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은 까칠하다고 소개한 뒤 스스로 한 꺼풀씩 벗기며 이것저것 보여줬다. 어쩌면 겉과 속이 다른 남자라, 그가 하는 말은 반만 믿어야 할지도 모른다.
<Wkorea>스타일리스트가 그러더라, 당신이 낯을 좀 가린다고. 그래서…
하석진 아, 그 친구는 나를 잘 모른다. 자기 방식대로 나라는 사람을 풀이하려 한다. 한마디로 자기 틀에 맞춰 나를 보지.
낯을 가려서 다소 까칠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좋은 사람이니 오해하지 말라던데?
그랬나? 그것도 다 프레임이다. 난 까칠하다. 친절한데 나쁜 사람이다.
시작부터 그렇게 자기 캐릭터를 선언하나? 사실 인터뷰를 할 때 상대방에 대해 너무 모르고 만나면 실례여서 그렇지, 많은 정보와 편견이 없는 채로 대화하는 방향도 좋다. 먼저 나쁜 사람이라고 친절히 알려주니까 참고하겠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나쁜가?
정확히 말하면 굳이 친절할 필요가 없는 주변 관계가 많았다. 늘 비슷한 무리와 어울리고 낯선 이와 특별히 친해질 기회가 없는 편이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교의 장에 익숙한 사람과 달리 어떤 훈련이 안 돼 있다.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즐기지 않거나 사회생활에 조금 미숙하다는 말로 들린다.
그냥 첫 장벽이 있어 보일 뿐이다. 그 장벽만 넘으면 참 별게 아닌데 넘기 힘들어 보이나 보다. 나와 좀 더 친해지지 못한 이들은 내가 낯을 가리거나 까칠하다고 말하더라.
사람들이 그 장벽을 넘어와주면 좋나?
사실 조금만 가까이 지내다 보면 많이들 넘어온다. 장벽이 있어도 그리 높지 않다. 자전거 정도로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언덕이 있는가 하면, 나는 낮은 블록 정도랄까? 자전거로는 언덕보다 넘기 힘들어 보이니까 넘어가볼 생각을 안 하는 상황에 비유하고 싶다.
싫어하는 인간은 어떤 유형인가?
딱 떠오르진 않지만, 어쨌든 사람 첫인상만 보고 ‘싫다’는 생각은 안 하는 편이다. 나이 들면서 첫인상이 오해였구나 깨닫는 경험이 쌓이니까, 첫 대면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게 섣부르다는 걸 알겠더라. 사람을 너무 나쁘게 보는 것도, 너무 좋게만 보는 것도 다 오해일 수 있다. 어느 정도 지켜보면서 ‘나랑 가까워지기엔 좀 안 맞겠구나’ 하는 식으로 알아가는 게 좋다.
연애의 시작도 그런 식인가?번쩍 하는 사건처럼 눈이 맞기보다는 누군가를 시간 들여 살펴보다가 점점 빠지는?
그렇다. 좀 번개 맞은 듯이 사건이 일어나도 재밌겠지만, 직업 때문에라도 한 번쯤은 방어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들었다. 날 연예인으로 보고 흥미를 갖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처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일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설사 누군가에게 좀 끌려도 ‘이래도 될까?’ 하고 자꾸 이성이 작동한다. 그런 습관과 원칙 때문에 놓치는 인연도 있겠지만, 굳이 고치고 싶진 않다. 다만 연기를 할 때도 순간순간 이성이 발휘되어 ‘내가 잘 전달하고 있나?’ 하고 판단할 때가 있는데 그건 좀 아쉽다.
그간 드라마에서 차갑거나 도시적인 캐릭터를 주로 맡다가 점점 나쁜 놈으로 진화했다. <자체발광 오피스>에선 독한 세치 혀를 가진 팀장이었고, 그전 <혼술남녀> 때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보니 이렇게 써 있더라. ‘학벌, 외모, 실력은 고퀄리티. 그러나 인성 쓰레기.’
자상한 남자 같은 캐릭터를 한 지가 좀 됐다. 최근 몇 년간 보여준 모습과 다른 성격의 역할은 또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연을 피해 가더라.
몇 년 전 김수현 작가의 <무자식 상팔자>에 출연하고 나서 바로 1년 뒤에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했다. 천하의 김수현 작가가 하석진을 연달아 찾았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녀가 왜 당신을 캐스팅했다고 하던가?
특별히 그런 말씀 안 하셨다. 그리고 <세 번 결혼하는 여자> 때는 캐스팅 과정에 문제가 생겨서 내가 긴급 투입된 면도 있다. 그 역할은 나보다 나이도 있고 연륜 있는 남자 배우가 했으면 훨씬 어울렸을 거다.
주변에 그 드라마를 보고 당신이 멋있게 느껴졌다고 한 여자가 몇몇 있다. 재벌가 자제이자 이지아의 두 번째 남편이면서 톱 여배우인 장희진과 불륜을 이어가는 역. 결혼 전부터 만나던 여자를 아내한테 들키고도 계속 만나는, 황당하게 나쁜 놈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좀 힘들었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의 감정을 서른한두 살에 이해하고 표현하기가 쉽진 않았다.
곧 KBS에서 방영할 <당신의 하우스헬퍼>에서는 놀랍게도 남자 가정부 역할이다. 인기 있는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데, 내용이 웹툰과 비슷한가?
전반적인 느낌은 비슷하게 간다고 들었다. 이제 대본 1 , 2부가 나온 시점이다. 다만 웹툰에서는 주인공이 모두에게 반말을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만화적인 설정이니까, 실사로 옮겼을 때 너무 이질적인 것들은 수정할 예정이다.
앞치마를 두른 하석진이라니 기대된다. 드라마 속에서 예를 들면 어떤 대사를 하나?
‘집이 곧 당신을 말해준다’라는 대사가 있다. 집 상태를 보고 ‘아 당신은 이러이러한 사람이구나’ 한다. 가족에 얽힌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정리벽과 청소벽이 생긴 남자다. 나도 청소는 좋아한다,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체발광 오피스> 이후 1년 만의 드라마다. 사실 전현무, 김지석, 블락비의 박경 등과 난이도 높은 문제들을 풀어가는 예능 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로 매주 방송에 얼굴을 비쳤기에 그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지는 체감하지 못했다. 3년 이상 한 그 프로그램이 얼마 전 한 시즌을 마쳤다. 그 어려운 수리며 논리 문제를 어찌 다 풀 수 있나? 볼 때마다 신기하더라.
다 풀어야 집에 가니까. 녹화 시간이 정해져 있진 않고 다 풀 면 끝나는데, 보통 1시쯤 모여서 7시간 정도 녹화한다. 방송에는 많이 안 나가지만 문제가 안 풀릴 때는 별의별 아무 말이 다 나온다.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뇌를 좀 트이게 하려는 거지. 그러다 어? 잠깐! 하면서 스르르 풀릴 때가 있다.
순도 높은 문과형 인간은 자괴감 들 때가 많았다. ‘머리 좋다는 사람은 대개 이과겠지?’ 싶고.
출연자들이 웬만큼 센스가 있어서 문제를 풀기도 할 테지만, 브레인스토밍하는 과정에서는 문과와 이과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한마디 던졌을 때 움찔하는 제작진의 표정을 캐치하고 재빨리 힌트를 얻는 촉은 문과 기질의 사람이 더 좋다. 아이큐 테스트 같은 문제가 이과적이긴 한데, 접근이나 풀이 방식이 그렇다는 거지 문과 이과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 같다.
하석진, 하면 ‘공대생 오빠’로 통한다. 공대 졸업한 지 13년은 됐을 텐데 어쨌든 그렇다. 그런 프레임에도 시큰둥한가?
조금. 물론 연예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누군가가 그만큼 정보를 수집해 관심을 갖고 캐릭터를 부여해준 셈이니까.
‘인문대생 오빠’라는 말은 없는데 ‘공대생 오빠’라는 말은 자주 쓰인다. ‘사찰 오빠’는 없지만 ‘교회 오빠’는 흔한 것처럼.
아무래도 공대에 남자가 많으니까 오빠도 많은 거지. ‘간호대 오빠’도 그렇게 흔하진 않고.
프레임 때문이든 재밌는 수다 소재이기 때문이든, 공대 수식어는 남성성과 결부되곤 한다. 그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나?
공대 쪽 학문 자체가 워낙 남초 분야이지 않나. 다수 여성들 입장에서 자신이 잘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생각에 막연한 궁금증을 갖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여성에게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가 낯선 세계인 것처럼 말이다. 공대 오빠란 그런 세계의 구성원이 아닐까? 뒤집어 생각하면 남성도 여초 분야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고.
여동생과는 살갑게 지내는 편인가?
나는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일관되게 무뚝뚝한 편이다. 내 무뚝뚝함의 극단에 있는 대상이 바로 네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다. 아, 며칠 전에 동생이 인생 처음으로 술에 취해서 나한테 전화를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생전 안 하던 짓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친한 사람에게나 할 법한 주정을 하더라.
하나 있는 여동생한테 좀 잘해주지 왜 그러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도 있는데, 서울의 일본라멘 집은 싹쓸이한 마니아로 <수요미식회>에 출연한 전력이라면 ‘일본 라멘 잘 사주는 우리 오빠’ 소리는 들을 만하지 않나?
다정하고 친근한 사이로 지내려면 서로 더 어릴 적에 시도했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그러면 애 놀란다. 그런데 전화 줬을 때 사실… 반가웠다.
연인과 헤어지면서 들은 멘트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 ‘오빠, 나빠’ 라든지.
안 좋은 건 기억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서로 실망을 크게 해서 싸우고 싸하게 이별한 적은 없다. ‘이 나쁜!’ 하는 경우도 없었고. 느린 속도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곤 했다.
확실한 게 좋지 않나?
연인인 두 사람이 확실하게 이별할 수가 있나? 우리 헤어지자, OK, 끝. 이게 쉽나? 물론 헤어지고 나면 어느 날 밤 ‘자니?’ 같은 문자는 안 보내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는 몰라도 나이 들면서 그 노력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쩌다 친구와 술 마시다가 헤어진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문득 떠오를 때면 견디긴 힘들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런 연애들의 끝에 남은 교훈은?
이건 좀 슬픈 이야긴데,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날 때의 기쁨만큼이나 다시 못 만나는 관계가 됐을 때의 고통이 크다는 걸 느낀다. 내가 좀 고리타분한지 헤어진 연인과 친구 비슷한 관계로는 못 지낸다. 한때 사랑한 이와 우연한 기회가 아니면 다시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건 무섭고 아픈 일이다.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슬픈 이야기다.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본업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말 잘 듣는 남자도 멋질 것 같다.
본업인 연기자 일에 있어서 어떤 아쉬움은 없나?
어떤 분야마다 천재들이 있다. 13년 동안 일해놓고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천재에 가까운 인간은 아니라서 남들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어렴풋이 괜찮은 흉내라도 낼 수 있다는 게 아쉽다면 아쉽다. 예술가적인 성향을 많이 지니진 못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노력으로 웬만큼 따라갈 수 있는 수준에서 일하고 있는 게 내 위치 같다. 내가 갑자기 예수님을 연기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다만 20대 때는 이렇게도 가보고 저렇게도 가볼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때에 비하면 여러모로 안정적인 선택을 하려는 경향이 좀 생겼다. 선택을 할 때도, 선택을 받을 때도, 선택의 폭이 좁아진 감은 있다.
일 욕심이 큰 사람은 아닌가?
욕심은 있지만 그걸 드러내는 게 미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직업은 속에 품은 야망을 말로 꺼내놓는 것보다 행동으로, 작품으로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 보여주는 게 본질인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연기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는 말 정도를 하고서 기회가 되면 작품으로 보여주는 게 맞을 것 같다.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이 일을 할 자신은 있나?
해봐야지, 뭐. 자신감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니까.
더 많은 화보 컷은 더블유 5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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