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름으로

우보미

작년부터 심상치 않던 할머니의 등장이 새해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레트로풍 꽃무늬, 실크 원피스, 컬러풀한 모피, 커다란 안경으로 요약되는 ‘그래니 룩(Granny Look)’에 빠질 준비, 되었는가.

미우미우의 2015 F/W 광고 캠페인

체크 스커트와 모피는 그래니 룩에서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다.

스트리트 신을 장악한 백발 여인들

스트리트 신을 장악한 백발 여인들

2015 S/S 시즌 셀린의 광고 모델로 존 디디온이 등장한 일은 패션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SNS에 일파만파 퍼진 그녀의 사진은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조용히, 면면 히 이어져온 시니어들의 멋에 대해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셀린뿐이 아니다. 청춘과 영보 이의 브랜드로 군림하는 생로랑은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 첼과 킴 고든을 기용했고, 케이트 스페이드에서는 인테리 어 디자이너이자 패션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무려 94세!) 과 칼리 클로스를, 아이스버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킴 고 든을 모델로 내세웠다. 더로우 프리폴 컬렉션에서는 올슨 자매도 울고 갈 만한 60대의 늘씬한 할머니, 린다 로딘이 매력적인 포즈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겨울로 넘어와서는 가족애를 강조하는 돌체&가바나가 동네에서 마주칠 법 한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를 등장시켰고, 미우미우는 소녀 들과 함께 백발의 노인을 한 프레임에 담아 자연스러운 파파라치 컷을 포착했다. 이렇듯 최근 1년간 패션 하우스 의 광고 캠페인은 시니어들의 반란이라고 일컬을 만큼 대 단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80대의 SNS 패셔니스타, 베디 윙클.

한편 SNS와 디지털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할머니도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가 무려 1백40만 명에 이르는 80대 할머니 베디 윙클(@beddiewinkle)은 웬만한 패션 아이콘이 무색할 만큼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 다. ‘Since 1928’을 프로필에 적어놓은 어르신이지만, 옷 차림은 20대보다 더 발랄한 모습을 보인다. 커다란 플라 스틱 링 귀고리를 하고 총천연색 드레스와 플랫폼 스니커 즈를 신으며, 아쉬시의 반짝이 옷을 즐겨 입는 사진은 평 균 8만여 개의 좋아요 수를 달고 호응을 얻고 있다. 미국 잡지 <PAPER>에서는 케이트 모스와 커트 코베인으로 변신한 베디 윙클의 포트레이트 사진을 실어 화제를 모으 기도 했다. 과감한 스타일링도 서슴지 않는 할머니들의 옷차림을 보여주는 유명 블로그 ‘Advanced Style’을 운영 하는 주인장 역시 60대의 할머니 아리 세스 코언이다. 마 우스 휠을 계속해서 내리다 보면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 은 젊은이들의 즐겨찾기를 부르기에 충분한 콘텐츠로 가 득하다.

구찌에서는 커다란 안경과 빈티지한 모피로 현대판 그래니 룩을 보여주었다

구찌에서는 커다란 안경과 빈티지한 모피로 현대판 그래니 룩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너드와 빈티지 소녀로 가득한 2015 F/W 런웨이 는? 구찌의 새 시대를 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 로 미켈레는 엉뚱해 보이는 너드 룩 외에도 촌스럽다고 치부되던 그래니 룩까지 컬렉션으로 가져와 열풍을 일으 킨 장본인이다. 복고풍 프린트와 잔잔한 꽃무늬, 갈색 모 피, 베레, 커다란 금테 안경 등 아이템 하나하나를 따지고 본다면 나이 지긋한 할머니의 옷차림 어딘가에 콕 박혀 있는 요소로 런웨이를 채웠으니 말이다. 그간 어느 누구 도 이 조합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셀린과 스텔라 매카트 니를 입는 이 시대의 미니멀리스트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들 만큼 매혹적인 모습으로 선보였다. 미켈레처럼 대 놓고 빈티지풍으로 빚어낸 그래니 룩에 러브콜을 보낸 디자이너도 있지만, 이 현상이 재미있는 것은 브랜드마다 어딘지 모르게(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할머니 옷차림의 코드를 넣었다는 점이다.

베네데타 바르지니는 안토니오 마라스의 피날레에 깜짝 등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오리엔탈풍의 드레스에 진한 브라운 컬러의 모피를 매치한 랑방.

식탁보를 연상시키는 베트멍의 들꽃무늬 원피스.

빅토리언 레이디를 그려낸 알 투자라에서도 벨벳과 금색 가루를 입힌 드레스(어떤 피 처 기자는 그저 융드레스 같다고 했다)를 선보였고, 마크 제이콥스는 커다란 격자무늬 코트에 오리엔탈풍 프린트 의 플리츠 드레스를 매치했으며,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베트멍조차 식탁보를 뜯어서 만들었을 법한 들꽃무늬 원 피스와 정원을 가꿀 때 쓸 것만 같은 장갑을 무대에 올렸 다. 캐멀 코트와 보랏빛 이너웨어로 빈티지한 색을 조합 한 마르지엘라, 트위드와 투박한 니트 웨어를 선보인 샤 넬과 미우미우에서도 할머니들이 탐낼 만한 아이템이 곳 곳에 눈에 띈다. 한편, 안토니오 마라스의 피날레에 깜짝 등장한 슈퍼모델 베네데타 바르지니는 이 시대의 젊은 여 성들의 옷이 나이 지긋한 60대 여성에게도 멋지게 어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늘씬한 할머니, 스타일리스트 린다 로딘의 감각적인 스타일링.

60대의 스타일리스트 린다 로딘은 매치스패션과의 인터 뷰에서 “나는 66세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26세가 더 늙어 보일 때도 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친구들 이 있는데 그들도 자기 자신이 젊다고 생각한다”라고 말 했듯이, 지금의 그래니 룩은 나이의 경계를 허무는 트렌 드를 반영한 스타일이 분명해 보인다.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INDIGITAL, JASON LLOYD-EVANS, MULTIBITS(GETTY IMAG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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