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눈부시게 도약했고, 어떤 물건은 유독 사랑받았으며, 어떤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했다. 빛나는 장소와 인상적인 순간들이 우리 곁에 머무르거나 스쳐갔다. 한 해 중에 2015년이 아닌 시간은 없었지만, 이것들이 모여 2015년으로 남을 것이다.
WHO
나만 알 수 없는 밴드 혁오
혁오의 보컬 오혁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등장해 배리 매닐로우의 노래를 (영어로) 불렀을 때, 혹은 <무한도전>에 등장해 복면을 쓴 채 김건모의 곡을 불렀을 때, 그 솔풀한 목소리는 ‘홍대 인디 밴드’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오혁의 음색만큼이나 훵키한 리듬감이 돋보이는 밴드의 연주, 영어 가사를 많이 쓰는 곡들, 스스로의 취향으로 입는다는 패션 스타일, 주류 방송에 어울리는 유창함을 애써 학습하지 않는 어눌한 화법 같은 것들은 함께 어우러져 이 밴드의 돌연하고도 독특한 매력을 강화했다. 2015년 혁오는 힙스터들이 듣는 인디음악, ‘나만 알고 싶은 밴드’에서 누구나 아는 멜론 차트 100 뮤지션이 되었으며,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이, 특히 무한도전 가요제가 음원 차트뿐 아니라 지금의 음악신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을 확인하게 한 존재였다.
더 킹 캉
몇 달 전, 야구팬으로 알려진 배우 공유를 인터뷰하면서 물었다.“야구선수 가운데 고른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나요?” 그의 답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강정호였다. 영화라는 공동 작업에서 투수 같은 역할을 해온 배우가, 입장을 바꾼 존재로서의 야수에 대해 갖는 관심과 예찬의 맥락이었지만 강정호의 메이저리그 첫해는 충분히 눈부셨다. 9월 18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도중 부상으로 잔여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점은 그가 내셔널리그 올해의 신인 후보에 오른 지금 더 아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어차피 우승은 컵스의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하겠지만). 강정호, 류현진이 재활중인 지금 이제 2016년은 미네소타 트윈스와 교섭에 들어가는 박병호 그리고 포스팅을 막 시작하는 손아섭의 차례다. MLB 스카우터들이 국내 야수들을 눈여겨본 데는 분명 이번 시즌 킹 캉, 강정호의 영향이 지대했다.
걸그룹 춘추전국
원더걸스, 2NE1, 소녀시대, f(x)등이 여전히 건재하지만, 후발주자들의 활약 또한 크게 주목받은 한 해다. 비에 젖은 바닥에서 숱하게 넘어지면서도 꿋꿋이 무대를 마치는 영상이 공개된 뒤로 여자친구의 인지도는 껑충 뛰었다. 지민과 설현이 소속된 AOA는 슬슬 장기 집권의 조짐이 보이는 ‘군통령’이다. 마마무는 탄탄한 노래 실력으로 인정받았고, 러블리즈는 순정만화 속 소녀 같은 이미지로 경쟁자들과 차별화에 성공했다. 그리고 레드벨벳과 트와이스는 SM과 JYP의 전략이 집결된 새로운 결과물이다. 2015년의 가요계는 걸 파워로 움직였다.
백종원 시대
백종원이 2015년 한 해 동안 TV에, 그리고 한국인의 부엌에 미친 영향은 컸다. 집에서는 엄마가 만들어놓은 ‘만능간장’이 냉장고 한켠을 가득 채웠고, 요리에 관심도 없던 남자들이 그의 레시피를 따라 각종 야식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길거리에는‘빽다방’이 눈에 띄게 늘어났으며, 사람들은 이제 그를 더 이상‘소유진 남편’이라 부르지 않는다. 비록 <마리텔>에서 급작스레 하차하면서 팬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지만, <집밥 백선생>, <백종원의 3대 천왕>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여전히‘요리하는 남자’와 ‘집밥’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조성진 신드롬
쇼팽 콩쿠르 우승은 분명 놀랍고 대단한 성취지만, 그걸 ‘한국 클래식의 쾌거’로 포장하는 건 좀 뻔뻔한 일이다. 클래식 음악 콩쿠르가 국가 대항의 스포츠 대회도 아닌 데다가 김연아나 박태환이 그랬듯이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사회의 지원을 얻기보다는 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천재일 뿐이다. 그냥 조용히 콩쿠르 실황 앨범에 담긴 프렐류드와 녹턴, 피아노 소나타와 폴로네이즈에 귀 기울이는 게 좋겠다.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의 대사가 떠오른다. “다 까불지 말라고 해, 음악이 갑이야.”
천상천하 유아인 독존
2014년에 드라마 <밀회>로 깊은 인상을 남긴 유아인이 2015년에는 한 단계 더 도약했다. 몇 달 터울로 개봉한 영화 <베테랑>과 <사도>가 각각 1300만 명과 600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뒤이어 출연한 50부작 사극 <육룡이 나르샤> 역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중이다. 흥행만큼이나 고무적인 사실은 각 작품에서의 연기 또한 고른 호평을 받았다는 점이다. 공감할 여지 따위는 남겨두지 않는 선명한 악당과 전무후무한 역사적 비극의 주인공, 대하 서사극의 고전적 영웅까지, 이 젊은 배우는 한 해 동안 자신이 얼마나 폭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배우인지를 충분히 증명했다.
우주 7차 대전
<스타워즈> 시리즈의 7번째 에피소드인 <깨어난 포스>는 1983년 작인 <제다이의 귀환>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시점의 은하계를 그린다. J.J. 에이브럼스가 지휘권을 넘겨받은 이 프로젝트에서 먼저 눈에 띄는건 변화와 새로운 시도들이다. 오리지널의 설계자인 조지 루카스는 루카스필름과 이 역사적인 프랜차이즈에 관한 모든 권리를 3년 전 (물론 천문학적인 금액을 받고) 디즈니 사에 넘긴 뒤 은퇴했다. 즉, <깨어난 포스>는 속편인 동시에 리부트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해리슨 포드, 캐리 피셔, 마크 해밀 등의 원년 멤버부터 오스카 아이작과 아담 드라이버, 루피타뇽까지 쟁쟁한 배우들이 캐스팅됐지만 팬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있는 두 사람은 신인인 데이지 리들리와 존 보예가다. 미국 영화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블록버스터가 이야기를 이끌어갈 주연 자리에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앉힌 것이다. 시대의 진보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J.J. 에이브럼스가 시리즈의 전통을 아예 부정하려 드는 후계자는 아니다. 원작의 열혈 팬인 그는 오히려 새로운 작품이 오리지널 3부작의 미덕을 충실히 잇기를 바란다. 컴퓨터그래픽 대신 미니어처 촬영과 실사 배경의 합성에 집중한 건 당대의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되살리고자 하는 의도다. 역사는 이렇게 변화를 포용하며 다시 한번 이어진다.
스티브 잡스 효과
표현추상주의의 거장인 마크 로스코도, 스트레이트 사진의 개념을 제시한 앤설 애덤스도, 한국에 오면 그저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작가가 된다. 올해 열린 두 거장의 전시는 이미 고인이 된 애플의 전 CEO를 공히 광고 문구에 등장시켰다. 이해는 가지만 동의하기는 망설여지는 전략이다. 물론 이 정도의 대형 프로젝트가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로스코와 애덤스의 팬뿐만 아니라 둘의 이름이 귀에 설 사람들까지 끌어 모아야 한다. 쿨한 슈퍼 스타이자 롤모델인 잡스의 추천은 생존 유명인 한 트럭의 홍보보다도 더 위력적일 것이다. 하지만 내용과 어울리든 말든 잘 팔리는 포장을 하고, 요란한 리본까지 달아놓는 듯한 요즘의 전시 마케팅은 정작 작품 그 자체를 감상하고 싶어 하는 애호가들로 하여금 나들이를 망설이게 한다
힙합은 계속된다
올해도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엠넷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세 시즌을 연달아 성공시킨 <쇼미더머니> 제작진의 어깨는 이미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듯 보였고, 대중들 역시‘욕하면서도 보고 싶은’마음으로 네 번째 시즌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첫 회부터 반응은 꽤나 폭발적이었다. 피타입, 마이크로닷, 베이식, 이노베이터, 서출구 등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레전드로 불리는 힙합 뮤지션들부터 송민호, 라비, 몬스타엑스 같은 아이돌 그룹 출신의 래퍼들까지, 출연자 라인업만으로도 이번 시즌은 시청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송민호의‘산부인과’ 발언, 블랙넛의‘일베’ 논란 등 몇몇 출연자들의 도를 넘어서는 언행이 문제되면서 <쇼미더머니> 시즌 4는 온갖 논란이 뒤섞인 문제적 프로그램이 되고야 말았다. 반면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언프리티 랩스타>는 두 번째 시즌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힙합 프로그램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아이돌 걸 그룹 출신 출연자들이 그동안 받아온 선입견을 거부하고, 성장을 이루어내는 스토리도 보여주었다. 물론 그사이의 대결 구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한층 더 자극적인 편집으로 노이즈 마케팅의 정석을 보여준 점은 다소 아쉽지만 그 또한 <언프리티랩스타>가 예능 프로그램의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시즌1 출연자 제시의 말처럼 말이다. ‘This is competition.’
여자들의 반격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파생된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에 대한 과격한 반격이다. 맨스플레인(일일이 여성을 가르치려고 드는 남성의 고압적인 화법)은 일상이고, 성차별적인 콘텐츠가 흔하게 유통되고, 성범죄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 앞에서 오랫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결과다. 메갈리아의 화법은 받은 만큼 갚아준다는 쪽에 가깝다.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색적인 공격과 조롱에 동의하기란 아무래도 어렵다. 그런데 이들이 바라는 바도 ‘동의’는 아니다. 한국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에 시달려왔는지, 남자들도 엇비슷한 입장이 되어 겪어봐야 실감한다는 게 이들의 논리다.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남자든 여자든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공격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진흙탕 싸움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
아이유가 논란인 이유
아이유가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한 미니 앨범 <CHAT-SHIRE>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발표되자마자 각종 차트를 점령했으며, 완성도에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J.M. 데바스콘셀로스의 소설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썼다는 ‘Zeze’의 가사에 대해 일부에서 문제 제기를 하면서 분위기는 단번에 무거워졌다. 학대에 시달리는 5살 소년의 캐릭터에 대해 ‘순진하지만 교활하고,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 더럽다’는 표현을 쓴 게 부적절하다는 견해였다. 재해석을 통해 새롭게 창조한 캐릭터를 나무인 밍기뉴의 시점에서 묘사했다고 가수가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점점 난처한 방향으로 번졌다. 내용에 소아성애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음원 폐기 서명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 작업의 질이 아닌 창작자의 도덕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어느 톱 가수의 스캔들에서 시작된 설전은 점점 표현의 자유와 그 한계에 대한 갑론을박이 되어가는 중이다.
왜들 읽었을까
올해 가장 오래 순위에 올라 있던 베스트셀러는 <미움 받을 용기>였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낼 필요가 없으며 상대방의 인정과 관심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찾으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 책은 마치 SNS에서 ‘좋아요’를 갈구하는 현대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다. 함께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 있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 <개인주의자 선언> 같은 책에서도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개인주의의 가치를 회복할 때 돌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야말로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의 삶 모두 타인의 시선과 오지랖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하는 심증이 들 즈음, 성공의 원인이 제목에도 있었을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이 싫어서>.
- 에디터
- 황선우, 정준화, 이채린
- Artworks
- PYO KI SIK
- PHOTOS
- GETTY IMAGES/MULTIB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