀의 크기와 비슷한 전시장이 무려 20개에 달한다는 점,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로 불리는 실외 전시 스폿이 밀라노 시내 각지에 흩어져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쩌면 크기와 동선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살로네 델 모빌레와 푸오리 살로네를 통칭해 매해 4월 밀라노에서 열리는 디자인 페스티벌을 일컫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는 브랜드는 물론 레스토랑과 바, 카페까지 참여하거나 서로 협업한다. 갓 졸업한 신인 디자이너부터 디자인계 거장까지, 아르누보부터 퓨처리즘 스타일에 이르는 방대하고 거대한 좌표를 부려놓은 채 밀라노는 참관객을 기다린다. 2018 살로네 델 모빌레는 188개국에서 온 참관객 43만4천 명, 1800여 개 참여 업체를 공식 집계로 4월 22일 막을 내렸다. 지난 몇 년새 로 피에라까지 오지 않고 장외 전시만 즐기는 참관객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니, 이를 감안하면 밀라노 디자인 위크 전체 참관객의 수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12, 16, 20. 살로네 델 모빌레에 관심 있는 이라면 기억해야 할 숫자로 20개 전시관 중 가구업계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대표 브랜드들의 부스가 밀집된 전시관 번호다. 그 명성만큼 인기도 높아 부스 하나의 크기가 50여 평은 족히 넘는데도, 20분 이상 기다리거나 인파에 쓸리듯 전시를 감상하는 일이 허다하다. 매년 이런 인파를 예상하는 브랜드는 마치 패션 위크처럼 살로네 델 모빌레를 당해 신제품 발표 현장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비트라(Vitra)는 ‘4 Collages, 5 News, 6 Windows’를 주제로, 브랜드의 오브제와 기존 가구로 꾸민 4개의 전시관, 신제품 5개를 진열한 6개의 미니 부스를 선보였다. 특별히 비트라는 푸오리 살로네에도 참여해 옛 운동 경기장이었던 곳에서 전시도 함께 진행했는데, 공간 제안을 주제로 다룬 장내와는 다르게 참관객이 거대한 타원을 중심으로 돌거나, 관객석에 올라 360도 뷰로 가구를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이렇듯 상이한 접근 방식과 스타일의 전시는 ‘역시 비트라’라는 말이 참관객들 사이에서 나오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마지스(Magis)는 이딸라와 협업한 휴대용 조명으로 승부를 걸었다.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중요시하는 싱글족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면서 리빙 아이템 하나도 스토리가 담긴 오리지널 피스를 찾는 경향이 짙어지는 가운데, 당장 수백만원대의 가구를 들이기 부담스러운 이들은 수십만원대의 엔트리 아이템으로 브랜드 디자인을 소유한다. 그 예상이 적중한 듯, 참관객들은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귀여운 새와 부엉이 조명 ‘리너트(Linnut)’ 를 만지고, 찍고, 들어보는 등 애정을 드러냈다. 프리츠 한센은 넨도와 손잡고 브랜드 역사 61년 만에 우든 체어 ‘N01’을, 모로소(Moroso)는 브랜드의 조력자나 다름없는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와의 지난 20년 세월을 기념한 소파 ‘샴퍼(Chamfer)’를 이번 살로네 델 모빌레에서 처음 공개했다.
패션 종주국인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디자인 위크답게 1, 3, 5, 7관에서는 펜디 까사, 트루사르디 까사, 에트로 홈, 베르사체 홈, 미쏘니 홈 등의 라이프스타일 컬렉션도 만날 수 있었다. ‘xLux’관이라고도 불리는 공간에 들어선 이 부스들은 앞서 언급한 주요 가구 브랜드관이 리테일러, 프레스, 클라이언트, 디자이너 모두에게 열린 공간을 지향하며 자유로운 사진 촬영과 체험을 권하는 분위기와는 달리 브랜드 성향에 따라 입장이 제한되거나 사진 촬영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도 있어 엄격한 갤러리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참관객들이 볼멘소리를 하다가도 결국 규칙에 따라 부스를 관람하는 건 소재와 디테일이 돋보인 베르사체, 페이즐리 패턴 패브릭으로 여행용 의자를 출시한 에트로, 중국과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십이간지 그래픽을 론칭한 미쏘니같이 각 패션 브랜드의 심벌과 시그너처 스타일이 적용된 가구나 홈 액세서리를 한자리에서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력 디자인 매체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로 피에라를 한 번만 돌아보면 지금 가구 디자인 분야에서 가장 주가 높은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로낭& 에르완 부홀렉은 가구를 다루는 거의 모든 프로덕션 브랜드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홈 액세서리 브랜드에서는 하이메 아욘이, 기술이 결합된 아트 피스나 전시에서는 넨도가 자주 등장했다. 숨은 보석을 발굴하기 좋은 곳은 신진 디자이너관인 ‘살로네 사텔리테’관이다. 올해는 35세 이하의 디자이너 650명이 참가해 각자의 기량을 펼쳤다.
크리에이티브의 본게임, 푸오리 살로네
푸오리 살로네는 살로네 델 모빌레보다 20년 이후인 1980년대에 시작됐다. 초기에는 시내에 위치한 가구와 디자인 회사 몇몇이 함께 크고 작은 이벤트를 벌이던 것이 이제는 자동차, 푸드, 아트와 패션, 심지어 통신사까지,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참여한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열리는 6일간, 도시 전체가 디자인 테마파크로 변신하는 셈이다. ‘워라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탈리아에서는 영업 종료 시간 10분 전부터 매장 내 손님의 존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서둘러 업장을 정리하는 편이지만, 밀라노 디자인 위크 때만큼은 고맙게도 그나마 여지를 주는 편. 이탈리아 디자인 뮤지엄의 선구자격인 ‘트리엔날레 디자인 뮤지엄’도 이 기간만큼은 밤 10시까지 문을 활짝 열어둔다. 그러니 하루가 아쉽고, 한 스폿이라도 더 보고자 한다면 시내 일정을 오후와 저녁으로 잡는 것이 유리하다. 푸오리 살로네는 주요 패션 브랜드와 가구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 갤러리가 모여 있어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브레라(Brera) 지구, 그보다는 조금 한가하고 아기자기한 디자인 페스티벌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조나 토르토나(Zona Tortona) 지구, 실험 정신이 가득한 람브라테(Lambrate) 지구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브레라에 집중하자.
규격화된 부스를 벗어난 디자이너들의 창의성은 밀라노 시내의 유서 깊은 저택과 중정, 갤러리와 옛 공장 지대 곳곳에서 날개 단 듯 정점을 찍는다. 로 피에라가 리테일러나 업계 관계자에게 보다 친절하다면 푸오리 살로네는 말 그대로 디자인 축제를 즐기고 싶은 크리에이터나 대중에게까지 열린 거대한 사랑방이고, 그 인기가 매해 높아지기 때문에 최근에는 로 피에라 대신 푸오리 살로네에만 참여하는 브랜드가 증가하고 있다.
일례로, 한정판 가구 컬렉션 ‘오브제 노마드’를 주제로 꾸준히 아트 페어와 디자인 페어에 참여해온 루이 비통은 올해 처음으로 푸오리 살로네에 참여하면서 홈 데코 컬렉션인 ‘레 쁘띠(Les Petits) 노마드’를 론칭했다. “나에게 노마디즘이란 현대적이면서도 가벼운 환경을 뜻한다”고 전한 이 프로젝트의 메인 파트너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는 단 네 장의 가죽 시트로 하나의 공예 작품이나 다름없는 ‘오버레이 볼’을 완성했고, 처음 오브제 노마드에 참여한 안드레 푸의 리본 댄스 체어는 한 공간에 단독 전시되어 참관객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각인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W Korea 어떤 계기로 코스와의 협업을 결심하게 됐나?
필립 케이 스미스 3세(이하 필립): 사실 그간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 제안을 매번 거절했다. 브랜드와의 작업은 코스가 처음인 셈인데, 그간 코스의 프로젝트를 봐왔고 그 아카이브의 일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스는 브랜드가 아니라 뮤지엄과 일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작가를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게 느껴졌다. 프로젝트 브리프를 처음 받았을 때를 아직 기억한다. 코스의 DNA와 가치가 무엇인지와 장소의 이미지들이 첨부돼 왔고, “한 달 후에 봅시다. 당신이 여기서 어떤 걸 만들고 싶어 할지 궁금하군요”라고 적혀 있더라.
코스가 이번 전시의 작가로 왜 필립을 택했는지 궁금하다.
카린 구스타프슨 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하 카린): 2014년에 필립의 ‘Lucid Stead’라는 작품을 처음 봤다. 자연 속에 놓여,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점에 나를 포함한 우리 팀 모두 매료됐고, 당시 우리 컬렉션의 무드보드에 붙여놓기까지 했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전시는 꼭 야외에서 진행하고 싶었다. 그러자 너무 당연하다는 듯 필립의 이름이 여러 번 거론됐고 그렇게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그간 당신은 사막, 바다 등 건축물이나 장애물이 별로 없는 곳에서 설치 작업을 해왔다. 이곳에서 전시를 하자면 고려해야 할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필립: 대학 시절 1년 정도를 이런 팔라초에 위치한 로마의 스튜디오에서 보냈다. 그래서 팔라초와 중정, 그 안에서 빛의 움직임에 대해 익숙한 상태였다. 게다가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이곳의 위도와 고도를 입력하면 해당 기간에 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어 어렵지 않았다.
설치물을 봤을 때 첫인상이 어땠는가?
필립: 이런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작가는 누구든 나름의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실제로 완성될 때까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원형(작품)의 가운데에 서면, 건축물이 반사되는 부분은 모두 사라지고 온통 하늘로만 둘러싸이게 되는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나에게 어떤 영향(느낌)을 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예상보다 훨씬 근사했고, 힘이 느껴졌다. 이런 경험은 다음 작업에 또 하나의 영감이 된다.
카린: 몹시 기뻤다. 이미 이 작품의 스케치나 인쇄된 기획안, 그간 필립의 작업을 블로그를 통해봤지만 모두 사진이지 않은가. 직접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어떻게 작가의 작품을 실제로 보지도 않은 채 협업을 결정할 수 있나?(웃음)
카린: 사실 지금껏 우리의 협업 전시가 다 그랬다. 코스가 선망하는 작가의 비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협업한 스튜디오 스와인의 경우에도, 콘셉트도 훌륭하고 프린트로 봤을 때도 굉장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구현되기 전에는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처음 이 작품을 본 순간, 그 자체가 너무나 특별하다.
최근에는 코스처럼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이고 작가들과 협업해 전시를 여는 브랜드가 굉장히 많아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코스만의 차별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카린: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리서치한 결과물을 테이블에 올려보면 대부분 예술과 건축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니 작가들과의 협업은 매우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컬렉션의 출발점이 예술과 건축이라는 점이 코스다움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패션 브랜드 코스의 전시는 어느새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머스트 고’ 스폿 이 됐다. 코스에서는 해마다 선정한 작가와 협업해 아트 워크를 선보이는데, 이 전시로 대중에게 신고식을 치른 해당 작가는 이후 꾸준히 브랜드와 언론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코스는 2017년 스튜디오 스와인과, 지난해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 <Loop>의 작가 스나키텍처(Snarkitecture)와는 2015년에 협업했다. 올해는 미국의 설치 작가 필립 케이 스미스 3세와 다각도로 이어 붙인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관람객의 시야로 하늘을 끌어내린 전시로 SNS를 장식했다. 앞으로 필립 케이 스미스 3세가 어떤 작업을 내놓고 주목받을지 기대된다.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은 매해 돌아오는 이 디자인 격전지에서 얼마나 매력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이슈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꽤나 골치가 아플 테지만, 그럴수록 참관객들의 기대와 즐거움, 보람은 커져만 간다. 구비(Gubi)와 헤이(Hay)는 모두 덴마크의 프로덕션 브랜드이고 이번 푸오리 살로네에서도 비슷한 무드의 팔라초에서 전시를 열었으나 구비는 ‘구비다웠다’는 다소 평이한 평가를 얻은 반면, 헤이는 위워크(Wework)와 스피커 브랜드인 소노스(Sonos)와 협업한 전시를 통해 (역시 협업이 답일까) 홈 액세서리에 강한 브랜드에서 가구를 아우르는 토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진화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거칠게 말하자면 정원을 끼고 있는 뮤지엄이나 갤러리, 카페의 가구는 헤이의 것(부홀렉 형제의 팔리싸데 시리즈, 최근 오픈한 가로수길점 2층의 가장 볕 좋은 자리에 놓인 그 가구다)인가 아닌가로 나눌 수 있을 정도. 최근 럭셔리 가구 브랜드의 힘 빼기 전략이 유쾌하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실용적인 브랜드 헤이의 성장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전문가들의 전언이 있었다.
푸오리 살로네에는 브랜드만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밀라노에서 전통과 명성을 자랑하는 갤러리,닐루파르(Nilufar) 갤러리나 디모레(Dimore) 스튜디오에서는 특별 전시를 열고 북유럽 국가의 크고 작은 예술 협회에서 주최하는 흥미로운 전시를 조우하기도 한다. 조나 토르토나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로사나 오를란디(Rossana Orlandi)는 신진 작가 발굴에 힘쓰는 곳으로 이름나 있는 ‘머스트 고’ 스폿 중 하나. 그만큼 자리를 얻기도 어려운데, 한국 브랜드로는 메테(Mete)가 유일하게 이곳에서 관람객을 맞았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강점이자 약점을 꼽는다면 모든 스타일의, 너무 많은 브랜드의 전시가, 도시 위에 흩뿌리듯 방대한 지역에 걸쳐 열린다는 점. 이런 약점을 보완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명성을 위협하고 있는 디자인 페어로 스톡홀름 퍼니처 페어나 메종 오브제가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3월 <더블유 코리아>와의 인터뷰 중에 하이메 아욘도 “내가 신제품을 선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어떤 부정적 견해와도 별개로,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디자인 페어”라 언급했듯, 현대인의 삶에서 디자인과 브랜드가 어떤 조화를 이루며 기능하고 화합하는가를 보여주는 비즈니스 각축장으로서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위상은 당분간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 글
- 신정원
- 사진
- Gettyimages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