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컬러가 사라진 흑백의 시즌이라지만, 생기 넘치는 색색의 프린트 없이 이 여름을 보낼 수는 없다. 특히 체크판부터 우표까지, 기발한 프린트들이 즐비한 이번 시즌엔 더더욱.

기하학의 승리

디자이너들이 패션과는 극점에 서 있을 듯한 수학에 관심을 둔 걸까. 할리퀸 패턴으로 무장한 올리비에 루스테잉의 80년대 뮤즈들과 루이 비통의 런웨이부터 모델들의 몸을 온통 뒤덮은 다미에 체크판, 마이클 코어스의 경쾌하고 볼드한 스트라이프, 그리고 그를 유려하게 구부려 롤러코스터 레일을 연상시키는 프린트를 만들어내거나 줄무늬의 굵기를 다이내믹하게 변주해낸 마크 제이콥스까지, 이번 시즌 런웨이의 프린트 승자는 단연코 ‘기하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옵티컬 패턴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확실한 존재감으로 좌중의 시선을 압도한다는 것. 이는 올여름, 할리우드 잇걸들이 이 프린트에 올인한 이유기도 하다. 미니멀한 클러치 외에 그 어떤 액세서리도 필요 없지만 그 시선을 견뎌낼 만한 자신감과 당당함만큼은 필수다.

문명의 선물

시즌이 거듭될수록 놀랍게 발전하는 디지털 프린트 기법과 거기서 무한한 영감을 얻는 디자이너들 덕분에 우리는 더욱 다양한 프린트를 ‘입을’ 수 있게 됐다. 최근 국내에서는 한채영이, 해외에서는 리한나가 입어 화제가 된, 프린트의 연금술사 마리 카트란주의 우표 드레스가 대표적인 예. 이제는 사라지다시피 한 우표와 너무 가까워서 무신경해진 지폐, 인류 문명에 의해 탄생한 이 두 모티프가 이토록우아한 드레스와 팬츠 수트로 환생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뿐인가, 아티스트 레르하르트 리히터의 강렬한 사진 작업을 프린트한 원피스 시리즈를 선보인 프로엔자 스쿨러, 수중발레 선수들의 모습을 프린트한 몽클레르, 수노의 핸드폰 프린트 드레스까지, 소재와 기법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인류 문명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드는 프린트들이 이번 시즌의 패션계를 더욱 다채롭게 하고 있다.

동방불패

동양적인 모티프가 또 한 번 승리를 거둔 시즌이다. 노골적으로 재패니즘을 외친 프라다 컬렉션이나 하우스의 헤리티지인 ‘꽃무늬’를 국화를 통해 해석한 구찌, 용과 호랑이, 봉황 등 동양의 동물을 그리고 수놓은 푸치, 한 폭의 화조도를 그대로 옮긴 듯한 에트로의 런웨이까지. 이 프린트의 클리셰가 부담스러운 동양인에겐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벼운 보머 재킷이나 파자마 팬츠 등 스포티한 모티프의 아이템으로 시도하는 것이 방법. 에지 넘치는 리조트 룩을 찾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와일드 키드

팝 아티스트의 눈으로 바라본 정글! 레오퍼드, 파이톤 등 주로 겨울에 주목받아온 야생의 패턴들이 올여름, 총천연색을 입고 젊고 ‘핫’하게 변신했다. 특히 청록색과 오렌지색, 노란색과 보라색 등 보색을 대비시킨 겐조 컬렉션은 레오퍼드 룩의 연령을 족히 열 살은 낮춘 일등공신. 덕분에 패션에 민감한 10대나, 하이톱 스니커즈와 하이패션의 믹스 매치를 즐기는 길거리 어린 친구들도 레오퍼드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구찌, 프로엔자 스쿨러, 에르뎀은 서늘한 뱀의 표피에 생명을 불어넣은 디자이너들. 패치워크 기법을 통해 뱀피 소재를 스트리트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프로엔자 스쿨러나 뱀피에 곱디고운 파스텔 컬러를 입힌 에르뎀, 그리고 색색의 컬러 팔레트를 연상시킨 구찌 런웨이의 뱀피 룩까지, 올여름 도시는 정글 태생의 와일드 패턴에 점령당할 예정.

꽃다운 꽃

S/S 시즌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플라워 프린트지만, 여기에도 ‘대세’는 존재한다. 어떤 시즌에는 그래픽적으로 단순화된 꽃의 형상이 인기를 끄는가 하면, 어떤 시즌에는 정열적이고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꽃무늬가 대중을 사로잡는다. 이번 시즌을 장악한 프린트는 인상파 화가의 캔버스 위에서 봤을 법한 은은하고 낭만적인 꽃.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사색적이고, 확실히 드러나진 않지만 그럴수록 더욱 시선이 가는, 그런 꽃무늬가 이번 시즌의 대세다. 디올을 필두로 드리스 반 노튼, 로샤스, 보테가 베네타, 필로소피 등에서 선보인 이 ‘연약한’ 꽃 프린트는, 그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쿨한 애티튜드로 소화할 때 가장 진한 향기를 발산한다. 타탄체크, 아무렇게나 올려 묶은 듯 헝클어진 헤어스타일, 매니시한 선글라스와 함께 꽃 프린트를 선보인 프린트의 대가 드리스 반 노튼의 룩을 참고할 것.