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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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호는 오래 부재했다. 서울 밖에서 보낸 삶이 더 길다. 서울 사람 누구나 서도호를 안다고 말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서도호를 본 적이 없다. 환영이나 전설처럼 언급되던 그 이름의 실체를, 그가 살고 일하는 런던 아틀리에로 찾아가 더블유가 직접 만났다.

서도호의 집은 집인 동시에 '집이 없는 상태'다. 반투명의 천으로 만들어진 구조물들은 집의 유령 또는 허물처럼 보인다.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오래 생활해온 작가는 자신이 살던 장소를 재현하고 그곳과 작별하는 의식을 거듭해왔다. 집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집에서 자유로워지는 아이러니가 거기 존재한다.

서도호의 집은 집인 동시에 ‘집이 없는 상태’다. 반투명의 천으로 만들어진 구조물들은 집의 유령 또는 허물처럼 보인다.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오래 생활해온 작가는 자신이 살던 장소를 재현하고 그곳과 작별하는 의식을 거듭해왔다. 집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집에서 자유로워지는 아이러니가 거기 존재한다.

전면이 유리로 된 창 너머는 운하였다. 커튼 틈을 벌리고 보니 좁은 물길 위로 거짓말처럼 작은 배들이 떠 있다. 물가의 둔덕에는 가끔 백조가 날아들어 머물다 간다고 했다. 오리도 까마귀도 아닌, 백조라니 과연 런던답다. 뉴욕에서 오래 지내다 온 서도호는 이 도시의 ‘어느 골목 모퉁이를 돌면 중세로 옮아온 듯’ 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살던 집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해온 작가가 지금 살고 일하는 이 공간도, 언젠가는 천으로 모형을 떠서 어느 미술관 전시실 한가운데로 이동을 하게 될까? 테이트 모던의 커다란 방을 온통 차지한 뉴욕 지하 스튜디오 계단을 재현한 붉은색 조형물처럼 말이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구석구석을 살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오래 머물며 세계적인 커리어를 쌓은 아티스트, 극도로 인터뷰를 삼가며 베일 속에 싸여 있던 작가, 온갖 매체에서 꼽는 미술계 영향력 1인자, 서도호의 런던 작업실이다.

뉴욕에서 생활한다고 알려진 그는 1년 전부터 가족과 함께 런던에 머무르고 있었다. 물감 통이나 색상 견본 같은 미술 도구들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자리하고 있는 젖먹이 용품들이 그의 일상을 짐작하게 했다. 하얀 스탠드 조명부터 노란 쓰레기통까지 작가의 손이 닿지 않은 사물이 없는 그 장소가, 서울의 스튜디오나 미술관 카페보다 대화에 내밀하고 솔직한 기운을 불어넣어줬음은 분명하다. “제 작품은 장소특정적이라서 실제 가서 보지 않으면 봤다고 할 수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서울에 설치하는 작품들은 다 신작인 셈이죠. 시집 가는 새색시처럼 설레요.” 집의 재현이지만 진짜 집이 아닌 것, 흐릿하게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서도호 작품의 집은 일종의 ‘고스트’ 다. 마찬가지로 이 작가의 이름 또한 그동안 우리에게 고스트로 존재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만난 적 없이 거대해진 서도호라는 이름. 그 이름을 둘러싼 풍문이 아닌 실체에 다가가는데, 이 인터뷰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의 녹음 파일을 옮겨 적을 때, 까끌하고도 또렷한 그의 목소리 뒤로 끽끽거리는 새소리가 깔려 있었다. 런던의 백조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3월 22일부터 리움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있다. 2003년 이후로 서울에서 열리는 첫 전시에 대한 감회가 어떤가? 어떤 신작들을 선보이나?
2003년의 아트선재 전시에서는 공간이 작아서 천 작업 설치를 많이 못했다. 이미 만들어져 외국에서만 전시됐던 작품이 2/3 정도고 나머지는 리움 전시를 위해 새로 만드는 작품들이다. 제일 큰 작품이 신작이 될 거고, 내가 지금까지 쭉 살았던 집들을 천으로 만든 다섯 채 정도가 들어간다. 그런데 왜 다들 신작을 그렇게 궁금해하나?

원래 기자들이란 새로운 소식을 먼저 전해야 한다는 직업적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니까(웃음)?
내 작품은 대부분 장소특정적이다. 실제 가서 보지 않으면 작품을 봤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서 설치하는 작품들은 다 신작인 셈이다. 감회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시집가는 새색시 같은 느낌이 든다. 화단에 내 세계를 알리게 된 작품 중에 가장 중요한 게 천 작업인데 서울에서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보여줄 기회가 없었으니까. 한국 관객들에게 다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설레는 전시다.

내 경우 당신의 작품을 자주 보고 있다. 종종 가는 쇼핑몰(타임스퀘어) 외부에 설치된 조형 작품 ‘카르마’ 얘기다.
아트선재센터의 김선정 선생이 큐레이팅을 했다. 좋은 작가들이 많이 참여했고 그런 측면에서 건축주가 맘대로 하게끔 해줬다고 할까. 사실 쇼핑몰 앞에 들어갈 성격의 작품은 아닌데, 그런 작품을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장소에다 설치할 수 있다는 면에서 좋았다.

유니폼들을 연결한 작품이라거나 군번표를 연결한 갑옷처럼 집단 속의 개인이라는 주제를 항상 다룬다. 집단 속의 일원으로 정체성이 구성되지만 그 속에서 개인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저항이 느껴진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거나 정의 내리기 힘든 주제 같다. 어쩌면 바로 그 정의 내리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내가 늘 궁금해했던 건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정의하려면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한가 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 공간과 타인의 공간이 어떻게 만나고 전체가 되는가… 그러니까 칼로 자르듯이 개인과 집단의 영역을 구분하는 건 어렵다. 애매모호한 바운더리를 계속 탐구해온 셈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는 나를 둘러싼 공간이 몹시 좁게 느껴진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다 보니 물리적으로도 비좁고, 정서적으로도 타인과의 거리가 빡빡하다.
내 초기의 교복•군복 작품, 벽지 작품들이 그런 한국적인 특징들을 다룬 작품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부정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다. 보는 사람들이 자기를 투영해서 해석하면서 그렇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얘기하신 한국적인 특징은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그게 한국을 한국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뉴욕이나 런던이 못 가진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런던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은 전시를 봤는데 작품 설치에 대한 주문사항이 까다롭더라. 당신의 작품 또한 설치가 만만치 않게 복잡할 것 같은데.
설치가 복잡은 하지만 내가 페인팅하는 사람들처럼 예민하진 않다. 물론 작품이 벽에 걸고 끝나는 게 아니라 디테일은 필요하지만. 하지만 로스코를 비롯한 회화 작가들의 예민함과는 종류가 좀 다른 거 같다. 나는 여러 사람과 작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일이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 타협이나 한계 속에서 의도를 구현해내면서 오히려 창의력이 촉발되는 경우가 재미있다. 그런 부분이 있다.
일단 나에게는 개념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그걸 어떻게 타협 절충하지 않고 3차원 세계에서 최대한 물화시킬것인지가 두 번째 문제고. 개인적으로는 아이디어 내는 단계가 가장 익사이팅하다. 그 느낌을 갖고 싶어서 작품을 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큰 희열을 느낀다. 예술가는 반쯤 철학가가 돼야 한다. 예술은 절대로 쉬운 게 아니고 쉬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게 어려울 것까진 없겠지만(웃음).

훌륭한 미술 작품은 대개 그랬던 것 같다. 누구나 한 마디 보태고 싶게 만들지만, 단일한 이야기로 수렴되지는 않는 것.
쉬워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간 뜻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니까. 아티스트가 철학자와 다른 점은, 개념에 그치지 않고 시각 언어로 그걸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엄청나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시간이나 비용,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현실화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현실적인 제약에 의해서 최초의 아이디어가 흐려지지 않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게 결국 작가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생각지 않은 우연에서 좋은 효과가 날 때가 있다. 하지만 우연에 의존한다는 바로 그 점이 나는 힘들었다. 아이디어를 내서 관철시키는 게 내 존재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떤 생각을 내서 그 생각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샛길로 빠지는 스타일이 앉 맞는 건가(웃음)?
페인팅을 할 때는 매번 붓으로 점을 찍거나 획을 그릴 때 그 모든 과정이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 점을 왜 거기에 찍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하지만 얼마 전 십몇 년 만에 페인팅을 다시 시작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페인팅과 조각은 동물로 치자면 전혀 다른 종 같다. 페인팅 안에도 들여다보면 우주가 있지만 나는 공간을 다루는 게 참 좋다. 그중에서도 아주 큰 공간.

공간 다루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에서, 당신이 천착해 온 ‘집’이라는 주제가 한꺼풀 설명된다. 정서적인 면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나?
그거 하나만 가지고도 얘기하자면 세 시간이 모자랄 거다(웃음). 사실 나에게 집은 핑계다. 인터뷰 첫머리에서 언급했지만, 거칠게 얘기해서 나는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미술을, 예술을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 쉬운 얘기로 하면 항상 ‘왜’ 라는 질문을 한다. 왜 우리
가 여기 있나, 왜 태어났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런 아주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영어로 말하면 프로파운드한 질문들을 늘 던진다. 그 과정에서 집이나 옷을 가지고 답을 얻으려고 노력을 하는 거다. 옷의 개념을 확장하면 건축이 되는 거고 나에게는 그 둘이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집 자체가 어떤 관심사라고 볼 수는 없다. 크게 보자면 세상을 바라보고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집이라는 요소를 도구로 쓰는 셈이다.

‘왜’라는 질문은 답을 얻기 어려운 것들이 많고, 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만 생각한다.
아티스트로 살아남으려면 좀 바보스러운 부분이 있어야 하는 거 같다. 나는 답을 못 구하더라도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만드는 이 작품이 완성될 때쯤 구하는 답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동시에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나기도 해서, 작업을 마치면 내 마음은 딴 데 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애착이 아마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할 거다. 마음이 다음으로 이미 옮아가 있으니까. 가끔 작품이 뱀의 허물같다. 그 순간에는 분명 작품과 같이 살지만 다음 순간에 나는 다른 데 가 있으니까. 작품을 놓고 새로운 작품으로 옮겨가는 게 허물 벗는 뱀의 과정을 반복하는 거 같다. 그렇게 나에게서 남는 껍데기가 작품이고.

넓게 보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가는 과정의 궤적, 그리고 허물만 남겠다.
그러니까 아티스트가 바보 같아야 하는 거다. 계속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똑같은 일을 하니까. 천으로 집을 만드는 건, 집이 돌아갈 곳이 아니라 늘 가지고 다니는 거라는 생각에서다. 계속 이동하는 여행처럼 수많은 공간을 우리가 통과하는 과정이 삶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 경쾌해지는 느낌도 든다.
어깨에다다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데? (웃음)

한국 사람들은 속물적인 의미로 집이 자신을 말해준다고 생각하고 집의 무게에 눌려 사는데, 그걸 버리고 언제든 놓여나 수 있다는 자유로운 생각 같으니까.
천으로 만든 집이 반향을 일으킨 이유도, 일종의 모뉴멘트 같은 집을 움직이려는 시도라서가 아닐까 싶다.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 처음 내가 자라난 서울 부모님 집을 천으로 만들었다. 한옥 구석구석 치수를 재며 내 몸에 완전히 체화시키는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비로소 나는 그 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대로 떠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수천 번 얘기해야 하니까.

움직이는 집이라서 가벼운 천으로 만든 걸까?
집이지만 그건 집이 아니라 ‘집이 없음’을 말하기도 한다. 집의 로스(loss). 반투명한 천으로 된 작품은 사실 본래의 오리지널 집이 아니니까. 그리고 (창의 커튼을 가리키며) 이렇게 고스트의 느낌이 나는 거다. 실체가 아닌 환영, 실재가 아닌 로스, 메모리 … 이런 걸 얘기하기 위해서. 집이라는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서 가장 근접 표현할 수 있는 소재가 그 반투명의 천이다. 몸과 닿는 가장 친숙하고 밀접한 환경인 옷을 확장하면 집이 되듯이. 옷의 재료인 천으로 만든 집으로 가는 건 당연한 논리의 확장이었다. 그리고, 집의 허물인 그 작품은 당신이 벗어놓은 허물이기도 하다. 아마도(웃음).

서도호의 2G 폴더폰 전화벨이 울리면서 인터뷰는 잠시 멈추었다. 서울의 큐레이터로부터의 연락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한옥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한옥에서 살아본 사람은 얼마 안 돼요. 진실은 잘 모른다는 얘기죠. 그것처럼 다들 서도호 작품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사진으로 본 거죠.” 서도호의 삶이 거쳐간 다섯 채의 집들이 한 장소에 모였을 때 어떤 광경이 되며 무슨 새로운 의미가 생겨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처음으로, 사진으로만 보던 그 작품의 실체를 아래나 옆에서, 빙 돌거나 성큼 다가가 실제로 보게 된다. 서도호가 지나온 질문과 답변의 궤적인 그 집들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서도호의 고스트도, 서울에서 비로소 실존하게 될 것이다.

P.S. 서도호와는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전시회를 일주일 남짓 앞둔 리움, 그는 출입 통제라고 써붙인 전시장 장막 안으로 나를 데려가 설치 중인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높은 사다리 사이사이로 그가 유년기를 보낸 성북동의 한옥부터 13년 동안 살던 뉴욕의 아파트까지, 각기 다른 색의 천으로 재현된 실물 사이즈의 집이 세워지는 중이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구조물의 표면 사이로 오후의 빛이 보얗게 배어나오거나 미술관의 검은 벽면이 비쳤다. 콘센트의 구멍 두 개, 욕실 파이프의 둥근 잠금쇠까지 재봉으로 똑같이 구현한 집들은 놀랄만큼 섬세했으며 앞뒤 위아래 뿐 아니라 속에 들어가서도 구조를 살필 수 있었다. 그러니 여태껏 사진으로 보고 안다고 여긴 건, 본 것도 안 것도 아니었다. 서도호가 통과해온 집이자 그가 벗어놓은 거대한 허물들은 한눈에 아름다웠고 정교해서 신기했으며, 무엇보다 정성스럽게 텅 비어 애잔했다. 서도호에 대해 한마디쯤은 보탤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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